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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권 정비계획법 제2조에 따르면 수도권이란 서울특별시와 인천광역시, 그리고 경기도를 묶어 이르는 말이다. 이런 분류는 인간과 오랑우탄과 여우원숭이를 하나로 묶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 P7
그렇다면 구현이 어디인지 아는가? 구현동은 바로 내가 사는 곳이다. 이렇게 말해 봐야 알아들을 사람이 없다는 건 나도 안다. - P7
"이 노친네가 다 처먹어 놓고는 난리야. 지금 돈 내기 싫어서 그러지?" (중략). "말 다 했다. 이 진상아. 그쪽은 이만원 아끼려고 난리 치는 인생이지만 우리가 그 돈 못 받아서 망할 일은 없으니까 알아 두고다른 손님들 밥맛 떨어지게 하지 말고 썩 나가요." 중년이 앉은 테이블에는 소주 두 병에 국밥 한 뚝배기가 올라있다. 핀잔 한 번 듣는 것으로 이만 원을 아낄 수 있다면 취객 입장에서는 남는 장사다. - P10
"야, 지금 우리 엄마랑 고모한테 뭐라 했어?" 대답을 듣기도 전에 주방 아주머니가 날 큰 소리로 부른다. (중략). 별수없이 돌아서자마자 투덜거리는 소리가 귓전을 친다. 동남아 년애새끼가 키만 커 가지고....……. - P11
"엄마가 가게에 몽클레르 입고 오지는 않잖아. 이런 국밥집이잘되려면 사장이랑 직원들이 얕보여 줘야 되거든. 그래야 손님이 많이 오지. 손님들은 사장이 돈 많이 버는 티 내면 싫어해." 내가 더 따지지 않는 건, 엄마가 고생을 많이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 P13
대치동에 갈 때마다 자동차로 한 시간 반 거리밖에 되지 않는동네가 이렇게까지 다를 수 있나 싶어 놀란다. - P14
승윤 형과 구면인 듯한 남자애 하나도 나를 거의 장식품 취급했다. (중략). 완벽한 미국식 발음이었다. 승윤 형은 잠깐 짜증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영어로 마주 대꾸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일까? 남자애가 사라지자마자 나는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아까 개, 외국인인가. 대충 들어서 틀렸을 수도 있는데 이름이 무슨………… 앤디? 앤디라고 불렀던 거 맞지?" "아니, 쟤 이름 석현이야. 윤석현, 초등학생 때 미국 살다 와서 그렇지, 그냥 한국인이야. 평소에는 한국말 해." - P15
하지만 대치동에서 강의를 듣는 그 한나절 동안, 나는 구현이 시골은 아니라도 지방이긴 한가 보다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 P16
물론 구현동에도 신축 아파트가 있긴 하다. 하지만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애는 없다 - 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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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윤은 한때 박승윤이었고 그 전에는 강승윤이었다. - P18
그래도 나는 아동 센터가 좋았다. 초등학교 교실과는 달리, 센터에서는 내가 유별나다는 생각을 내려놓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략). 마찬가지로 한 살 터울은 아무 문제가 아니었다. 일곱 시가 되어 센터가 문을 닫으면 나는 승윤과 함께 엄마 가게에 딸린 쪽방에서 놀았다. - P19
2학년 때까지는 이런 구도가 그런대로 유지됐다. 3학년이 되고부터는 승윤이 슬슬 언짢은 기색을 내비치기 시작했다. ‘내가 가만히 있으니까 진짜 너랑 똑같은 거 같아?" 하는 질문을 들은 적도 있다. - P20
"확인하고 올 테니까 잠깐 앉아서 기다리고 있어." 나는 승윤을 그 자리에 앉혀 두고 자동차가 떠나간 방향으로달려갔지만,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더 달린다고 해서 붙잡을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 P21
"우리 엄마 재혼할 거 같아. 재혼하면 나 전학 갈 수도 있어. 아저씨가 나한테 호주 다녀오라고 했거든." (중략). "너 영어 하나도 못하잖아." "그러니까 가래." 두 달이 지나 승윤은 아동 센터에서 사라졌고, 다시 두 달이 지나서는 내 삶에서도 사라졌다. - P22
나는 그냥 싸움박질 몇 번으로 상호 불가침조약을 얻어 낸 데에 만족했고, 혼자 다녔다. 승윤과의 일들을 뒤늦게나마 곱씹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정말로 호주에 있을까? 대뜸 호주에 간다고 영어를 배울 수 있을까? - P23
(전략), 그래서 다시만나게 되었을 때는 무척이나 놀랐다. 고등학교 1학년 2학기 중간고사가 끝난 직후, 국어 논술형 문제에서 석연찮은 이유로 감점당한 걸 확인하고 교무실에 들른 차였다. - P23
"형, 그때 호주 간 거 아니었어? 다시 왔나? 그러면 지금 2학년이지?" "아니, 1학년, 학기제가 달라서 일 년 꿇었어. 그 동네는 가을에 1학기 시작하거든. 8학년까지 다녔다가 작년에 한국 와서 중학교 3학년 됐던 거야. 중학교 졸업도 한국에서 했고." - P24
별수 없이 중간중간 한 모금씩 마시다 보니 대화가 끝날 무렵에는 캔이 바닥을 드러냈다. 긴 이야기였다. "내가 어릴 때는 찐따였잖아."로 시작한 뒤, "내가 호주가 아니라 미국 갔으면 총기 난사 했을 거야."를 지나, "그래도 지나 보니까 좋은 경험 같더라."로 끝나는이야기. - P26
"외국인들이 괴롭히고 그래?" (중략). 승윤이 갑자기 유창한 발음으로 영어를 쏟아 냈다. (중략). 멍한 기분으로 눈을 깜박이자 승윤이 와하하웃어 젖혔다. 왜인지 패배한 기분이었다. - P27
한편 이정엽 씨는 잘나가는 고물상 사장이기도 했다. (중략). 버려지는 기계 부품들을 수거해 부순 뒤 금이나 구리 따위를 긁어내어 되파는 게 이정엽 사장님의 일이었다. 물론 사장님이 직접 부수진 않았다. 사장님의 업무는 주로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면서계약을 따내는 거니까. - P28
"그러면 나중에 형이 회사 물려받는 건가?" "그럴 리가 위로 형이 한 명 있어. 서른 살인데 지금 벌써 부장달고 있다. 나는 그냥 열심히 공부해서 의대 가라던데." 나는 남은 대화에서는 완전히 끌려다녔다. - P29
"이왕 호주 갔으면 쭉 거기 있지, 왜 한국에 왔니? 적응을 잘못했나?" "아니, 유학은 영어 배우려고 간 거고 대학은 한국에서 다닐 거라서 미리 왔다던데. 의대 노리고 있대." "잘됐네. 승윤이한테 언제 한번 가게 놀러 오라 그래. 얼마나 컸는지 보자." 엄마는 딱 그렇게만 말했다. - P30
물론 의사가 식당 점원보다 좋은 대우를 받으리라는 것 자체는나도 인정했다. 엄마의 태도에 반감을 느끼면서도 의대에는 가고싶었다. 누가 특별 전형으로 의대에 입학시켜 준다면 로또라도 맞은 기분일 것이다. 그런 전형이 없는 게 문제일 뿐이다. - P32
긴 고민의 결론은, 내가 추하다는 거였다. 자연스러운 심리인 것과는 별개로 추했다. 그 사실을 외면하려면 승윤과의 재회를 반겨야만 했고, 그러다 보니 오랜만에 친구가 생겼다. - P33
"아. 우리 아버지가 성적 어떻냐고 물어보실 수도 있거든. 최대한 자세하게 대답해." (중략). 회사 사장씩이나 되는 사람이 고등학생 성적을 물어보는 데에는 궁금증 이상의 이유가 있을 터였다. -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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