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츠야마 교도소를 나와 도쿄에 도착하는 데 겨우 4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짧은 사이에 출소의 기쁨은 끊임없이 숨가쁘게 밀려왔다. - P27

공항에 도착해서 탑승 수속을 마치자 도시오가 물었다.
"술이라도 마실래?"
준이치는 고개를 저으며 즉각 대답했다.
"단걸 먹고 싶어요."
두 사람은 카페에 들어가 푸딩 알라모드와 초콜릿 파르페를 주문했다. - P28

비행기에 타면 탄 대로, 이번에는 장이 뒤틀릴 듯한 복통이 생겨 몇 번씩이나 화장실로 직행하는 신세가 되었다. 2년 남짓한 세월 동안 보리밥을 주식으로 삼고, 최소한의 칼로리밖에 섭취하지않았던 소화기들이 아까 먹은 디저트의 공격으로 공황을 일으킨듯했다. 그래도 준이치는 기뻤다. - P28

이번 집은 아직 준이치가 본 적이 없는 집이었다. 반년 전 부모님이 보내오신 편지를 통해 가족이 이사한 것은 알고 있었다. - P29

"다음 모퉁이만 돌면 된다."
망설일 틈도 없이 두 사람은 모퉁이를 돌았다. 준이치의 눈에 색바랜 몰타르 벽이 들어왔다. 오랫동안 비바람에 노출된 벽면은 줄무늬로 얼룩이 져 있었다. 대문 같은 것도 없고 길가에 난 작은 문이 그곳이 현관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 건평이 6평 정도 될까. 여하튼 단독 주택이라 하기에는 너무나도 초라한 집이었다. - P29

"준이치!"
유키에는 앞치마로 두 손을 닦으며 천천히 현관으로 나왔다. 그새에 벌써 두 눈에서 눈물이 뚝뚝 흘러내린다.
준이치는 늙어버린 어머니의 모습에 충격을 받으면서도 내색하지 않았다.
"여러 가지로 고마웠어요." - P30

준이치는 여덟 살 어린 남동생 아키오가 보이지 않아 이상하게 생각했으나, 부모가 먼저 말을 꺼내기 전에는 잠자코 있기로 했다. - P30

준이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츠야마에서 들고 온 가방을 내려놓고 이미 깔아 놓은 이불 위에 주저앉았다.
"이 집이 말이다. 이래 봬도 살기 편하단다."
문가에서 유키에가 웃으면서 말했다.
"오래돼서 손질할 필요도 없고, 청소할 데도 많지 않아." - P31

준이치는 화제를 돌렸다. 어머니가 또 눈물을 보이지 않을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아키오는요?"
"아키오는 나가 산단다. 아파트에서 혼자 살아."
"주소 좀 알려 줘요."
유키에는 조금 망설이더니 동생의 주소를 알려 주었다. - P32

하지가 가깝다 보니 아직 해가 저물지 않았다. 그래도 혼자 거리를 다니기에는 불안했다. 스쳐 가는 차들이 괜시리 빠르게 느껴졌고 또 하나, 가석방자 특유의 문제가 있었다. 형기가 만료되는 3개월 이내에 벌금형 이상의 죄를 범하면 준이치는 교도소로 돌아가야 한다. 교통위반조차 허용되지 않는 것이다. - P32

아키오가 이쪽을 노려보았다. 동생이 진심으로 화났을 때 보이는 얼굴이다.
그 분노의 이유를 가늠하고 준이치는 당황하며 말했다.
"할 얘기가 있어 좀 들어가자."
"싫어."
"왜?"
"살인자는 사절이거든."
준이치의 시야가 흐려졌다. - P33

형의 시선을 의식한 아카오가 불쑥 말했다.
"고등학교, 중퇴했어."
"뭐?"
놀란 준이치는 자신이 사건을 일으킨 2년 전을 돌이켰다.
"졸업까지 반년밖에 안 남았었잖아?"
"학교에 잘 다닐 수 있을 리 없잖아. 살인자 동생이." - P34

"아버지가 대학 포기하고 돈 벌라고 그러시니까………. 차라리 내 힘으로 학비를 벌려고."
어."
"아르바이트하는 거야?"
"창고에서 분류 작업해. 잘 하면 한 달에 17만 엔 정도 벌 수 있준이치는 각오하고 핵심 부분으로 들어갔다.
"집에는...... 아버지, 어머니 한테는 돈이 없는 거야?"
"당연하지." - P34

"얼만데, 배상액이?"
"7000만엔."
준이치는 할 말을 잃었다. 그가 주 40시간, 1년 8개월 동안 교도소 목공 공장에서 일해서 번 돈이 6만 엔이었다. 게다가 그 노동으로 교도소 측이 올린 수익은 모두 국고로 들어갔고, 피해자에 대한 위로와 보상에 쓰인 적은 없었다. - P35

준이치는 늙어 버린 모친의 얼굴을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어머니는 어떤 심정으로 오랫동안 정들었던 집을 떠났을까. 저 지저분한 단독 주택으로 이사했을 때 얼마나 비참하게 느껴졌을까. 하나밖에 없는 어머니는 아들이 범한 죄의 무게에 전율하며, 행복했을무렵의 단란한 가족상을 마음속에 그리면서 소리 죽여 울어 왔던것이다. - P36

도쿄 가스미가세키 중앙 합동 청사 6호관.
법무성 형사국 한구석에선 검찰청에서 파견 나온 검사가 ‘사형집행 기안서‘ 작성을 막 끝내던 참이었다. 총 170쪽, 라커 하나를 송두리째 점거했던 방대한 기록을 심사한 끝의 결론이었다.
사형 확정수의 성명은 사카키바라 료라고 했다. 연령은 파견 검사와 같은 32세였다. - P36

공소권을 독점한다는 강대한 권력을 쥔 검찰관은 동시에 형집행까지 마무리 지어야 할 책무가 있다. 특히 극형까지 가게 되면 엄정한 심사를 해야 하며, 그가 작성 중인 사형 집행 기안서는 앞으로 5개 부서, 13명의 관료 결재를 받을 예정이었다. - P37

‘이상 어떠한 요소를 보아도 본 건은 형의 집행 정지, 재심, 비상 상고의 사유가 없으며, 정상을 참작하여 은사에 귀속될 여지가 없는 것으로 사료됨.‘
거기까지 입력하고 검사는 손을 멈추었다. 사카키바라 료의 사건은 특수했다. 머릿속으로 미심쩍인 부분을 점검했으나, 최종 확인으로 나온 결론은 법에 비추어 보아 극형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마음속에 맺힌 꺼림칙한 느낌, 그것만으로는 증거 능력이없다. - P38

출소한 다음 날 아침, 준이치는 가스미가세키 관청가로 향했다. 보호관찰소에 출두하여 보호 관찰관과 보호사를 만날 목적이었다. - P38

오치아이는 풍채 좋은 몸과 거무스름한 피부가 거만한 인상을 풍겼지만, 대화해 보면 솔직한 실무자였다. 그는 가석방자의 준수사항을 준이치에게 재인식시켰고, 추가로 ‘직업을 함부로 전전하지 않을 것‘과 ‘현주소에서 200킬로미터 또는 3일 이상되는 여행시에는 허가를 구할 것‘ 등 특별 준수 사항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당근과 채찍을 함께 부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 P39

오치아이가 계속 말했다.
(중략).
"그건 그렇고 화해 계약 조건은 완수했나?"
오치아이의 질문에 준이치는 화들짝 놀라 얼굴을 들었다.
"돈 말씀이신가요?"
"그 외에 하나 더………, 부모님께 못 들었나?"
"아직 자세히는."
"고작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거든요." - P40

눈앞에 있는 서류로 시선을 옮긴 오치아이는 잠시 생각에 잠긴후에 말했다.
"경제적인 부담은 부모님께서 감당하셨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앞으로 부모님과 잘 상의했으면 한다. 그 밖에 네가 해야 할 것은유족에 대한 사죄다." - P40

농담조로 말하던 오치아이는 준이치의 창백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는지, 미심쩍게 쳐다보다가 말투를 바꾸었다.
"마음 내키지는 않겠지만 이건 의무야. 법적으로 보나, 도의적으로 보나." - P41

기노시타 유리를 오랜만에 본 준이치는 수척해진 느낌이 어딘가 어머니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P42

"내 얘기가 TV에 나왔어?"
"뉴스뿐만이 아니야. 연예 중계 프로에도 나왔어. 과거의 비행소년이 어쩌고 그러면서…………. 바보같이 생긴 리포터가 거짓말만늘어놓더라. 준을 나쁜 놈으로 꾸미고 싶었나 봐."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것이 자신의 본 모습이었을 것이다.
준이치는 쓰라린 굴욕감을 느꼈다. 매스컴만 아니었으면 동생 아키오는 주변 시선에 신경 쓰지 않고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을다. - P43

"미안해. 하지만 앞으로 어떤 일로도 예전 내 모습을 되찾을 수는 없을 거야."
유리의 말에 준이치는 할 말을 잃었다. 사과해야 하는 건 그였고 사죄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았다. - P43

준이치는 그 뒤로 한 5분을 걸었다. 마음이 침울해졌을 뿐 아니라 분출구 없는 성욕이 이글이글 일었다.
(중략).
 기억나서 고맙다는 표현을 하려 했다. 그런데 상대방은 준이치의 얼굴을 보자마자 경악의 표정을 지으며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못했다. - P44

할머니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준이치야, 오랜만이다."라고만말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준이치는 놓치지 않고 보았다. 상대방 얼굴이 발길 돌릴 그새를 참지 못하고 공포와 혐오가 뒤섞인 표정으로 바뀌는 것을. - P45

‘미카미 모델링‘의 외관은 그대로였다. 단층짜리 가건물에 새시 문이 달린 입구.
안으로 들어서자 아버지가 책상에서 전표를 정리하고 있었다.
2년 전까지는 여직원이 했던 일이다.
"준이치!"
얼굴을 든 도시오가 놀란 모양이었다.
"웬일이냐?"
"일하려고요." - P46

마츠야마 형무소의 수석 교정 처우관은 편안하게 웃으며 미카미 모델링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도시오에게 말했다.
"아까는 전화로 실례했습니다. 난고라고 합니다. 마츠야마에서 준이치를 담당했지요." - P47

난고는 수형자에게 강요되는 존칭을 꺼렸다.
"좀 볼 일이 있어서."
설마 가석방이 취소되는 건 아닌지, 준이치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 P47

난고는 아쉬워하듯 말하고 도시오 쪽을 바라보았다.
"잠시 아드님을 빌려도 되겠습니까? 이래저래 쌓인 얘기도 있고 해서 말입니다."
"그러세요. 그러세요."
준이치의 부친은 환하게 웃으며 기뻐했다.
"잘 좀 지도해 주십시오. 일주일 정도는 푹 쉬게 할 참이었으니까요." - P49

"교도관이 직업이다 보니 살벌한 분위기가 몸에 베어 버렸어.
그래서 사석에서는 가능한 한 빼입는다네."
준이치는 무늬가 차분한 셔츠를 차려입은 교도관을 바라보았다. 교도소 밖에서 만난 난고에게는 촌스러움과 세련됨이 공존된 기묘한 존재감이 있었다. - P50

난고가 난처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튼, 자네에게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3개월이 기한이야. 즉 보호 관찰이 끝날 때까지의 기간이지. 내용은 변호사 사무실의 일을 돕는 것이라네."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면 됩니까?"
"사형수의 누명을 벗기는 거야." - P50

"난고 씨께서도 하시는 겁니까?"
"물론. 만약 승낙해 준다면 내 조수가 되는 셈이지."
"하지만 왜 제게?"
"마침 가석방을 받았으니까."
"다자키도 가석방을 받았는데요."
준이치는 약혼자를 때려 죽인 교도소 친구의 이름을 댔다.
"그 녀석은 갱생하지 못할걸" - P51

화제가 갑자기 바뀌는 바람에 준이치는 당황했다.
"아직 못했습니다. 이삼 일 내로 다녀올 참이에요."
"좋아, 그때 나도 함께 가겠네."
"난고 씨도요?" - P52

준이치는 아연실색했다. 난고가 꺼낸 일에 대한 관심이 확 사라져 버렸다. 그는 무심결에 되물었다.
"언제 일어난 사건입니까?"
"10년 전 8월 29일. 자네가 여자 친구와 잡힌 날이지."
준이치는 현기증을 참아내며, 이는 벌일까 싶었다. 하늘이 내린 우연이라는 이름의 엄벌.
"만약 승낙해 준다면, 3개월 동안 저쪽에 체류하게 될 거야. 보호사에게는 내가 이야기해 놓겠네. 변호사 사무실 일이니, 그야말로 정규직이지. 준수 사항에 위반되지도 않고." - P52

"사생활에 간섭한 것 같아 미안하네만, 이 일은 보수도 무시 못할 걸세. 3개월 동안 수당만 300만 엔이야. 그러니까 매월 100만이란 얘기지. 그 외에 필요 경비가 300만 엔까지 지급될 테고. 그리고 만약 사형수의 누명을 벗긴다면 성공보수로 1000만 엔."
"1000만 엔?"
"그렇네. 1000만 엔일세."
준이치는 부모의 모습을 떠올렸다. - P53

제2장

사건

날이 밝아 오자 난고는 형 내외가 사는 가와사키 시의 본가를나와 가장 가까운 역인 무사시 고스기로 향했다. 그곳에서 렌트카를 빌려 준이치와 전날 상의한 대로 나카하라 가도에 오르면 금방인 하타노다이를 향해 차를 굴렸다. - P55

그때 갑자기 준이치의 표정에 움직임이 있었다. 시선을 좋으니길 맞은편에 있는 ‘릴리‘ 라는 잡화점이 눈에 들어왔다. (중략).
흰 피부의 젊은 여자는 준이치 또래였다. 과거의 연인일지도 모르겠다. 준이치의 재판 때 젊은 여자 증인은 없었으니, 사건 발각과 동시에 둘 사이는 끝난 것이리라. - P56

난고는 웃어넘겼으나 은근히 기뻤다.
"괜찮네. 얼마 안 있으면 교도관을 그만둘 테니까."
"네?"
준이치는 놀란 모양이었다.
"지금은 쌓이고 쌓인 휴가를 토해 내고 있는 중이지. 이게 끝나면 정식으로 퇴직일세. 이번 일은 퇴관 전의 자원 봉사로 취급되어 있어서 공무원법에도 걸리지 않아." - P57

난고는 앞으로 힘든 일을 당할 준이치에게 조언을 했다.
"피해자에 대한 사죄는 말이야, 얼마나 이쪽에서 성의를 보이느냐에 달려 있어. 상대방은 자네에게 분노를 터뜨릴 수도 있지만 당황할 필요 없네. 죄송하다는 마음을 말과 태도로 표현하면 돼." - P58

룸밀러로 옷깃을 점검한 준이치가 차에서 내려 상의를 끼어 입었다. 출소하고 나서 옷을 마련할 시간이 없었으리라. 차림새는 전체적으로 어색한 인상이었다. 그러나 성의를 보이고자 하는 의지는 오히려 강하게 전달될 것 같았다.
"어떻습니까?"
준이치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아. 자네 마음이 반드시 전달될 거야. 잘 다녀오게." - P59

사무라 미츠오의 얼굴은 기억하고 있었다. 피해자의 아버지는 검찰 측 증인으로 재판에 출정했고, "피고인을 엄벌에 처해 주십시오."라고 눈물을 흘리며 재판장에게 호소했었다. "제 소중한 외아들은 돌아오지 않습니다."라고 - P60

그때 "미카미?"라고 호통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준이치가 미처 마음의 준비를 하기 전에 사무라 미츠오가 모습을 나타냈다. 머리칼을 기름으로 눕힌 머리, 넓은 이마 밑에 번득이는 큰 눈, 묵직하고 정력적인 인상은 재판 때와 다를 바 없었다.
미츠오는 준이치의 모습을 보자 그 자리에 멈춰 섰다. - P60

"그것으로 용서받을 수는 없겠지만, 부족하나마 사죄드리러 이렇게 찾아뵈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준이치는 깊숙이 머리를 숙여 상대방의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것도 들려오지 않았다. - P61

마침내 미츠오가 말했다. 그 떨리는 목소리에서 분노를 필사적으로 참아 내는 노력이 엿보였다.
"그쪽 사죄는 앉아서 듣도록 하지. 안으로 들어오게." - P61

미츠오는 한동안 이쪽을 노려보더니, "언제 출소했나?"라고 물었다.
"이틀 전입니다."
"이틀 전? 왜 바로 오지 않았지?"
"화해 계약 내용을 어제서야 알았습니다."
준이치는 솔직히 대답해 버렸다.
그 말을 듣자 미츠오의 기름진 이마에 혈관이 튀어나왔다.
"계약이 없었으면 사죄하러 오지 않았을 거란 말인가?" - P62

미츠오가 입을 열었다.
"화해 계약은 그쪽 부모님의 성의로 이해하고 있네. 나도 같은 일을 하고 있는 만큼 위자료와 배상금을 마련하신 고생도 알지.
그건 알고 있어."
미츠오의 말투에는 자기 자신을 납득시키려는 울림이 있었다. - P62

"솔직히 자네 얼굴은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았네. 하지만 지금 이렇게 얼굴을 맞대었으니 하나만 해 줬으면 하네."
(중략).
"가기 전에 그 애 위패에 명복을 빌고 가게." - P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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