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 그런 18년 치의 기록이 이불장에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양지가 여든둘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후 그것들은 유일한 혈육인 홍미의 몫이되었다. - P7
홍미의 부모는 일찌감치 이혼을 했고 홍미는 이쪽저쪽을 오가며 지내다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기숙사가 있는공장에 취직을 해 혼자 살았다. - P8
아버지의 장례식에 갔었다면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는 양지와 만날 수도 있었을까. - P8
양지의 죽음을 알리는 전화를 받을 때곁에 경식이 없었다면 그 일들은 이미 모두 스쳐 지나간 일이 되어버렸을 것이다. "할머니가 있었어?" - P9
"일주일 만에 발견이 되었다고?" 전화기 너머 상대의 목소리가 컸던것인지 경식은 세세한 내용까지 들어 알고있었다. - P10
"부모님도 일찍 돌아가셨다지 않았나? 홍미 씨도 참 힘들었겠어." (중략). 가끔 야근수당도 없이 사무실을 지켜야 할때가 있긴 했지만 주 5일이라는 고정적인 근무시간이 좋았다. - P11
"아무튼 오늘은 일찍 들어가." 홍미는 오랫동안 혼자 죽어 있었다는 양지를 떠올렸다. 경식의 입에서 ‘집안‘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것을 듣지 않았다면 홍미는 양지를 마냥 멀게만 느꼈을 것이다. - P12
경식이 점심을 먹고 돌아와서도 사무실을 지키고 있는 홍미의 팔뚝을 툭툭 치면서 "퇴근하라니까" 하고 말한 다음에야 홍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 P12
양지의 장례는 무빈소 장례로 진행했다. - P13
처음엔 그 안에 써 있는 것들을 볼 엄두가나지 않았다. 하지만 무슨 각오를 했기에 수년 동안 매일 일기를 썼는지가 궁금해져 펼쳐보았다. - P13
양지와 자신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 P14
평일에는 일을 다녀와 피곤해서 그랬고 주말에는 평일의피로가 다 안 풀렸다. - P15
홍미는 더 읽지 못하고 일기장을 덮었다. 그 외로움이 옮을 것 같았다. - P16
홍미는 5층짜리단독 빌라의 반지하에서 살았는데 옥상은 누구나 드나들 수 있도록 문이 열려 있었다. 누군가는 작은 화분을 가져다놓고 상추 같은것을 키우기도 했다. - P17
차라리 태워버릴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은옥상에 앉아 담배꽁초를 짓이기면서였다. 태우면 아무 글자도 남지 않을 테니까 그 일기를 없앨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 P18
그리고 막 종이 한 장에 불을붙였다. "뭐? 그거 불법인 건 알지?" "왜 불법인데?" "왜겠어." "왜?" - P19
민석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군대를 다녀왔고 지금은 택배일을 하고 있었다. "야, 쓸데없는 짓 그만하고 나와. 삼겹살이나 먹으러 가자." "됐어, 귀찮아." "야, 삼겹살 먹는 것도 귀찮으면 뭐 하러사냐." - P20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보니 민석의 말대로개인이 무언가를 태우는 것은 불법이라는 글이 있었다. ‘불법‘이라는 단어 하나에 홍미는 금세 마음을 접고 일기를 그대로 들고서집으로 내려왔다. - P21
홍미는 월요일 오전 9시가 되자마자 그일기들을 보내준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상대는 홍미가 이름을 말하자 누군지를 금방 기억해냈다. "무슨 일이세요?" "혹시 이 일기를 누가 봤나요?" "네?" - P22
"아, 누가 볼까 봐..…………." "보면 안 되는 내용이라도 있나요?" "아, 이게 아무래도 일기라서………… 개인적인거고…………. 아무래도 누가 보는 건 남사스러운일이니까요." - P23
어떤 날의 일기는 아주 짧았다.
달의 빛은 달의 것이 아니라고 한다. - P24
"어, 홍미 씨. 일찍 출근했네." 경식은 주말에 일본을 다녀왔다며 홍미에게 선물을 건넸다. 시장조사라는 명목으로, 아이디어 상품을 수입하거나 혹은 카피할 작정으로, 무엇보다도 그저 관광 삼아 일본엘 다녀오곤 했다. - P25
경식은 고개를 끄덕이고 일본에서 가져왔다는 판촉물 홍보 책자를 홍미에게 건넸다. - P25
홍미는 책자를 한 장씩 넘기면서 다음 달에는 일본어 학원에 등록하자고 마음먹었다. 그런 게 어려울 때도 있었다. - P26
언제 나왔는지 경식이 홍미 뒤에 서서 홍미의 어깨를 짚으며 물었다. "아, 그거 달? 그거 실물로 보니까 더 예쁘더라. 담에 하나 사다줄게." - P27
그런 게 전부 호의라고 생각한 때도있었다. 선의라고. - P27
모나카를 얻어먹은 날 저녁에 펼친 일기에서 모나카라는 단어를 발견한것은 아무래도 우연이었다. 하지만 우연을단순한 우연으로만 치부하기에는 홍미는 자주 쓸쓸했다. - P31
양지가 살던 곳에 한번 가보기로 작정한것은 경식이 준 모나카 한 봉지를 다 먹은 목요일 오후였다. 주소는 알고 있었다. - P32
"왜 이렇게 오버해?" 민석은 홍미가 여기까지 찾아온 것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투로 말했다. 산비탈에 있는 작은 주택을 찾아 올라가느라 지쳐서 홍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 P33
"고등학교 졸업할 즈음에, 너 그 유부남 따라서 서울 간다고 난리쳤었지." "유부남 아니었어." "애가 있었잖아." "이혼했다니까." - P34
홍미는 그때의 일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 남자는 홍미가 알바를 하던 피시방에 자주 오던 손님이었다. - P34
서울에 같이 가자는 말에 왜 냉큼 그러겠다고했는지는 까먹어버렸다. 별일도 아니었다. - P35
"여기 내 땅이다?" "진짜?" "어. 여기 집 짓고 살까." "그래도 되겠는데?" "너도 같이 살래?" - P36
남자에게는 아기가 있었지만 서울에집도 있었다. 아기는 남자의 부모가 돌보고있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했다. 홍미는 남자가 정확히 몇 살인지는 몰랐다. - P37
서울에 가려는 홍미를 말리는사람은 민석밖에 없었다. "정말 여기서 살 계획이야?" "아니, 내 땅도 아니야." - P37
홍미는 민석이 말끝마다 붙이는 옛날부터그랬다는 말에 약간 짜증이 났다. 자신에 대해서 뭘 얼마나 잘 알아서 그런 말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는지 따지고 싶었다. - P38
남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홍미가 임신을 했다고 말하자 사라져버렸다. 그건 싱거운 농담일 뿐이었는데. 물론 모든 건 홍미 책임이었다. - P39
바닷가의 비탈에 위치한 집이라 바다가 내려다보였다. 경치는 나쁘지 않았지만 양지는 일기에서 이런 풍경들을언급한 적은 없었다. - P39
"이거 무슨 나무지?" 민석이 마당 한편에 자리한 나무 하나를발끝으로 툭툭 차며 물었다. 나뭇잎은 진작 다떨어지고 메마른 가지만 남았다. - P40
"엄청 맛있었을 것 같아." 지금과는 다른 어떤 경우의수를 따라가면 홍미는 그 감을 맛볼 수도 있었다. - P41
"근데 왜 하나밖에 없지. 누가 다 따 갔나." "가자." "방 안은 안 보고?" "뭐 있겠어?" 뭘 보러 왔는지는 홍미도 몰랐다. 그래도 한번 찾아와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들었었다. - P42
산비탈을 터덜터덜 내려갈 때 "저기요!" 하고누가 두 사람을 불러 세웠다. 홍미는 뒤를 돌아보고 싶지 않았다. - P43
홍미와 민석은 여자를 따라 그녀의 집으로 들어갔다. 양지 할머니 손자들 아니냐는 물음에 그렇다고 하니 잠깐 들어와 차나 마시고 가라고 했다. - P44
"뭐 어때. 할머니 친구였나 보지." 어쩌면 공씨를 아는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홍미는 생각했다. - P-1
"대추차밖에 없는데 좋아할지 모르겠네." "다 잘 먹습니다." 민석이 찻상을 받으며 씩씩하게 말했다. 세 사람은 찻상에 마주 앉아 잠깐 아무말 없이 차를 마셨다. - P45
"공씨, 그게 누구죠?" 여자는 양지와는 전혀 친하지 않았다고했다. 여자는 이곳에서 오래 산 사람이 아니었다. 시내의 아파트에서 살다가 공기 좋고 경치 좋은 곳에 살고 싶어 이 집을 얻었다고 했다. - P46
여자가 사는집은 양지의 집과는 달리 내부를 깨끗하게 단장해서 지내기에는 불편함이 없어 보였다. - P47
"자원봉사자는 남자였나요?" "여자였어요. 40대 중반쯤 됐을라나. 처음엔 딸인가 했는데 동네 사람들 말로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죽었다고 하더라고. 하나 있던 손녀도 그 뒤로는 본 적이 없다고." - P48
"아, 몰랐어요? 현관문에 목을 맨 걸 복지사가 보름 만에 발견했어요." "목을 맸다고요?" "그것도 몰랐어요?" -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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