출구를 찾아서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바닥에 드러누워 있었다.
그때까지 의식을 잃고 있었던 모양이다.
뺨에 닿는 바닥은 서늘하니 차가워서 기분이 좋았다. - P185

한 번 더 시험해보았지만 붉은 문은 열리지 않았다. 마치접착제로 붙여놓은 것 같다.
‘누가 일부러 가둬둔 거면 어쩌지?‘
불안해하며 반대쪽 파란 문 손잡이를 돌려보니 이쪽은 아무 저항 없이 움직였다. - P186

옆방이나 복도가 나올 줄 알았는데 완전히 빗나갔다. 눈앞에는 예상치 못한 광경이 있었다.
"아니, 잠깐 이거 어떻게 된 거야?"
질문은 허공으로 사라졌고 대답해줄 사람은 없다. - P187

천장은 없다. 벽과 벽 사이에 낀 하늘이 길고 가늘게 펼쳐져 있었다. 아침노을인지 저녁노을인지 희미한 오렌지빛으로 물들어 있다.  - P187

(전략). 내가 있는 게 어떤 곳인지 깨달았다. 이곳은 미로 속이다.
아니, 아직 그렇다고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틀 - P188

나는 미로가 싫다. 몇 년 전 여행지에서 친구와 함께 갔다가 지독한 꼴을 당한 적이 있다. "빠져나오지 못하면 곳곳에비상 출구가 있으니 그곳으로 탈출하세요"라고 직원이 말했는데 그 비상 출구를 찾지 못했을뿐더러 친구까지 놓쳐서즐겁기는커녕 패닉에 빠질 뻔했다. - P188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다리가 아파서 도중에 하이힐을벗고 맨발로 다녔다. 하늘 색깔은 여린 오렌지빛 그대로 태양이 하늘의 한 지점에 멈춰 있는 것 같았다. - P189

얼어붙은 채로 우뚝 서 있는데 그림자의 본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보다 조금 연상, 30대 초반쯤 되는 남자였다.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있고 온화한 생김새였다. 거친 분위기는 없었다. - P190

"오른쪽이면 오른쪽, 왼쪽이면 왼쪽 벽에 손을 짚고 걸어가면 언젠가 미로에서 나갈 수 있다던데요. 지금이라도 그렇게 해볼까요?"
내 제안에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 탈출법이 다 통하는 건 아니야. 출발 지점과 도착 지점이 미로 바깥쪽에 접해 있으면 괜찮지만 어느 한쪽이 안쪽에 있으면 통하지 않아." - P191

또 한참 헤매면서 나는 그에게 이런 제안을 해보았다.
"벽 바깥을 볼 수는 없을까요? 출구가 어느 쪽인지 알 수있을지도 몰라요." - P192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미로에서 빠져나갈 실마리조차찾을 수 없다. 파트너를 만난 덕에 힘을 낼 수 있었지만 내정신은 이 고문에 한계에 달해 있었다. 어떻게 해도 나갈 수없다는 절망감에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정신 차려. 잠깐 쉴까?"
다정한 말조차도 짜증스러웠다. - P194

(전략).

그렇게 외친 순간, 잠에서 깼다. 나는 내 방 침대에 있었고눈에 익은 가구와 장식품에 에워싸여 있었다. - P194

꿈은 이틀만 지나면 잊는다.
미로의 악몽에서 몇 주가 지났을 때였다.
(중략).
꿈에 나왔던 그 남자와 판박이였던 것이다. 이미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보자마자 그 사람인 줄 알았다. - P195

이제야 생각해본다. 그 남자는 내게 소중한 운명의 상대였던 게 아닐까? 그것을 신이 꿈속에서 가르쳐주었는데, 두눈을 멀뚱히 뜨고 놓친 게 아닐까? - P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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