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그 스토커, 하나야?" 하고 이라부가 물었다.
히로미의 허를 찌르는 질문이었다. 그런 건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가는 데마다 나타난다는 건 물리적으로 어려운 일이니까 혹시 여러 사람일지도 모르겠군." - P30

"그렇지 않으면 아예 스토커가 접근할 수 없는 곳으로 가 버리든지."
"••••••••멀리 이사를 가라는 말인가요?" - P31

이라부는 느긋하게 말하고 있다.
"옛날부터 스토커 피해를 입는 사람은 늘 아이돌이었잖아. 어디 가도 있을 법한 그런 분위기를 풍겨서 인기를 얻는 게 바로 아이돌 아니겠어. 그와는 반대로 슈퍼모델이 되면, 남자들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바라볼 따름이야. 자신의 손에 넣을 생각일랑은 아예 하지도 않아."
분명 일리가 있는 말이다. 그랬어. 내가 정말 바보였어. - P31

"그럼, 히로미짱에게 이거 줄게."
이라부가 칸막이 뒤편에서 꽃다발을 꺼냈다. 멋들어진 장미다발이었다. 수만 엔은 할 것 같았다. 과연 의사다. 부자다 - P32

"신경과 의사가 그러던데 뭘. 혼자서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그래서 복수일 가능성이 많대. 그 말을 듣고 보니 그런 것같았어."
"이상해, 그 의사. 좀 생각해 보는 게 좋을걸. 그리고 히로미. 왜 그런 말을 간단히 믿어 버리니? 신경이 예민해져서 그런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안 하니?" - P33

"친구로서 한마디 해도 되겠니? 히로미, 너 자의식과잉이야."
(중략).
"사실이 그렇잖니.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다른 사람은 히로미에게 관심이 없어." - P34

이놈도 그렇고 저놈도 그렇고, 속이 부글거려 참을 수 없었다. 아츠코마저 나를 의심하다니. 이라부는 나를 너무 잘 이해해주는데.
전신주를 걷어차자 힐이 톡 부러졌다. - P35

3


그날은 결혼 알선 업체의 아르바이트였다. 히로미는 분홍 슈트에, 이라부가 사다 준 프라다 핸드백을 팔에 걸고 긴자의 호텔로 나갔다. - P35

식사를 같이 하고 두 시간에 2만 엔. 이벤트 일은 힘들고 화려한 반면 보수가 약하기 때문에 히로미에게는 맞선 아르바이트가 귀중한 수입원이다. - P35

로비에서 뚜쟁이 여자와 의논을 한다.
"야스가와 씨, 차림이 너무 화려해."
(중략).
거기에 대해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런 일류 호텔 로비에서 촌년처럼 걸어 다닐 수야 없잖아. - P36

여자의 안내로 레스토랑으로 들어간다. 앞으로 두 시간만 참으면 된다. 애교 있게 웃으면서 상대의 비위만 잘 맞춰 주면 된다.
창가 테이블에 감색 슈트에 붉은 넥타이를 맨 남자가 앉아 있었다. 세상에 저렇게 복 많아 보이는 남자도 드물 것이다. 히로미를 보고 가느다란 눈을 힘껏 떴다. - P37

"그럼, 다음에는 술집에서 만나도록 하죠."
남자는 기분 좋은 듯 볼을 늘어뜨리며 그렇게 말했다.
다음은 무슨 다음. 입회금 25만 엔을 지급하고, 매번 소개할 때마다 3만 엔을 지불하면서 넌 계속 속고 있는 거야. - P38

"히로미 씨는 지금까지 몇 사람을 만났어요?" 목소리가 너무 크다.
"아, 그러니까......" 어떡할까 생각하다가 "오늘이 처음이에요" 하고 대답했다.
"난 네 번째니다. 매번 좋은 사람을 만나지 못해서 항의를 했더니 히로미 씨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옆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것 같았다. - P38

세상이 잘못되어 가고 있다. 자신의 미모가 이런 쓰레기 같은 아르바이트에 낭비되어야 한다니. 세상이 제대로만 돌아간다면, 이 자리에 있는 너희들은 말도 못 걸 고고한 존재가 되어 있을 텐데. - P39

식사를 끝내고 정원으로 나왔다. 결혼상담소에서 따지고 들면 곤란할 것 같아, 히로미는 조신하게 행동하기로 했다. - P40

고문과 같은 두 시간이 끝나고, 히로미는 호텔을 뒤로했다. (중략).
빨간 신호를 보고 멈추어 서는데, 등 뒤에서 시선을 느꼈다. 새로운 종류다, 이건. 요기가 서린 것 같다. 아까 선을 본 그 남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 P40

"그랬어? 또 하나가 늘었구만. 히로미짱, 너무 매력적이니까 가만있어도 그렇게 되어 버리는 거지."
(중략).
자신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데에 히로미는 안도감을 느꼈다.
아츠코에게 전화로 이야기해 주자,
"나, 더 이상 널 상대하기 힘들어" 하고 냉정하게 끊어 버렸다. - P41

어떻게 옳은 말만 저렇게 가려서 할까. 히로미는 10년 묵은 체중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자신을 의심하지 않아. 자의식과잉이라고 할까."
엉? 누군가 그런 말을 했던 것 같은데…………. 아무렴 어때, 어쨌든 나는 피해자니까. - P42

"즉, 내가 다른 누군가와 데이트하는 걸 스토커에게 보여준다는 말이죠?"
(중략).
그런데 누구에게 그 중책을 맡길 것인가. 아버지가 파칭코가게를 경영하는 대학 8년생 요시짱으로 할까, 아내와 자식을 둔 부동산업자 수 씨에게 맡길까, 작가이면서 도의회 의원인 야스시에게 맡길까. 전화 한 통화면 좋다고 달려올 남자는 수도 없이 많다. 여태까지 문란하게 논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역사가 나를 돕는구나. - P43

이라부의 사치는 점점 더 심해져 갔다. 초진 때는 푸석한 머리에 샌들이 아니었던가.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눈썹도 손질을 했다. 늘 번들거리던 얼굴에서 개기름도 안 보인다.
"나, 남자 피부미용실에 다니기로 했어." - P46

프리랜서 카메라맨 하나를 희생양으로 골랐다.
(중략).
우치야마가 스토커들의 표적이 된다. 뒤에서 칼을 맞을지도 모른다. 스토커 조직, 경찰에 검거. 그러면 미행에서 해방! 히로미는 그런 시나리오를 그리고 있었다. - P47

매몰차게 거부했다. 어두운 곳에서는 스토커들이 우치야마의 얼굴을 볼 수 없다.
식사를 하고, 가로등 아래서 키스하는 장면을 보여 준 다음에 호텔로 들어가는 것이 히로미의 계획이었다.
다만 손은 못 대게 해야 한다. 생리라서, 라는 전통적인 수법을 써먹을 생각이다. - P48

(전략).
이것이 현실인가? 뇌 안쪽이 띵한 게 마비된 것 같았다. 머릿속이 간지러웠다.
"왜 그래? 속이라도 안 좋아? 갓길에 댈까?"
마침대 나는 이 세상 모든 남자들에게 망상의 대상이 되고 말았어. - P49

4


외출하기도 싫었다. 히로미는 매일 이불에 파묻혀 지냈다.
편의점에서 물건을 사고 계산을 마치고 나오면 점원이 바로 뒤를 따라와서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세탁소 주인도, 피자 배달원도, 히로미를 보자마자 그 미모에 반해 스토커로 변신해 버린다. - P50

이라부만이 이해해 주었다. 히로미의 재난에 동정하고, 억지로 외출 안 해도 되지 않느냐고 말해 주었다.
안기고 싶지 않은 건 여전하지만, 식사 정도는 같이 해도 좋겠다는 기분은 들었다. -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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