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는 나를 유심히 바라보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중략).
"너, 승윤이랑 같이 주말 강의 들을 테냐? 레벨 테스트가 있으니 반은 다르겠지만 서울까지 데려다주고 편의 봐주는 것은 가능해." - P36

나중에 듣기로는, 승윤의 어머니에게는 오랜 부채 의식이 있었다고 한다. 비슷한 상황의 해장국집 사장님에게 아들 일로 신세를 지다가, 자기 혼자 신데렐라처럼 숨 가쁜 삶을 벗어나서 미안함을 느꼈다는 것이다. - P37

결국 내가 토요일마다 대치동 학원에 가게 된 건 승윤의 어머니가 원한 일이었고, 또 우리 엄마가 원한 일이기도 했다. - P37

내가 기분 나빠 하는 건 한두 개가 아니다. 승윤의 새아버지가 동남아 사람들의 성실성을 칭찬할 때조차도 나는 언짢았다. 그래도 어른들 앞에서는 참는다. - P38

2


승윤은 어디서나 사람을 끌고 다니는 스타일이었지만 고정적으로 어울리는 애들은 대여섯뿐이었다. - P39

(전략).
이 부분을 설명하려면 게임 이야기를 해야 한다. 승윤은 호주에 있을 때부터 ‘리그 오브 레전드‘, 즉 ‘롤‘을 플레이해 왔다. (중략). 그런 경험이 뜻밖에도 ‘영어 실력도 이렇게 늘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에 불을 붙였다는 거였다. - P40

(전략). 승윤 덕에 무리에 끼어들어 왔다는 점에서는 피차 비슷한 입장이었던 것이다. (중략). 그나마 발언권이 보장되는 건 내가 딱 필요할 때만 입을 여는 까닭이었다. - P41

"노아는 그냥 정노아인데."
그렇게 말해 놓고 보니 노아의 심리가 의아스럽기도 했다. (중략). 마음만 먹는다면 충분히 가능할 텐데도 승윤은나를 빤히 보더니 혀를 쯧쯧 찼다.
"하는 것이 같아야 같은 대접을 해 주지. 노아가 요한이랑 같냐. 그래도 잘해 주려 노력하고 있긴 해." - P42

토요일마다 함께 대치동으로 올라가는 사이인데 학교에서만 승윤을 모른 체한다면 이상했다. 괜히 잘못 건드렸다가 대치동에서 강의 들을 기회를 잃고 싶지도 않았다. - P43

아쉬울 구석을 되새기며 언짢은 느낌을 삼키자니 슬슬 승윤마저 싫어지려 했다.
고마워야 할 상대한테 이런 마음을 품다니 내가 배은망덕한 놈인가?
주야장천 들었던 평가가 모두 옳다. 나는 확실히 성격이 더럽다. - P43

노아는 냉큼 받더니 휴대폰 옆에 뒀다. 휴대폰 화면에서는 가상 화폐 차트가 실시간으로 오르내리며 산등성이 같은 모양을 그리는 중이었다. - P44

노아는 차트 화면을 힐끔 보더니 미간을 살짝 좁혔다.
"지금 쇼트에 걸었으니까 조용히 해라. 나 오늘 일당 날아가게 생겼다."
가상화폐 매매는 크게 두 방향이다. 가격이 올라갈 때 돈을 버는 롱(long)과 그 반대인 쇼트(short). - P45

"오케이. 수육 소자로 간다?"
노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중략).
"아니야, 내가 보기엔 목적이 따로 있어. 김주현은 착한 짓이라는 걸 할 줄 모르는 인간이거든. 나한테 부탁할 거 있어서 그러지?"
역시 노아는 눈치가 빨랐다. - P46

(전략).
"이거 봐. 김주현 이 새끼는 역시 본성이 악해 인생 같이 사는건데 자기밖에 몰라."
"사실 그게 요점이긴 한데." - P46

"선생님 성격은 제가 잘 알죠. 가만히 계시다가 가끔씩 툭툭 하시는 말씀이 다 훈장님 회초리질이잖아요. 김주현 선생님은 21세기에 태어났는데 마인드가 조선 시대 선비시다."
"그런데 내가 틀린 말은 안 한다는 걸 너도 알지?" - P47

"별명 금지시켜 달라는 소리야?"
"그게 부탁해서 될 일이겠냐. 승윤이 형도 나름 선비 스타일이잖아. 그런데 가끔 보면 형이 제일 심한 거 같아서 이런다. (후략)." - P47

아니나 다를까 노아가 반응을 보였다.
"어어, 이유가 따로 있어. 그거 건드리면 안 돼. 내가 보기엔 아직 덜 풀렸어. 이거를 내가 내 마음대로 이야기해도 되나 싶은데." - P48

"내가 알려 줄 테니까 건드리지 마. 승윤이 형한테 직접 물어볼까봐 겁난다. 지난 일 굳이 들쑤셔서 뭐가 좋겠어?"
노아는 휴대폰을 들어 쇼트 매매를 청산하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 P49

"욕한 애 닉네임이 ‘구현동킨드레드‘였다는 거야."
여기서부터는 나도 짐작이 갔다. 고소 상대가 하필이면 같은 동네에 산다니까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궁금해졌을 테고, 같은 학년이라는 걸 알고부터는 정말로 얼굴을 보고 싶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막상 만나 보니 심정이 달라져서 고소를 철회하는 쪽으로가닥을 잡은 모양이다. - P50

인권에 얽힌 이런저런 선언들은 정말로 물리학 문제 같다. 현실에서는 볼 수 없고 오직 가정만 가능한 상황들. - P51

"그러니까 나는 그게 참 이상하다고 보는 거지. 생각해 봐라, 싫은거 싫다고 말할 수 있는 상대한테는 잘해 주고, 발언권 없고 아쉬울 거 많은 애들일수록 구박하는 거 아니냐. 그래서 결국 남이끼어들면 ‘당사자는 가만히 있는데 왜 네가 난리냐.‘ 같은 상황이 나오는 건데, 이러면 끼어든 쪽까지 약점 잡혀. 처음에 요한이 잘못한거랑 별개로." - P53

"인터넷에서 욕해 대는 건 그대로래?"
"그야 모르지만 통매음 한 번 걸렸으니 나아졌겠지. 나아져야하고, 아무튼 교과서처럼 처졸린 소리는 그만하고, 이거 하나만 묻자 김주현 너는 이 상황에서 어쩔래?" - P54

우리는 소위 ‘중립 기어‘라는 관용어가 우스운 데다가 비현실적이라는 데에 합의했다. 그건 방구석에 들어앉아 연예인 소식에 말을 얹을 때나 먹힐 태도다. 소설 독후감을 쓰듯, 재판관 자리에 앉아 타인의 행동을 품평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때. - P55

중립기어란 없다. 그저 가만히 지켜보는 것조차 일종의 선택이다. 지금은 현상 유지야말로 최선인 듯했으므로, 나는 내심 안도했다. - P56

나는 가끔 정의감과 이기주의와 독선이 헷갈렸다. 나한테는 그셋이 모두 있는 것 같은데 정확한 배분을 알 수가 없었다.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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