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내게 선택의 여지가 있나? 나는 뜨거운 물줄기를 맞고 서서 그때 일을 머릿속으로 다시 떠올려본다. 상황은 냉혹하고 실재적이고 무자비하다. 돈은 바닥났고, 마저리와 나와 우리 아이들에게는 시간이 없다. 어떻게 해서든 빨리 취직을 해야 한다. - P33

나와 사정이 비슷한 이들이 많다. 가장 먼저 나를 뽑아줄 회사가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중략). 하지만 나 같은 사람은 넘쳐나고 일자리는 너무 적다. - P33

나는 샤워를 마치고 옷을 챙겨 입은 후 다시 사무실로 들어간다. 나는명단을 훑기 시작한다. 같은 주에서 며칠 간격으로 두 사람을 죽이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당국에게 패턴을 읽히면 곤란하다.
하지만 내게는 시간이 없다. - P34

4

원래 컴퓨터는 가족 공용이지만 언제부터인가 빌리 전용이 돼버렸다. 이제 컴퓨터는 녀석의 방 한구석을 당당히 차지하고 있다. 1994년, 나는가족에게 컴퓨터를 선물했었다. 구조조정으로 해고당하기 1년 전, 경제적으로 안정권에 들어 있었을 때, 그때는 지출이 많았다. - P35

찰스 디킨스는 『데이비드 코퍼필드』에서 이렇게 말했다. "1년 소득이 20파운드, 1년 지출이 19파운드 6펜스면 행복한 사람이다. 1년 소득이 20파운드, 1년 지출이 20파운드 6펜스면 불행한 사람이다." 그는 1년 소득이 제로까지 떨어지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얘기하지 않았다. 하긴 그런걸 굳이 말로 설명할 필요가 있겠나? - P35

나는 컴퓨터가 제공하는 다양한 서체와 크기로 회사의 이름과 주소, 전화번호가 적힌 그럴 듯한 용지를 만들었다. (내 계획의 첫 번째 단계는 집에서 3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마을에 사서함을 빌려놓는 것이었다.)

B. D. 산업 용지
사서함 2900
와일드베리, 코네티컷 06899 - P36

그런 다음, 나는 페이퍼맨의 안내 광고 담당 부서로 전화를 걸었다. (중략). 그들은 45달러를 받고3개월간 광고를 실어주기로 했다. 외지 인력을 끌어다 써본 경험이 적은소규모 공장이라고 설명하자 잡지사의 직원은 회사 수표 대신 우편환으로 지불해도 된다고 했다. - P37

내 광고는 2월 마지막 주에 발행된 3월 호에 실렸다. 3월 첫 번째 월요일까지 총 97명이 사서함 2900번으로 이력서를 보내왔다.
"뒤에 0을 몇 개 붙이니 우편물이 쏟아지네요."
우체국 직원이 말했다. 우리는 그 말에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업계자들에 관한 업계지를 만들려고 한다고 설명했다. - P37

"행운을 빌어요"
그녀가 말했다. 나는 고맙다고 했고,
"요즘엔 직접 사업에 뛰어드는사람이 많아졌더군요. 그거 못 느꼈나요?"
나 역시 느꼈다고 대답했다.
우편물의 양은 나날이 줄어갔다. 하지만 이후로도 『페이퍼맨』의 새 이슈가 발행된 직후에는 예외 없이 뜨거운 반응이 쏟아졌다. 마지막으로 내 광고가 실린 5월 호는 무려 231명으로부터 이력서를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 P38

기술자들은 빈손으로 돌아오게 됐죠. 멍한 기분으로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살아남고, 성공하는 데 반드시 알아야할 한 가지를 모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한 가지는 바로 이겁니다. 아무도 우리를 초대하지 않았다는 것. 아무도 우리에게 빚을 지지 않았다는것 일자리와 봉급과 중산층의 멋진 삶은 권리가 아닌, 싸워서 쟁취해야하는 전리품입니다.  - P39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상기시켜야 하죠. ‘그들은 나를 필요로 하지 않아. 내가 그들을 필요로 하고 있는 거야.‘ 당신은 무엇을 요구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닙니다. - P39

내가 받아 본 이력서들 중 4분의 1에서 그런 거만함과 짜증이 묻어났다. 하지만 대부분 이력서의 문제점은 그보다 훨씬 단순하다. 그들의 목표가 잘못된 것이다. - P40

5

내가 결정권자라면 나보다는 그를 채용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화학공학 학사 학위의 위력이다.
또한 그는 자기 확신에 차 있다. 한 직장에서 25년간 근무했다는 건 그가 능력 있고, 헌신적인 직원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가 몸담았던 회사는 사악하고, 신의 없는 곳이라는 게 확인된 셈이고) - P42

마저리는 두 곳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한다. 그리고 매주 월요일과 수요일에는 그중 한 곳에 나가야 한다. (중략). 아내가 실질적으로 집에 가져오는 돈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아내는 집을 나와무언가를 한다는 자체가 좋은 모양이다. 아내 덕분에 항상 공짜로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것도 좋은 점이기는 하다. - P43

(지난주 에벌리를 그렇게 남겨둔 채 현장을 떠나온 후로 지금껏 아무소식도 접하지 못했다. 궁금해 미치겠지만 섣불리 알려고 나서다가는 위험할 수 있다. 「뉴욕타임스」에 실릴 만한 사건은 아니었다. 그리고 내가즐겨보는 지역 주간지 『저널』은 폴 시티까지 배달되지 않는다. 우리 집케이블 서비스에는 지역 뉴스가 포함돼 있지 않다. 하지만 왠지 에벌리 사건姿이 텔레비전 뉴스에서 다뤄졌을 것 같지는 않다.) - P44

릭스의 집 옆으로는 텅 빈 벌판이 펼쳐져 있다. 관목과 키 작은 소나무로 덮인 벌판에는 빨간색 바탕에 흰색으로 ‘매물‘이라고 적힌 표지판이 하나서 있다. 누군가가 검은색 매직펜으로 적어놓은 전화번호도 보인다. - P45

시간은 계속 흘러간다. 허기도 달래야 하고, 6시까지 마저리도 태우러가야한다. 아무래도 오늘은 힘들 것 같다. 이렇게 하루를 날려버린 것이다.
이런 날이 반복되면 곤란하다. (중략).
이젠 어쩌지? 공교롭게도 내일 나는 올버니에 면접을 보러 가야 한다.
포장지와 라벨 제조회사로, 통조림에 두르는 라벨을 주로 생산하는 곳이다. 큰 기대는 걸고 있지 않다. 라벨은 내 전문이 아니다. - P47

6

수북이 쌓인 이력서들을 처음으로 훑던 날,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나는 기분 좋은 권력을 즐겼던 것 같다. - P49

하지만 그 도취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결국 내게는 수많은 질문들만 남겨졌다. (중략). 나보다 조금씩 나은 이들의 이력서들을 보고 있노라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중략). 게다가 이게 다 몇 명이야? 제공되는 자리는 몇 개 안 되는데. - P49

자살은 선택 사항이 아니다. 나는 단 한 번도 자살을 생각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이들 중 몇몇은 자살 충동에 휩싸여본 적이 있을 것이고, 그중 누군가는 그것을 실행에 옮길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15년전에 시작됐다. 항공 교통 관제관들이 집단으로 정리해고됐을 때, 그 그룹의 자살률은 그야말로 폭발적이었다. 지금 우리보다 훨씬 더 외로움을 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 P50

문제의 『펄프』 기사는 뉴욕 주 아카디아라는 마을에 자리한 공장에서 쓰고 있는 획기적인 공정에 관한 것이었다. - P51

업튼 ‘레이프‘ 팰런은 내가 있어야 할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기사를 읽고 또 읽어봐도 내 생각은 달라지지 않았다. 공정한 경쟁을 통해 내가 충분히 차지할 수 있는 자리였다. - P52

필요하다면 그를 죽여야 했다. - P52

과연 내가 그를 죽일 수 있을까? 진지하게 묻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정당방위일 수도 있다. 내 가족, 내 인생, 내 대부금, 내 미래, 나 자신, 내 삶을 살리는 일이니까. 명백한 정당방위다.  - P53

내가 그걸 할 수 있을까? 내가 사람을 죽일 수 있을까? 하루에도 사건은 숱하게 발생한다. 나라고 못할 거 있나? 게다가 내게는 걸려 있는것도 많잖아. 무엇보다도 내 인생. 그보다 더 절박한 게 또 있나? - P54

물론 나는 그보다 나은 자격을 갖추고 있다. 우리 둘만의 경쟁이라면그 자리는 당연히 내 차지가 될 것이다. (중략).
또 다른 누군가가 내 자리를 노릴지 모른다. - P54

그렇게 뒤척이다가 세 시간 만에 깨어난 내게 서늘한 의식이 찾아들었다.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알고 있었다. - P55

7


(전략).
면접. 물론 이번에도 나는 일자리를 잡는 데 실패했다. 통조림 라벨에대해 익히게 될 일이 없어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롱홈으로 향한다.
나는 채용되지 않았다. 기대도 하지 않았고, (후략). - P56

나는 요란스럽게 친분을 과시하는 타입도 아니고, 겉치레로 친절을 베푸는 타입도 아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세일즈맨 시절나는 수많은 새로운 농담들을 배워 달달 외운 후 고객들에게 적절히 써먹었다. 오후의 전화 상담을 앞두고는 긴장을 풀기 위해 보드카를 곁들여 점심을 먹었다. 그러니 술에 절어 지내는 날이 많았을 수밖에. - P57

내게 충분한 재능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과거에 공들여 닦아놓은세일즈의 기술은 보나마나 사라졌거나 많이 녹슬었을 것이다. (중략).
또다시 그 유치한 농담을 외워뒀다가 면접관들에게 써먹어야 하나? (후략). - P57

내게도 딱 한 번 기회가 올 것이다. 업튼 레이프 팰런이 불운하게 세상을 떠난 후 아카디아 프로세싱의 면접관에게 그간 익혀온 농담들을 신나게 풀어놓을 것이다. (중략).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는 기필코 나를 팔아치우고말 것이다. - P58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내 뒤로 차 한 대가 바짝 다가와 멈춰 선다. 백미러에 눈에 익은 회색 차가 큼직하게 떠오른다. (중략).
월요일에 나를 노려보고 지나쳐 갔던 바로 그 여자다. 럭스 부인! 어떻게 된 일이지? 독심술사인가? - P59

그녀가 내 말을 막고 빽 소리친다.
"내가 당신 아내를 찾아갈 수도 있다는 걸 몰라요? 주니가 뭐라 하든간에 말이에요. 당신은 자존심도 없어요? 왜, 왜, 왜 그 앨 내버려두지 않는 거죠?"
"난 당신이 생각하는 그 사람이...?
"당신이 그 애 아버질 죽이고 있다고요!" - P60

나는 몸을 쓰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감독 생활만 16년을 했던 사람이다. 그 기간 동안 내가 몸을 움직여 한 일이라고는 책상에 앉고, 현장을 슬슬 둘러보고, 차를 몰고 출퇴근한 것뿐이었다. 실직 후에는 더욱 움직일 일이 없어졌다. - P61

온몸이 덜덜 떨린다. 땀이 비 오듯 쏟아진다. 갑자기 오싹해진다. 더 이상쥐고 있을 수 없는 루거를 스포츠 재킷 안주머니에 쑤셔 넣고 왼쪽 팔뚝으로 잘 덮은 채 빠르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차들이 분주히 지나다니고 있을지도 모른다. 수천 명의 구경꾼들이 몰려들어 나를 지켜보고 있을지, 아니면 개미 한 마리 찾아볼 수 없을지 알길이 없다. - P63

끔찍하다. 정말로 끔찍한 일이다. 하지만 내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있었나? 그녀가 내 레인코트를 걷어내는 순간부터 내가 취할 수 있는 다른 선택이 있었나?
대체 나는 여기서 무엇을 시작한 걸까? 앞으로는 또 어떤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 P64

8

할 일은 정해졌다. 잠 못 이루는 절망의 밤을 보낸 후 나는 세 차례에 걸쳐 이력서를 다시 훑었다. 이번에는 보다 냉혹하고, 비판적이고 현실적이 돼보기로 했다. - P65

나는 처음부터 내 계획의 아이러니를 깨닫고 이 일을 시작했다. 그들, 여섯 명의 관리 전문가들, 허버트 콜먼 에벌리와 에드워드 조지 릭스와 나머지 후보들은 내적이 아니었다. 업튼 레이프 팰런 역시 내 적이 아니었다. 내 적은 기업가들이다. 내 적은 주주들이다. - P65

주주들의 관심이 오로지 투자 수익에만 묶여 있으니 회사에 별 애착이 없는 임원들만신이 날 수밖에. (요즘에는 여성 임원의 수도 부쩍 는 것 같은데) 그런 이유로, 작업 현장은 점점 더 척박해져가는 것이고, 그들은 회사나 스태프나 제품이나 고객에 대해 신경을 전혀 쓰지 않는다. - P66

민주주의의 밑바닥이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다. - P66

. 그런 이유로 항상 흑자를 내고 주주들에게 두둑한 배당액을 보장하는 우량 기업들이 한 푼의 이윤이라도 더 뽑아내기 위해, 그래서 임원들의 백만 달러, 천만 달러, 2천만 달러짜리 보상 패키지를 보장하기 위해 수천 명의 직원을 해고한다. - P66

9

예상대로 릭스 부부 살인 사건은 텔레비전 뉴스에서 보도됐다. 아무래도 허버트 에벌리 때보다는 훨씬 극적인 부분이 있었으니 그들을 살해한지 아홉 시간이 흘렀다. - P67

하지만 느낌이 이상하다. 뭔가가 잘못된 것 같다. 그녀가 사용하는 표현들, 이를테면 ‘잔인한‘, ‘야만적인‘, ‘무정한‘ 같은 표현들이 시청자들에게 잘못된 인상을 심어주고 있다. (중략).
하지만 중요한 건 그들이 용의자를 붙잡았다는 사실이다! - P68

뉴스가 끝이 난 후, 저녁을 먹기 전, 마저리가 주방으로 향하는 동안 나는 늘 그랬듯 내 사무실로 향한다. 다음 표적을 선택할 시간이다. 이제 네명 남았다. 그리고 팰런・・・・・・
하지만 지금 내게는 그런 생각을 할 여유가 없다. 캐비닛 서랍을 열고 이력서가 담긴 폴더를 꺼낼 정신도 없다. 이유 모를 실의가 나를 짓누르고있다. - P69

제지 업계가 마지막으로 대량 인력 삭감을 단행했던 건 2년 전이었다. 나도 그때 해고됐고, 내게 이력서를 보내온 이들 대부분도 비슷한 시기에 해고를 당했다. - P70

하지만 인원 삭감은 주기적인 것이고 언젠가는 되돌아올 일이다. 서두르지 않으면, 빨리 경쟁자들을 제거하지 못하면, 팰런을 없애지 못하면, 그 자리를 내 것으로 확실히 만들어놓지 못하면 머지않아 이보다 몇 배 많은 이력서들 속에서 허우적거리게 될지도 모른다. - P70

10


이 모든 게 시작되기 전,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확실히 알게 된 후로도 나는 한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론적으로 충분히 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린 후로도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충분히 생각을 해봤고, 철저히 계획을 세웠고, 꼼꼼히 준비를 마쳤지만 백 퍼센트 확신이 들지 않았다. - P72

웨이트리스가 나와 유리창 사이로 들어와 테이블을 치우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에게 말을 걸어보았다.
"저쪽에 앉았던 친구 말입니다. 혹시 레이프 팰런 아니었습니까?"
"오 맞아요"
그녀가 대답했다.
"그런 것 같았습니다. 몇 년 전에 만났었죠. 그런데 오늘 보니 잘 모르겠더군요. 뭐 아무튼, 지금 괜찮으면 여기 계산좀 해주세요."
나는 말했다. - P75

11

루링어가 자살했다! 누가 이런 일을 예상이나 했을까? - P76

뉴스를 아무리 유심히 보고 들어도 루 링어가 죽었다고 안타까워하는 이는 없는 것 같다. 모두들 결국 이렇게 종결된 것을 무척 다행이라고 여기는 것 같다. 깔끔한 수습이니까.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어졌으니까. 그는 정부의 부모인 럭스 부부를 살해한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증명 끝. -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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