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저승사자는 오전 9시에 찾아온다.
사카키바라 료는 딱 한 번, 그 발자국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처음 들려온 것은 철문을 여는 중저음이었다. - P9

발자국 소리가 다가올수록 사카키바라의 두 무릎이 덜덜 떨려왔다. 그와 동시에 찐득한 땀에 젖은 머리가 의지의 힘에 저항하며 천천히 바닥을 향해 수그러지기 시작한다.
타일을 힘껏 밟는 가죽 구두 소리가 점점 커졌다. - P10

"190번, 이시다."
낮은 목소리가 190번을 불렀다.
경비대장 목소리인가?
"마중 왔다. 나와라."
"네?"
되물은 목소리는 생각보다 얼빠진 음향으로 들렸다.
"저요?"
"그렇다, 출방이다."
돌연 주변이 고요해졌으나, 정적은 오래 가지 않았다. - P10

사카키바라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필사적으로 구역질을 참아냈다.
한참을 지나 잡음은 약해지고, 신음 소리와 오열만이 남았다.
그러나 그것도 다시 행진하기 시작한 구두 소리와 무거운 짐을 끄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멀어져 갔다. - P11

그때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오싹하다. 사카키바라가 도쿄 구치소의 사형수 감방, 통칭 ‘제로구역‘ 에 수감된 지 3년째 되는 해에 일어난 일이었다. - P11

사카키바라는 백화점 봉투를 붙이던 일손을 멈추고, 방 안을 둘러보았다. 독방 크기는 1.5평도 채 되지 않는다. 싱크대와 변기가있는 자리를 빼면 생활 공간은 겨우 1평이다. - P12

다음은 언제일까.
사카키바라는 바깥공기를 들이마시며 결코 익숙해질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저승사자가 그의 방 앞에 멈춰 서는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걸까. - P12

나는 처형당하고 마는 걸까?
전혀 기억에도 없는 죄로 인해서.
교도관의 발자국 소리가 들린 것 같아 사카키바라는 좌탁 앞으로 돌아갔다. 지금은 오전 11시. ‘마중 올‘ 시간은 아니다. 적어도 내일 아침까지는 목숨이 보장되어 있을 터였다. - P13

사카키바라는 노역을 재개했다. 유명 백화점 로고가 들어간 종이를 접어 풀로 붙인다. 시간급 32엔, 월급으로 환산하면 5000엔정도 되는 일이다. 그래도 문구류나 과자, 옷과 같은 본인 구입품을 살 수 있는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 P13

사카키바라의 가슴에 희망이 솟아올랐다. 이는 사형수 감방에 수감된 이후 7년 동안 단 한 번도 느껴 본 적이 없는 강렬한 빛이었다.
지옥의 입구에서 되돌아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 - P14

제1장

사회 복귀



"하나, 일정한 주소에 거주하며, 정규 직업에 종사할 것."
(중략).
"하나, 지속적인 선행에 힘쓸 것"
동료의 낭독을 듣는 미카미 준이치는 이미 죄수복에서 사복으로 갈아입고 부동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손에는 가석방 허가결정서를 쥐고 있다. (중략).
"하나, 범죄성이 있는 자, 혹은 품행이 불량한 자와 교제하지않을 것"
준이치는 서약서를 낭독하는 동료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 P15

"하나, 주거를 옮기거나 장기간 여행을 할 경우 사전에 보호 관찰자의 허가를 구할 것."
마츠야마 형무소 보안 본부 회의실에는 이외에도 소장 이하 직원이 열 명가량 참관하고 있었다. - P16

"하나, 한 달에 두 번, 보호사 또는 보호 관찰관을 면회하여 근황을 보고할 것"
준이치는 눈을 내리깔았다. 복역 기간 동안 느꼈던 의문은 여태 해결되지 않았다. 자신은 진정 죄를 저지른 것인가. 그 행위를 죄라 말한다면, 2년 남짓한 복역 생활로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인가. - P16

문득 얼굴을 들자, 정면에 서 있던 교도관 한 명과 시선이 마주쳤다. 이름이 난고라는 40대 간수장이었다. (중략).
"앞으로 위의 준수 사항을 지켜 건전한 사회인이 되도록 노력할 것을 맹세합니다…………."
그러나 난고가 왜 그렇게까지 자신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는지, 준이치는 신기하게 여겨졌다. - P17

"이번 복역 생활이 너희들에게는 길게 느껴졌을 수도 있다."
더블 단추가 달린 짙은 감색의 제복을 입은 소장이 마지막 훈시를 시작했다.
"그러나 진정한 갱생은 이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기 바란다. 너희들이 교도소로 돌아오는 일 없이, 훌륭한 사회인이 되었을 때 비로소 처음으로 갱생을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날까지, 사회 복귀의 어려움에 굴하지 말고 이곳에서 배운 것을잊지 않고 잘 해내기 바란다. 이상. 축하한다."
이번에는 회의실 전체에 성대한 박수가 울려 퍼졌다. - P18

준이치는 아버지 쪽으로 향했다. 다자키도 부모로 보이는 초로의 부부 쪽으로 뛰어갔다.
미카미 도시오는 아들을 맞자, 만면에 웃음을 띠며 주먹으로 으샤! 하는 포즈를 취해 보였다. 곁에 있던 교도관들 사이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오래 걸렸구나."
도시오는 준이치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마치 자신이 형기를 마친 것처럼 한숨을 섞어 말했다. - P19

난고 쇼지는 구원받은 심정으로 아버지와 아들의 밝은 표정을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석방자가 문을 나서는 광경을 좋아했다. 자기 직무에 대한 사명감은 열아홉 살 때 법무 사무관 간수로 임명받은 지 고작 1년 만에 사라졌다. 그 후 30년 가까이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출소 풍경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이순간만큼은 저 범죄자가 갱생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 P20

이제까지 몇 번이나 읽은 서류이기는 했으나, 난고는 표지를 넘겨 분류 조사표에 기록된 미카미 준이치의 개인 정보와 뒤이은 공소사실을 다시 읽었다. 최종 확인을 위함이었다.
준이치의 출신은 도쿄였고, 가족 구성은 부모와 남동생. 2년 전범행 당시 25세였다. 죄상은 상해치사로 1심 판결 후로는 공소하지 않고 미결 구류 기간을 포함한 징역 2년의 실형 판결 확정. 수형자 분류 규정에 의해 YA급 (26세 미만의 성인으로 범죄 경향이 진행되지 않은 자)으로 분류되어 도쿄 구치소에서 마츠야마 교도소로 이관되었다. - P20

"뭘 열심히 읽고 있나?"
갑자기 묻는 말에 난고는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총무부장 스기타가 이쪽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계급은 난고보다 하나 위인 부교정장으로, 제복 소매에 금으로 된 두 개의 선이반짝이고 있다.
"229번 가석방에 문제라도 있는 건가?"
229번이란 준이치에게 붙여진 점호 번호다.
"아뇨, 헤어지는 게 좀 서운해서 그렇습니다."
난고는 농담으로 얼버무리기로 했다. - P22

1999년 8월 7일 오후 8시 33분, 사건은 느닷없이 발생했다. 현장은 도쿄 하마마츠 역 인근에 있는 식당이었다. 술을 마시고 있던 25세의 사무라 교스케라는 손님이 가게 안쪽에 있던 준이치에게
"뭐 불만 있냐?" 하고 갑자기 시비를 걸면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때 먼저 시비를 건 게 사무라 교스케였다는 것, 그리고 그 전까지 두 사람은 5미터 떨어진 테이블에 각자 앉아 대화를 나눈 적이 없다는 것이 여러 목격자들의 증언으로 뒷받침되어 있다. - P23

이윽고 주인이 테이블에 도달했으나, 격투하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 수가 없었다. 후에 재판에서 주인은 이때 일을 이렇게 증언한다.
"상대방을 해치려던 것은 피해자 쪽이었고, 피고인은 그 자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리고 준이치는 사무라 손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한다. - P24

거기까지 읽은 난고는 담배를 비벼 끄고 한숨을 내쉬었다. 불경스럽기는 하나 아무래도 쓴웃음이 나오고 만다.
싸움이 원인인 전형적인 상해치사 사건이다. 재수없는 인간이이런 사건에 휘말리는 법이다. 공소 사실로 판단하자면 실형 2년은 조금 과하다고 볼 수 있다. 집행 유예라도 이상할 게 없는 사례다. - P25

준이치의 경우, 재판에서 최대 쟁점이 된 것은 가방 속에 있던휴대용 칼이었다. 이는 매우 불리한 증거였으나, 가업을 돕던 준이치가 평소에도 미세 작업에 칼을 사용하고 있었던 점, 그리고갓 구입한 칼이 가게 포장지에 싸인 채 가방 안에 있었던 점이 운좋게 작용했다. - P25

 "살의가 있었다면 칼을 사용했을 것이다."라는 변호인 측의 주장이 받아들여졌을 뿐 아니라, 그 이전의 입건 단계에서 도검법 위반에 의한 소추도 면했던 것이다. - P26

난고가 229번 수형자에게서 느낀 것은 손득을 계산할 줄 모르는 순박하고 투박한 성격이었다. 신상 대장을 정독하고 나자 그런 인상이 더욱 강해졌다. 소년의 모습이 남아 있는 풍모나 항상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듯한 눈동자. 고등학교 재학 시절에 일으킨고작 열흘간의 가출도 한결같이 여자 친구를 좋아한 결과였으리라.
지금 난고는 반년 전에 있었던 교도관 회의를 머리에 떠올렸다.
그때 준이치는 교화사(종교를 통해 수형자를 교화하는 직업)의 면회를 거절한 이유에 대해 질문을 받자 "종교에 기대지 않고 내 머리로 생각하고 싶다."고 대답했다. -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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