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말씀이세요! 사사키 선배는 엄연한 동아리원이니까언제 와도 괜찮아요." "그런가.....?" "물론이죠." - P49
강의 시간 내내 사사키는 구리하라에게 받은 A4용지 다발을 들여다보았다. 교수가 장황하게 잡담을 늘어놓는 걸로 유명한 강의라서 사사키뿐만이 아니라 여러 학생이 다른 공부를 하거나 말뚝잠을 자는 등 자유 시간으로 활용했다. - P50
눈속임 그림.....
그 말을 듣자 사사키의 머릿속에서 불꽃이 번쩍 튀었다. 혹시 유키가 그린 ‘미래 예상도‘는 눈속임 그림 아닐까. - P50
아내가 죽고 몇 년 후, 렌은 유키가 그린 그림을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 아닐까. - P51
③ ‘어른(여자)‘ 그림을 오른쪽으로 90도 돌리면,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카락이 중력에 따라 아래로 늘어진 것처럼 보인다. (중략). 서 있는 여자가 누웠다고 해서 뭐가 어쨌다는 말인가. - P51
어쩌면 그림에 매겨진 번호는 그림을 겹치는 순서 아닐까 - P52
그때 갑자기 구리하라의 말이 머릿속에 되살아났다.
"그 번호가 축이에요." "그 번호가 축이라는 걸 기억해두세요."
번호가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다……………. 그 정도는 말하지 않아도 안다. 구리하라는 왜 뻔한 사실을 강조하듯 두 번이나말했을까. - P53
사사키는 ① ② ③ 이 같은 위치에 오도록 그림을 겹치고, 번호를 축으로 그림 세 장을 조금씩 회전시켜보았다. 어딘가에서 그림 세 장이 딱 겹치기를 기대하면서. 하지만 결과는 또 실패로 끝났다. - P54
안 그래도 규모가 작은 데다, 사사키가 속한 기수가 취업활동에 나서서 동아리가 아주 썰렁해졌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자 구리하라가 약간 딱해 보였다. - P55
"그림 다섯 장은 원래 도화지에 그려졌어요. 그걸 렌이 사진으로 찍어서 블로그에 올렸고요. 여기서 중요한 점은, 사진만 봐서는 그림의 원래 크기를 모른다는 거예요. - P56
"네. 사사키 선배 말대로 번호가 같은 위치에 오도록 그림을 겹치면, 그림은 완성돼요. (중략). 우리 추리가 옳다면………… 즉, 번호가 그림을 연결하는 축이라면, 원래는 동그라미가 전부 같은 크기였다고 봐야 자연스럽겠죠." - P58
"모르시겠어요? 그림 다섯 장에는 ①에서 ⑤까지 번호가 매겨져 있어요. 겹치는 순서를 나타내는 번호겠죠. 즉, 순서가 다르면 눈속임 그림이 완성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 P59
"(전략). ①이 매겨진 아기 그림은 제일 아래에 두는 배경. 그 위에② 할머니 그림을 겹치고, 마지막으로 ③ 어른(여자)을 놓는거죠. 시험 삼아 이 세 장으로 해볼게요." - P61
완성된 ‘눈속임 그림‘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그림 세 장의 비밀‘, 유키가 남긴 그림의 수수께끼. 그것....... "믿기지 않네…………. 이럴 수가......" - P62
할머니는 기도하는 게 아니다. 역아 상태인 아기의 다리를붙잡고 아기를 엄마 배 속에서 끌어내는 중이다. 할머니가 입은 흰옷도 기도복이 아니라, 의료 종사자가 입는 유니폼이다. - P62
이건 시체를 표현한 게 아닐까.
"설마, 이 그림은......." "네."
!아기는 간신히 구했지만, 유키는 수술 도중 사망했습니다. - P64
하지만 그게 아니다. 이 그림은 유키가 죽기 전에 그려졌다. 유키는 출산을 앞두고 자기가 죽는 그림을 몰래 그려둔 셈이다. - P64
"어처구니없는 가설 같아요? 역아 상태인데도 무리하게 자연 분만을 권한 건 병원 측이에요."
(중략).
"그 말에 따른 결과, 유키는 난산으로 고생하다 목숨을 잃었죠. 유키의 죽음은 병원 측에서 설계한 계획 살인이었다…고도 할 수 있어요." - P65
"렌이 블로그에 쓴 글이 사실이라면, 유키는 예전에 무슨죄를 저지른 거예요. 내용으로 추측건대 결코 가벼운 죄는 아니겠죠." 고?" "그럼 병원 측에서 유키를 죽이려 한 건・・・・・・ 복수하려?" - P66
동아리방을 나선 두 사람은 학교 근처에서 저녁을 먹고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헤어질 때 구리하라가 말했다.
"사사키 선배. 취업 준비하느라 바쁠 텐데 오늘 시간을 많이 빼앗아서 죄송해요." - P67
"눈속임 그림・・・・・・ 그러고 보니....." 사사키는 중요한 사실이 생각났다. 아까 구리하라는 그림 세 장의 비밀을 해명했다. 하지만 그림은 전부 다섯 장. 따라서 두 장이 남았다. - P69
손을 잡고 걷는 아버지와 아이의 그림. ‘이것은 두 번째 미래 예상도…………….? (중략).
사사키는 당장 구리하라를 만나 그의 해석을 듣고 싶었다. (중략). 하지만 아무리 달려도 구리하라와 만나지는 못했다. - P70
제2장
집을 뒤덮은 안개 그림
곤노 유타
곤노유타의 아버지인 다케시는 3년 전 겨울에 죽었다. 당시 세 살이었던 유타는 그게 무슨 뜻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 P73
3년 전 여름…………… 아버지가 죽기 몇 달 전이었다. 그날 유타는 아버지를 따라 성묘하러 갔다. 집에서 걸어서 10분쯤 거리에 있는 공동묘지였다. 땡볕이 내리쬐는 푸른 하늘 아래, 밀짚모자를 쓴 유타에게 아버지가 다정한 목소리로 뭐라고 말했다. - P73
곤노 나오미
곤노 나오미는 어두운 기분으로 저녁을 준비했다. 대파 껍질을 벗기고 식칼로 채 썬다. 그러는 동안에도 옆방에 신경을 집중한다. 거실은 조용하다. - P74
‘어린아이의 호기심은 무한대입니다. 낙서는 소중한 자기표현 방법 가운데 하나고요. 야단치면 안 돼요‘라고 예전에 읽은 육아서에 적혀 있었다. 저자는 자기 소유의 단독주택에 산다는 모양이다. "월셋집에 살아도 그딴 소리를 할 수 있겠어?" ...………나오미는 속으로 분통을 터뜨렸다. - P75
‘나도 어렸을 적에 부모님한테 야단맞으면 저런 표정을 지었으려나.‘ 나오미는 평소보다 상냥한 목소리로 "엄마, 화 다 풀렸어. 자, 같이 밥 먹자" 하고 웃으며 말했다. - P76
밥을 먹고, 유타를 씻기고, 유타를 재우고, 설거지하고, 빨래를 갠 후에야 나오미는 겨우 한숨 돌렸다 싶었는데 어느덧11시였다. (중략). 이제는 젊지 않다. 앞으로도 혼자서 저 아이를 키울 수 있을까. - P76
진학, 수험, 취직……. 인생의 분기점이 차례차례 다가올때마다 만족스럽게 돈을 내어줄 수 있을까. 유타를 지켜줄 수있을까. - P77
덧붙여 두려운 건 미래만이 아니다. 요즘 나오미에게는 커다란 걱정거리가 있다.
‘스토커가 있다.‘ ………… 이틀 전 밤에 처음으로 그런 느낌이들었다. - P77
"다케시가 있었다면……………." 나오미는 방구석에 있는 작은 불단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헛된 공상이지만 매일 밤 그런 생각을 한다. - P78
"이봐요 나, 이 슈퍼 단골이에요. 그런데 이렇게 불친절하게 대응하면 또 오고 싶겠어요?" 물건을 담아주는 순서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나이든 여자손님은 5분 가까이 나오미를 들볶았다. "당신, 고객 서비스를 처음부터 다시 공부해야겠네. 이름표 보여줘요. ‘곤노‘ 씨라. 나중에 슈퍼에 정식으로 불만을 제기하겠어요. 기분 다 잡혔네!" - P79
"요네자와 씨, 고생 많으시네요. "곤노 씨도 고생 많으십니다! 둘 다 매일 바쁘네요, 바빠." "네, 정말로요." "맞다 다음 달에 저희 집 마당에서 고기를 구워 먹을 건데, 괜찮으시면 유타랑 놀러 오세요! ‘요네자와 소‘를 다 못 먹을 만큼 준비할게요!" - P80
요네자와의 아내는 현재 말기 암으로 입원 중이라고 들었다. 이번 달 말에는 퇴원해서 재택 돌봄을 받기로 했다고 한다. 집마다 다양한 사정이 있는 법이다. 다들 괴로워도 밝게 살고 있어, 나도 힘내야지나요미는 조금이나마 좋은 기운을 받은 기분이었다. - P81
보육사 하루오카가 퍼즐과 눈싸움을 하는 유타에게 말했 다. "저기, 유타 군. 선생님이 엄마랑 할 이야기가 있는데, 잠깐만 혼자 기다릴 수 있을까?" - P82
"유타 군 말인데요. 요즘 집에서 달라진 점은 없나요?" - P82
"오늘 오후 수업 시간에 그림 그리기를 했거든요. 곧 어머니 날이잖아요. 그래서 선물로 드릴 ‘엄마 그림‘을 그려보라고 했어요. 그런데…………. 어, 이게 유타 군이 그린 그림인데요. 건네받은 도화지를 보고 나오미는 흠칫 놀랐다. - P83
(전략), 기묘한 건맨선 윗부분이다. 제일 위층의 한가운데 집을 회색 크레파스로 떡칠해놓았다. 거기는 나오미와 유타가 사는 집이다. - P84
"다만………… 이건 제가 부족한 탓인데요. 아이들이 각자 어떤 순서로 그림을 그리는지까지는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서………. 유타 군의 그림이 이상하다는 건 그림이 완성되고 나서야 알아차렸어요. 그래서 유타 군이 어떤 경위로 여기에 회색을 칠했는지는 모르겠네요. 죄송합니다." - P85
"실은 아까 유타 군한테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말하기 싫다고 하더군요." "말하기 싫다고요......?" - P86
"유타 군도 왜 야단맞았는지 제대로 이해했고요?" (중략). "그럼 그게 원인은 아닐 거예요. 여기……………." (중략). "엄마 얼굴을 아주 예쁘게 그렸잖아요. 야단맞은 걸 마음에 담아두었다면 이렇게는 안 그리겠죠." - P87
"이 글씨, 유타가 쓴 건가요?" "그런데요." "어느 틈에 한자를……………." "실은 지난주에 다 함께 자기 이름을 한자로 쓰는 연습을했거든요. 내년에는 초등학교에 입학하니까 슬슬 한자 공부에 대비하자는 이야기가 나와서요." - P88
어린이집을 나서자 하늘은 저녁놀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배고파" 유타가 중얼거렸다. 나오미도 허기가 졌다. 하지만 오늘은 집안일을 할 기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 P89
"엄마, 뒤에서 차가 와." "알아. 돌아보면 안 돼." "왜?" "안 된다면 안 돼." 지면에 스치는 타이어 소리가 바로 뒤에서 들렸다. - P90
조심조심 입구를 돌아보았다.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유리문 바깥이 희미하게 밝다. 자동차 전조등 불빛이다. (중략). 엘리베이터는 이제 4층을 지났다. 관리인실로 도망칠까 싶기도 했지만, 비상주 관리인이라 이 시간에는 아무도 없다는게 생각났다. 도망칠 곳은 없다. - P91
반쯤 닫힌 문 틈새로 나오미는 똑똑히 보았다. 유리문 밖에서 있는 사람을. 회색 코트를 입었다. 후드를 덮어써서 얼굴을 감췄지만, 체격으로 보건대 남자가 분명했다. - P92
복도를 걸으며 유타에게 말을 걸었다. "유타, 갑자기 막 뛰어서 미안해. 땀 났지? 집에 가면 바로씻자." "그 전에 유튜브 보고 싶어." "응? 씻고 나서 보면…………." 그렇게 말하는데 갑자기 뒤쪽에서 찜찜한 기척이 느껴졌다. - P92
그때 나오미는 퍼뜩 깨달았다. 아까 유타가 했던 말……………… "에이, 6층까지 걸어가려면 힘든데." - P93
냉정함이 차츰 돌아오자 가슴속에서 위화감이 부풀어 올랐다. 남자는 무엇 때문에 숨어서 기다린 걸까…………? 나오미와 유타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 집에 들어가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으니 그사이에 덮칠 수도 있었을 것이다. - P95
남자는 두 사람이 어느 집으로 들어가는지 확인한 것이다. "집을⋯⋯⋯ 들켰어...………." -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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