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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껏 사람을 죽여본 적이 없다. 살인을 하거나 누군가의 숨통을 끊어놓은 적이 없다는 얘기다. - P7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아버지는 보병으로 참전했었다. 1944년에서 1945년 사이 프랑스를 가로질러 독일로 진입하는 마지막 진군이 있었다. 그때 아버지는 짙은회색 모직 군복 차림의 적들에게 총을 쏴봤을 것이고, 타격을 입혔을 것이며, 그 과정에서 몇 명을 사살하기도 했을 것이다. - P7

오늘이 바로 운명의 날이다. 사흘 전, 그러니까 지난 월요일에 나는 마저리에게 펜실베이니아 해리스버그의 작은 공장에 면접을 보러 가야 한다고 얘기해두었다. - P8

그럼 그냥 탄창을 꽂아 넣고 표적을 겨눈 후 방아쇠만 당기면 되는 건가 위험하진 않을까? 모르는게 많으면 겁도 많아진다. 그래서 나는 쇼핑몰의 서적 체인점으로 달려가 권총 사용 설명서를 사 왔다. (예기치 못했던 비용!) 책은 여러 부품에 기름을 쳐둘 것을 권했다.  - P10

지난달, 그러니까 화창했던 4월의 어느 날, 나는 루거를 테스트해보기위해 집에서 서쪽으로 50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으로 차를 몰았다. (중략).
권총이 든 스포츠 재킷 주머니는 묵직했다. (중략).
놀라운 경험이었다. 손안에서 루거가 튀어 올랐다. 하마터면 얼굴이 날아갈 뻔했다. 반동을 예상하지도 못했고, 책에서 반동에 대해 읽은 기억도없었다. - P11

세 발 연습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루거를 잘 닦고, 기름을 쳤다. 탄창에는 부족한 탄약 세 발을 보충해 넣었다.  - P12

요즘 각광받는 새로운 직종이 하나 있다. 소위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구직에 나선 실업자들을 모아놓고 교육을 시키는 프로그램이다.  - P14

지금껏 봐온 이력서 중 최고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흠잡을 데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럭저럭 봐줄 만하다고 할까. 이 정도 이력서라면 특수 중합체 용지 제품의 제조와 판매에 충분한 경력을 갖춘 관리자급 직원을 찾고 있는 제지회사에서 면접을 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질 것이다. - P14

마저리는 내가 바람을 피우고 있다고 오해할 것이다. 11년 전, 그녀에게 들켰던 딱 한 차례의 외도를 제외하고는 나는 성실하게 아내만을 바라보며 살아왔다. - P15

 오해를 푸는방법은 그것뿐이니까.
"개인적인 용무가 있었어. 허버트 콜먼 에벌리라는 사람을 죽이러 갔던거야. 우리 가족을 위해서." 결국에는 이렇게 털어놓게 될 것이다.
하지만 함께 나누는 비밀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게다가 마저리에게 이런 문제로 부담까지 주고 싶지는 않다.  - P13

그녀는 내 마지막 근무일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내 해직 수당이 바닥날때까지 기다릴 타입도 아니었다. 내가 일시 해고 통지서(분홍색이 아니라 노란색 종이다)를 내민 순간부터 마저리는 긴축에 들어갔다. - P16

그녀는 먼저 헬스클럽과 원예 연수 모임을 취소했다. HBO와 쇼타임 케이블 채널을 끊고, 기본 채널만을 남겨놓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코네티컷의 언덕이 많은 동네에서는 안테나 수신이 불가능해서 케이블 채널이 필요한데도 말이다. 식단은 양고기와 생선 대신 닭고기와 파스타로 꾸며졌다. 잡지 구독도 연장하지 않았다. 백화점 쇼핑도 그만뒀고, 스튜 레너드 슈퍼마켓에서 더 이상 카트를 느릿느릿 밀지 않았다. - P16

폴 시티의 북서쪽 언덕의 집들 대부분은 크고 차분한 분위기를 풍긴다. 옅은 색 외벽에 짙은 색 덧문이 붙어 있는 전형적인 뉴잉글랜드풍 집들로 나무가 우거진 광활한 대지에 자리하고 있다. (중략).
이곳 사람들 중 몇 명이나 지금 내 처지를 이해할 수 있을까? 차를 몰다보니 그런 의문이 든다. 깔끔하게 깎인 저 잔디를 떠받치고 있는 땅이 얼마나 얇고 위험천만한지 알고 있을까? 봉급날을 한 번 지나치면 불안감에잠을 이룰 수 없다. - P18

요즘 나는 우편물이 배달될 때마다 항상 집을 지키고 있다. 언제 좋은소식이 찾아들지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다. (중략).
지금쯤 그도 창밖을 내다보며 우편물을 기다리고 있겠지? 안타깝게도 오늘은 좋은 소식이 없어. 오늘은 나쁜 소식뿐이야. - P19

남자가 우편함에서 편지, 고지서, 카탈로그, 잡지 들을 꺼낸다. 우편함을 닫은 그가 천천히 다가오는 나를 발견하고 눈썹을 추켜세우며 고개를돌린다.
나는 그가 마흔아홉 살이라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내 눈에는 그보다훨씬 나이 들어 보인다. 실업자로 살아온 지난 2년간의 세월이 남긴 흔적때문일 것이다. - P21

나는 그의 앞에 차를 세우고 환히 미소를 짓는다. 나는 말한다.
"에벌리 씨?"
"네?"
나는 일을 벌이기 전에 확실히 해두고 싶다. - P21

나는 레인코트 밑에서 루거를 꺼내 열린 유리창 밖으로 불쑥 내민다.
"이거 보여?"
그가 총을 빤히 쳐다본다. 보나마나 많은 가능성을 떠올리고 있을 것이다. 이 총 살래요? 오다가 찾았는데 당신 총입니까? 마지막 순간에는 어떤 생각이 그의 뇌리를 스치게 될지 모르겠다. - P22

 오늘 밤 나는 올버니 인근의 싸구려 모텔에서 묵을 계획이다. 물론 계산은 현금으로 해야지. 내일 오후에는 펜실베이니아의 해리스버그에서 면접을 망치고 돌아온 척하며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 정도 연기야 식은 죽 먹기다. - P23

2

나는 11개월간 꾹 참고 그들의 방식을 따랐다. 마지막 5개월까지 더하면 총 16개월이다. 내가 노란색 용지를 받고 나서부터 내 업무에 발전이뚝 멎어버렸을 때까지. 카운슬링을 마치고, 이력서 작성 기술을 한창 배우던 기간이었다.  - P24

지난 1~2년간 대량 인원 삭감에 대한 소문이 돌았었다. 실제로 두 차례에 걸쳐 소수의 직원들이 해고를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사전 준비에 불과했고, 모두가 그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1995년 10월, 급료 지불 수표와 함께 노란색 용지가 도착했을 때 나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 P24

퇴직금은 후한 편이었다. 당시에는 후하고 합리적인 액수라는 생각을했었다. 해고된 직원들에게는 2년씩 묶어 한 달치 봉급이 지급됐다. 그것도 현재 임금 수준으로. (중략). 그중 2개월치의 액수는 조금 차이가 났다.  - P25

나는 그저 그들이 양심적으로 정산해주었기를 바랐을 뿐이다. 아무튼 내게 쥐어진 건 4,716달러 22센트짜리 수표였다. 22센트가 아니라 19센트였다 해도 나는 그 차이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못했을 것이다. - P25

해고된 직원들 대부분은 자신들의 처지를 그저 예기치 못했던 휴가 정도로만 생각한다. 그리고 즉시 다른 회사에 취직이 될 거라고 믿는다. 하지만 요즘은 사정이 다르다.  - P25

실직자는 매일 수천 명씩 늘어나고 일자리는 점점 줄어만 간다. - P26

또한 업계지도 여러 개 구독한다. 해고되기 전까지 고용주가 대신 구독해주었던 잡지들. 유감스럽게도 잡지 구독은 해직 패키지에 포함돼 있지않다. (중략).
그 두 잡지에는 구인·구직 광고란이 있다. 그리고 항상 구직 광고가 구인 광고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 P26

나는 광고들을 유심히 살핀 후 이력서를 보내보았다. 아무 답이 없었다. 질문만 늘어갈 뿐이었다. 내가 희망 봉급을 너무 높게 불렀나? 이력서에 세련되지 않은 부분이 있었나? 뭔가 중요한 사실을 빼놓진 않았나? - P27

가끔 관리직 사원을 뽑는다는 채용 공고가 올라온 이후 『펄프』와 『페이퍼맨』에 짧은 관련 기사가 실리곤 한다. 능글맞게 웃는 행운의 사나이의사진까지 넣어서 내가 지원했던 바로 그 자리다. 나는 그를 유심히 들여다본다. 그의 얼굴을, 그의 눈을, 그의 미소를, 그의 넥타이를 왜 그가 뽑혔지? 왜 난 안 되는 거지?
가끔 여자나 흑인의 사진이 실린 기사가 올라올 때도 있다. 채용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차별을 없애기 위해 마련된 할당제 덕분이다. - P29

이 모든 건 바로 그런 생각에서 출발했다. 대체 그들의 이력서엔 뭐가 담겨 있나? 그들이 나보다 나은 게 뭐가 있나? 그래서 나는 슬그머니 내 광고를 내렸다. - P30

3

어제 나는 허버트 콜먼 에벌리를 죽였다. 그리고 오늘 나는 펜실베이니아 해리스버그에서 면접을 보고 집으로 돌아온다. 오후 4시에 도착해보니 마저리가 거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그녀는 소설을 읽는 척하고 있다. - P31

나는 말한다.
"편지 온 건 없고?"
갑자기 에벌리 생각이 들어서다.
"없어요. 중요한 편지는 없었어요."
(중략).
나와 같은 상황에 놓인 많은 사람들은 가족, 특히 아내에게 화풀이를하곤 한다. 중산층 실직자들의 아내 폭행은 심각한 수준이다. 나 역시 험악한 충동에 휘둘릴 때가 있다. 뭔가를 부숴놓고 싶은 충동, 가까운 표적에 대고 맹렬히 화풀이를 해대고 싶은 충동.
하지만 나는 마저리를 사랑한다. 아내도 나를 사랑한다. 우리 결혼 생활에는 단 한 번의 풍랑도 없었다.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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