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B구역은 멀었다. 머니까 차를 타고 갔다. 자율주행이 가능했지만 직접 운전을 했다. 이참에 운전에 익숙해지고 싶었다. - P91
‘새끼 아니고 님이라고 불러야 되나?‘ 그러니까, 자살 시도했던 새끼가 몹시 짜증이 났지만 웬걸 얼굴에 제법 아름다운 구석이 있어서 매력은 좀 있네 싶었는데, 옆에 있던 모자 쓴 새끼는 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기특을 터치하고 어딘가 기특과 공감대마저 형성되고 있어서 얼굴만 괜찮아봐라 하는데 쌍둥이니까 당연히 얼굴은 똑같이 괜찮고, 근데 졸라 까칠하면? 그래도 시작하는 덴 상관없지 싶었는데, 다정하기까지. 이러니 기특이 어찌 안 반해. - P93
절대 죽지 않을 거라고 했다. 걱정하지 말라고도 했다. 또다시 자살 시도를 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모자 쓴님이 한 말이니 믿고 싶었지만, 기특은 떠나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되나? 뭘 어떻게 해? 안 떠나면 되지.‘ - P94
기특은 차창을 두드리는 소리에 깼다. 아침이었다. 뜬 눈 앞에 동시에 등장한 님과 새끼를 기특은 잠시 헷갈렸다. 하지만곧 님을 찾는 재미에 설레었다. - P95
"그 나이에 B요?" 알고 보니 오한이라고 부르는 동료는 오십 대 하고도 중반이었다. ‘그 나이 정도면 D 에 살아야 정상. 지병이 있다면 E로도 갔을텐데 어떻게 B에 살지? 도대체 몸뚱이 관리를 어떻게 했으면? 얼마나 악착같이 잘 살겠다고 오버했으면 저래?‘ 싶었지만, (후략). - P96
기특은 더 말해봐야 기분만 더러워질 것 같고, 어디로 가야 되는지 행선지나 물었다. 하지만 동료는 주소를 알려주지도 않았다. 대신에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일단 직진." - P97
15
오한과 0수는 각종 휴가와 연차를 모두 합쳐 살아온 동안 가장 긴 휴가를 냈다. 두 달이 조금 넘었고 짧은 계절 하나가 겨우될 시간이었다. - P98
기특의 차는 올드 스타일에 낢기도 했지만 그래도 제법 태가 났다. 말했듯이 기특은 레트로를 좋아했고 마침 레트로가 다시 유행이기도 했다. 유행은 돌고 돈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 P99
"제가 첫 번째로 판 기억을 가진 사람이 거기 있다는 거죠?" 0수가 오한에게 다시 확인했고 오한은 고개만 끄덕였다. 기특이 불쑥 물었다. "C구역 가봤어들?" - P100
"우리가 우리 인생에서 객이 될 수 있어요? 우리 인생에서 방관자가 될 수 있냐고. 손 놓고 우리 인생 구경만 하고 있을 수 있냐고 없죠? 근데 여행을 가면 남의 인생의 객이 되어서 그들의 인생을 구경할 수 있는 거야. (중략). 인생에서 방관자가 될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라고, 그래서 여행이 좋은 거야." "와, 개똥철학 오지네." - P101
영수의 죽음을 위해서 태어난 수, 영수의 기억을 편집한오한, 0수의 죽음을 막으려는 기특. 그들은 그렇게 이어져 있었다. - P104
오한이 드디어 기억의 위치를 알려줬다. 첫 번째 기억은 C구역의 끝, D구역과 경계 짓는 어느 산 중턱 요양병원에 있었다. - P105
16
(전략). 그중 몇이 넷을 쳐다봤다. 외부인인 게 이렇게 바로 티가 나나? 넷은 의아했지만 곧 알아차렸다. 그곳에 방호복을 입은 사람은 그들밖에 없었다. - P107
"바람에 나무 흔들리는 거. 그거 보는 거지?" 기특이었다. 영수를 좋아하겠다고 무작정 선언한 후로 그 마음을 착실하게 실천 중인 스물. 사소한 이해의 기척도 알아채는 기특은 타인을 헤아릴 때도똑같이 예민했다. - P109
영수는 기특을 새삼 봤다. 영수는 기특에게 왜 그런지를,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를 보는 걸 왜 좋아하는지를, 몹시 또 잘, 아주 정확하게 설명하고 싶어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쉽게 입이열리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영수의 시선은 계속 기특에게 머물러 있었다. "......뭘 그렇게 쳐다봐, 요?" - P109
17
(중략). 직원 중에 해도연이라는 사십 대 여성이 있는지도물었다. 해도연이라는 이름을 언급하자마자 직원은 안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부서긴 한데 청소관리과 직원이라고. - P111
오한은 열린 병실 문 앞에 섰다. 오한이 있는지도 모르고 해도연은 병실 청소에 열심이었다. (중략). 정확히는 오한의 얼굴을 봤다. 누가 왔는지가 아니라, 얼굴의 형태만 확인하려는 것처럼. "금방 끝내고 나갈게요." 흥미 없는 얼굴이었는지 더는 오한을 쳐다보지도 않고 해도연은 짧게 말했다. - P112
해도연은 침대를 정리하고 어질러진 물건들을 제자리에 놓고 먼지를 털고 바닥을 쓸고 닦았다. 청소를 제대로 끝마쳤나 둘러보다가 방에 없던 물건을 본 것마냥 오한을 새로이 발견했다. 오한에게 가벼운 목례를 하고 해도연은 병실을 빠져나갔다. ‘유명하다더니 기가 센 걸로 유명한 거였나?‘ - P113
영수를 그냥 두면 한세월 동안도 저러겠다 싶어 오한이 영수를 종용해댔다. 그런 말들을 듣고 있는 것만도 부담이었던 건지 영수는 오한의 말을 자르며 엉겁결에 대답했다. "아, 알겠어요. ••••••한번 해볼게요. 어떻게든." 영수의 대답을 마지막으로 논의는 끝났다. - P115
18
(전략). 직원복을 입은 해도연이 입원 병동 4층으로 올라갈 때 따라갔다. 막상 얼마나 가까이 다가가야 할지,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전혀 판단이 되지 않았다. 일단은 해도연을 좀 알아보자 싶었다. - P117
영수는 빌라 초입에서 기다렸다. 해도연은 방호복 위로 사이즈가 넉넉한 크로스백을 메고 나타났다. (중략). 해도연은 어느 동네에서 내렸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해도연은 크로스백에서 뭔가를 꺼내 오가는 사람들에게 건네기 시작했다. - P118
해가 떨어졌다. 해도연은 유인물을 건네며 휴대폰 플래시로 상대방의 얼굴을 비춰 언성을 높이게 했다. - P118
해도연은 주 7일을 똑같이 보냈다. 매일 그렇게 살았다. 남편도 아이도 없는 듯했다. - P119
해도연은 가족이 없는 사람이었고, 가족 혹은 친척 누가 자살을 했는지 몰라도 근무일이 이틀이나 늘어난 주 7일 근무자였으며, 퇴근 후에는 하루도 빠짐없이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 P119
영수는 해도연이 찾는 그 얼굴이 궁금해졌다. 도대체 누굴저렇게 찾는 건지. "잃어버린 자식이라도 찾나?" 다가가서 모르는 척 유인물을 받아볼까? - P120
사진이 아닌 손으로 그린 그림이라 정밀하지는 않았지만, 누군가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지?‘ 하지만 그뿐, 영수는 그림 속의 그 얼굴이 누군지 알 수 없었다. - P121
"(전략). 두 번째 기억에서 첫 번째 기억의 단서를 찾을지? 어떻게 생각해요?" 오한이 의견을 구했고, 뾰족한 수가 없었던 영수와 수는, 의견이랄게 없는 기도, 그 의견에 찬성했다. - P122
19
거주지 등록법에 따라 E구역은 가장 나이가 든, 바이러스 감옆에 가장 취약한 자들이 살았다. E구역은 바닷가에 흩어져 있었다. - P123
"E구역은 완전 바이러스 덩어리라 E구역에 들어갈 때부터 방호복 절대 한순간도 벗으면 안 되고, 또 그 뭐야, E구역에 대해서 들어봤지? E구역 괴담들? 응?" 기특은 E구역 괴담에 대해서 들려줬다. E구역에는 죄다 할머니, 할아버지들뿐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정말 E구역에 뭐가 사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다고 - P124
"내가 듣기로는 도망 못 가게 평생 가둬놓고 이야기 들려준다던데, 자기 젊었을 때 이야기. 계속 반복해서." "와 소름, 귀에서 피 나겠다." 오한의 대놓고 놀리는 말에 영수가 맞장구쳤다. - P125
"정말 우리 뭐라고 해? E구역에 왜 왔다고 해?" "노인들만 산다니까, 아무래도 부모님을 만나러 왔다고 해야하지 않겠어?" "아무래도 그렇겠지?" 영수와 수가 말을 주고받았다. - P127
"......계속 궁금했는데, 우리가 찾는 기억이라는 걸 어떻게 알아? 딱 들어보면 그냥 아나? 감으로?" "편집자들이 표식을 남긴다. 자신이 편집한 기억은 자신이 알아볼 수 있는." 0수가 대신 답했고, 기특은 오한에게 직접 물었다. - P128
"노래? 그게 무슨 말이야? 무슨 노래? 누구 노래?" 설명이 부족하다는 듯 기특이 다시 물었다. "우소하." 자신이 편집한 기억에서는 항상 배경음악으로 우소하라는 가수의 노래가 나온다고 오한은 말했다. - P129
"잊히긴 했지만, 여전히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가수야. 그리고" 오한은 이어 말했다. "부모님 만나러 왔다고 할 수 없어. 우리가 만나러 가는 사람은 이십 대니까." 갑작스레 비가 쏟아졌다. - P129
20
(전략). ‘내가 팔아버린 기억들이란 게 도대체 뭘까?‘ ‘그 기억들을 듣게 되면 나는 정말 달라질까? 그 기억들을 되찾게 되면 속에 가득 찬 이 무력감이 사라지게 될까? 그럼 나는 스스로 죽는 일에 대한 생각을 거두게 될까? 그런 생각이 줄어들기는 할까? 0수는 문득 기특을 봤다. - P130
운전 초보가 달릴 수 있는 길이 아니었다. 기특은 겁이 났는지 큰 목소리로 오한에게 말했다. 욕이 섞여 있었다. "씨발 진짜! 이제는 믿을 때도 되지 않았어요? 왜 매번 주소를안 알려줘? 어서 주소좀 알려달라구요!" 그제야 오한은 주소를 불렀다. - P132
"등대라면서?" 기특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오한에게 물었다. "등대 그거 저기 먼 바다에서도 보여야 되는 거 아냐? 그런 거잖아? 비 좀 온다고, 비가 좀 많이 오긴 하지만 그렇다고 등대 불빛이 어떻게 안 보여? 주소 제대로 안 거 맞아?" - P133
기특은 서둘러 차 문을 잠갔다. 차 문마다 있는 잠금장치가 찰칵 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수는 다시 놀랐다. 기특은 와이퍼도 꺼버렸다. 다시 비가 모든 걸 차단했다. - P134
숨소리마저 신경이 쓰이는 그때, 꼼지락거리는 소리가 들려 0수는 옆을 쳐다봤다. 영수였다. 영수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휴대폰의 모난 부분이 도드라지게 꽉 쥐었다. ‘저런 용기가 어디서 날까? 정말 두려움을 못 느끼는 건가?‘ 0수는 의아함을 넘어선 경이로움의 시선으로 영수를 봤다. - P135
영수는 누군가의 몸에 올라타 휴대폰을 쥔 주먹으로, 그 폰의 모난 끝으로, 그 사람의 얼굴을 내리치고 있었다. 누군가의 손에서 떨어져 나갔을 빛이 저기 나뒹굴고 있었다. 손전등이었다. - P136
다그치던 기특의 질문에 답을 찾고 있던, 멍청한 얼굴을 하고있던 영수가 순식간에 다른 얼굴을 했었다. ‘너를 만나고 처음 본 낯선 얼굴.‘ 영수는 지금 다시 그런 얼굴을 하고 있다. - P136
21
오한의 그만하라는 외침에 영수는 정신이 들었다. - P137
(전략). 그 물음에 오한은 웃었다. 갑작스러운 웃음이 모두를 불편하게 했다. "누가 소중한 기억이래? 나는 소중한 기억이라고 한 적 없는데?" "......그럼요?" "값나가는 기억이라고 했지." - P139
"볼 것도 없이 연애했던 기억이야." 기특은 단호하게 말했다. 이어지는 말도 확신에 차 있었다. "그것 말고는 사고팔고 할 것도 없어. 친척 너는 그런 기억을 팔아치워버려서 죽네 마네 우울한 거고, 모자 너님은 앞으로 이제 만들어가면 되고, ・・・・・・ 나랑." 기특의 말이 순식간에 분위기를 바꿨다. - P139
그들이 두 번째 빛을 향해 몇 걸음 옮겨놓자, 조금 떨어진 곳에서 다시금 새로운 빛이 드러났다. "등대가 도대체 몇 개야?" 기특이 의아해했고, "등대가 아닌 거예요." 영수가 답했다. - P141
기특이 영수와 보폭을 맞추는 동안 오한은 두 사람을 앞질렀다. 0수는 뒤로 더 처졌다. 빛이 다가와 있었다. 빛은 넷을 충분히 밝힐 만큼 가까이 있었다. 어느 거주지 앞이었다. - P143
"그 사람, 이름은?" 0수가 물었고, 오한은 영수를 보며 답했다. "김다울." - P143
원래 김다울은 A구역에 살았다. 정확히는 A구역에 위치한 집안에서 살았다. 김다울은 집 밖을 나오지 않았다. 집안에서 태어났고, 집안에서 자랐다. - P144
김다울이 스무 살이 되었을 때, 부모는 결국 B구역으로 이동 조치 될 거라는 통보를 받았다. 김다울과 함께 살며 언젠가는 살아 있는 경험을 남겨주고 싶었던 부모들이었지만 이제는 그럴 수가 없었다. - P144
부모는 브로커를 통해 알게 된 회사로 가서 김다울과 함께 타인의 기억들을 살폈다. (중략). B구역으로 떠나던 날 부모는 새로운 기억을 갖게 된 김다울의 달라진 눈빛을 분명히 보았다. 어떠한 인상적인 경험도 가져본 적 없었던 김다울에게 그들이 심어준 기억의 파장은 컸다. - P14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