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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어 번을 더 두드리고 나서야 문이 열렸다. 오한과 기특, 영수와 0수는 문 앞에 선 사람을 살폈다. 얼굴에 피멍부터 눈에 띄었다. 노인이었다. 이십 대가 아니었다. 그러니 김다울도 아니었다. 그 사람은 영수가 맞닥뜨렸던바로 그 누군가였다. - P146
노인은 그들이 이주민이 아니라 방문객임을 단번에 알았다. 이주민이라면 이렇게 늦은, 혹은 이렇게 이른 시각에 올 리는없었다. 이주민이라면 저 먼 곳에 저렇게 오랫동안 차를 세워둘리도 없었다. - P147
하지만 노인은 그들에게 어쩐 일이냐는 아주 형식적인 질문을 던진 후로는 귀를 닫았다. - P148
노인의 등대를 나오자마자 영수가 말을 던졌다. "괴담이 다 괴담은 아니었어." "나 진짜 귀에서 피났음." - P149
하지만 그런 감정이 가장 낯선 사람은 세상에 나온 지 얼마 안된, 인간 영수를 걱정하고 있는 복제인간 0수였다. ‘진짜 안 말려도 되려나?‘ 0수는 혼자 앞으로 걸으며, 걱정 가득한 시선으로 자꾸 둘을 돌아봤다. -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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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0수와 오한, 영수와 기특은 가까운 등대부터 하나씩 문을 두드렸다. 대부분 노인들이었지만 모두가 그 노인 같진 않았다. 멀리서 온 방문객을 흔쾌히 반겨주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아예문을 열어주지 않는 사람들도 많았다. - P153
영수가 먼저 입을 열어야 했다. 영수는 사실 E구역으로 오고싶어서 휴가까지 내서 살펴보러 왔다고, (중략). 하지만 이십 대가 집 안으로 사라질 즈음, 영수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던 기특이 큰 목소리로 불렀다. "김다울!!" 그러자, 이십 대는 걸음을 멈췄다. 돌아봤다. 그 깊은 눈 속에 놀라움이 쿵, 잠깐이지만 분명히 그 이름에 반응했다. (중략). "오예, 김다울이 맞긴 하고!" 기특이 중얼거렸다. - P154
"나는 내 기억 판지도 몰랐어. 그러니까 궁금할 수는, 더욱 없었지." 0수가 발을 뺐고. "나는 가자니까 따라왔는데." 영수가 우물거렸을 때, - P156
. 누가 먼저 씻을까 셋이 한참 떠들고 있을 때, 오한이 방문을 열고 나왔다. 앞뒤 없이 말했다. "내가 영화감독이 꿈이었다고 말했던가?" 물론 말하지 않았다. 지금껏 오한은 모두의 무관심을 한 몸에받던 캐릭터였으니까. - P156
영수와 0수는 쌍둥이인 걸 적극 활용해서 이곳저곳에서 나타나는 귀신을 선보였다. 어차피 밤인데 얼굴까지 제대로 보일까 싶었지만, 오한은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디테일, 디테일 했다. - P159
늦은 밤, 목 돌아간 상반신 귀신이 해변에 있다. 바다 쪽을 향한 두 눈에선 녹색 피가 흐르고 있는데 보이지 않아 아쉽다. - P160
언뜻 봤을 때, 김다울의 얼굴은 겁에 질려 있는 것 같았다. 몇날 며칠을 귀신들 때문에 떨다가 결국엔 문을 연 것 같았다. - P161
넷은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수화 관련 동영상들을 뒤졌다. 한동안 맞춰본 후에야 김다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김다울의 첫말은 질문이었다.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아요?‘ 김다울의 다음 말은 일종의 초대였다. - P161
영수와 0수, 기특과 오한은 낮과 밤의 시간을 모두 들여 유튜브로 수화 강의를 봤다. 서로가 서로에게 해보이며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다. 외국어를 빨리 익히느라 모국어를 잠시 내려놓듯 수화를 익히느라 말수가 줄었다. 입을 닫아 고요해졌다. - P162
‘제 이름은 어떻게?‘ 김다울이 물었다. 기억 매매와 관련해서 브로커가 당신의 이름을 알려줬다고 답할 수는 없었다. 기특은 준비해온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좀 황당한 대답이 될지도 몰랐지만 이미 넷을 집 안까지 들인 김다울이니, 대충 둘러대도 크게 문제없을 것 같기도 했다. - P163
0수는 최근에 자신이 자살을 시도했음을 덤덤하게 밝히더니, (중략). 그랬더니, 영수는 사실 자신은 자살에 로망이 있다며 각종 자살 방법에 대해서, 세상에서 사라지는 수많은 경우의 수에 대해서 나긋나긋 조목조목 진지하게 떠들고 앉았다. - P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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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다울은 십 대에 폐가 좋지 않았다. - P167
다음 날, 오전 치료 일정을 마치고 김다울은 그 병실을 찾았다. 비가 오고 있었다. 창은 닫혀 있었고 그 사람은 그 창을 보고있었다. - P169
흐린 날에는 숲을 걸어 길을 냈다. 흐린 날에는 세탁기 앞에 앉아 돌아가는 옷가지들을 봤다. 흐린 날에는 직원들의 설거지를 돕기도 했다. 흐린 날에 담배를 배웠다. 뒤뜰에 머물 이유를 만들었다. 창을 올려다볼 공간을 확보했다. - P170
김다울은 혼자 있는 시간이 자꾸만 쓸모없게 느껴졌다. 김다울은 이곳에 오래 있고 싶어졌다. 김다울은 오래 아팠으면 싶었다. ‘불치병이면 좋으련만.‘ - P171
김다울은 떠났다는 말이 완치해서 퇴원했다는 말인지 죽었다는 말인지 물어볼 수 없었다. 어떤 식으로든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 살아 있다고 해도, 김다울에게는 죽은 것이었다. - P172
퇴원할 무렵 E구역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김다울은 거기가좋겠다고 생각했다. 마주할 게 바다뿐인 E구역이라면, 온전히그 사람과의 세상에서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무리를 해서 이 지역으로 이주했다. - P173
‘그날이 마지막인 줄 몰랐지만 그 사람이 떠나기 전날에도 함께 그 가수의 노래를 들었어요. 저는 들어본 적 없는 오래된 가수였는데.......‘ 가수, 그 가수, 누구였는지도 기억해요?‘ 기특이 서두르는 티를 냈다. 김다울은 생각에 잠겨 답했다. ‘이름이…………… 아! 우소하라는 가수였어요.‘ 영수와 수, 기특과 오한도 한동안 말이 없었다. - P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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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다울의 집을 나와 그들은 해변으로 왔다. 하나둘 자리를 잡고 앉는데, 0수는 좀 더 걸었다. - P175
영수는 기억나지 않았다. 십 대에 병을 앓았던 기억조차 없었다. 당연했다. ‘팔았으니까.‘ 영수는 자신에게 이런 기억이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 P175
영수가 죽는 일로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기특은 연애가 가장 큰 소일 같았다. 영수는 언젠가는, 적절한 타이밍을 봐서, 용기를 내서, 나는 연애에 관심이 없고 나의 관심은 오직 내 인생 근무 대신해야 할 수를 살리고 편히 죽는 일뿐이라고, 기특에게 말해줘야겠다 싶었다. - P178
오한이 영수를 툭툭 친다. 그러곤 0수가 우는 게 신기한 구경이라도 되는 듯 한동안 보기만 한다. 영수가 오한에게서 시선을 거둘 즈음, 오한이 영수를 다시 붙든다. "인생이 왜 지루한지 알아요?" - P179
(전략). "아 ・・・・・・ 이게 본론." "그래서, 기억이 중요한 거야. 인상적인 기억이 중요하다고. 그런 기억 몇 개면 인생 전체를 버티니까 말이야. 그래서 값이 나가는거라고. 그런 기억 하나 갖는 게 참 의미가 있다고 무슨말인지 알아요?" - P181
"바꿀 수 없는 건 그때의 분위기, 그 순간의 감정, 그런 것들이지." 김다울의 기억은 분명히 오한 자신이 편집한 영수의 기억이맞지만, "당신 원래 기억이 정, 확, 히, 어땠는지는 아무도 몰라." - P182
셋이 한 몸으로 울고 있는 걸 오한은 지켜보고만 있다. 속내를 알 수 없는 시선이다. 전에는 본 적 없는 얼굴을 하고 있기도 했다. 오한은 영수와 수를 바라보며 혼잣말을 했다. "역시 내 것을 가져야겠어." - P183
그러니까, 사실 오한은 자신이 편집한 기억을 들으려 이곳까지 온 게 아니었다. 타인의 기억 따위나 듣자고 목숨을 건 게 아니었다. - P184
그러니까, 아까 개똥철학을 앞세우면서까지 오한이 영수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생각해보니 나는 너 같은 것도 두 개나 팔아치운 그런 값나가는 기억이 하나도 없더라, 이 말이야.‘ ‘나 진짜 열심히 살았거든?‘ - P185
오한은 자신만의 남다른 인생 디테일을, 차별화되는 기억을 갖고 싶다는 거였다. 그러니까, 애초에 오한은 자신만의 기억을 만들어보겠다고 이 이동을 무릅쓴 거였다. - P186
오한은 더 더 더 강렬한 기억을 갖고 싶었다. ‘이왕이면 값나가는 걸로.‘ 비싼 돈을 지불하는 기억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 오한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이왕이면 가장 비싼 걸로.‘ 가장 비싼 기억은 연애의 기억이 아니었다. - P187
그러는 사이 다른 등대가 가까워졌다. 등대라고 불리는 E구역의 1인용 거주 공간. 김다울은 등대들을 지나쳐 계속 걸었다. E구역의 바다에는 SNS에 올릴 사진을 찍기 위해 포즈를 취하는 흔한 관광객 하나 없었다. 바다는 고요했다. 사막처럼 적막했다. - P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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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C구역에 있는 해도연에게 다시 돌아가야 했다. 그녀에게 영수의 첫 번째 기억만 들으면 되었다. - P189
반나절 운전을 배운 수가 직접 차를 몰아보겠다고 했을 때, "나는 죽기 싫어." 기특은 내렸고, "나는 진짜 열심히 사는 사람이야." 오한도 내렸다. 진짜 열심히 살지는 않은 것 같고 게다가 죽고도 싶은 영수가 0수 옆자리에 앉았다. - P190
그런 둘을 보던 기특이 중얼거렸다. "......쌍둥이치고도 너무 똑같이 생겼단 말이지." 그렇게 말하는 기특을 오한은 놓치지 않고 봤다. - P191
영수는 어쩌다가, 자살을 하려고 했던 자신이 어쩌다가, 그것만이 유일한 바람이었던 자신이 어쩌다가 인생 근무 대신할 복제인간을 살려야 하는 입장에 처한 걸로도 모자라 어쩌다가 기특 이분의 삶의 존폐에까지 끼어들게 되었는지, "아 진짜 인생 뭘까?" - P193
넷은 간단히 끼니를 때웠고 화장실을 가겠다고 기특이 먼저 일어났다. 오한은 화장실을 다녀오는 기특을 잡아 세우고는 대뜸 말했다. "쟤들 쌍둥이 아니야." "・・・・・・응? 그럼 뭐야?" "둘한테는 절대 티내지마. 둘 중 하나는 다른 하나의 복제인간." - P193
"그건 나도 모르고, 너한테 이제 중요해진 건...... 딱히 어느 한 쪽이 아니라, 둘 중 아무나 하나만 살면 너는 그 자살 연좌제, 페널티 탈출이라는 거지." "뭔 소리?" "그러니까 ・・・・・・꼭 둘이 다 필요한 건 아니라고." - P194
길을 달릴수록 사람의 흔적과는 멀어졌다. (증략). 불현듯, 기특은 갓길에 차를 세웠다. 라이트를 껐다. 훅, 어둠이 드러났다. 기특은 어둠 속으로 내렸다. 영수와 0수는 기특따라 내렸다. 오한은 차 안에 남았다. - P195
넷은 차 안에서 눈을 붙였다. 오한이 가장 늦게 잠들었다. 기특이 눈을 떴을 때는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기특은 시동을 걸었다. 그 소리에 나머지도 일어났다. - P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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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 뭐랬더라, 거대한 숲 자체가 방호복이 되어준다고 했었나?" ........" "여기 ・・・・・・ 김다울이 말한 그 병원 같지 않아?" 흔들리는 나무에 눈이 멀어 영수는 그런 생각은 해보지도 못했다. 기특의 말을 듣고 나서야 영수도 병원을 새삼 둘러봤다. - P198
‘김다울이 말한 기억 속의 공간이 정말 맞을지도 모르겠다.‘ 영수는 자신도 모르게 긴장이 되었다. 긴장한 채로 몇 걸음을 더 옮겼다. 담배 연기를 뒤로하고 병원을 올려다봤다. - P200
저 여성이 김다울이 말한 그 여성일 리는 없었다. ‘죽었을 수도 있다 하지 않았나? 그럼에도, 영수는 그 여성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설마, 저 여자가 김다울의 기억 속 그 여자, 아니겠지?" (중략). 한 여성이 있었다. 이미 몇 주 전에 그들이 만났던, 그는 해도연이었다. - P201
영수는 습관처럼 혼잣말을 했다. ‘편집이 있을 수 있다는 거 알지?‘ (중략). "환자가 아니라..... 직원이었을 수도 있어." - P202
영수는 새벽 시간에 죄송하다는 말을 여러 번건네고, 혹시 삽을 빌릴 수 있는지 물었다. 다행히 삽은 있었다. 영수에게 삽을 건네며 관리실 직원이 뭐라 중얼거렸다. 하지만, 영수는 듣지 못했다. - P203
십삼 년 전에, 영수는 이곳에 있었다. 영수는 들뜬 마음으로 땅을 마저 팠다. (중략). "......." 하지만, 영수는 드러난 연애의 증거를 손에 들고 의아해졌다. 물건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 (중략). ‘왜, 왜 이런 물건이? - P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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