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같이! 왜 이 생각을 못 했지?‘ 자치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자치는 마침내 이 여자들이 칸즈위안의 애인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아니, 애인은 맞지만 ‘렌털 애인‘이었다. 렌털 애인은 회색 지대를 맴도는 특수 업종으로 커뮤니티 플랫폼을 통해 만난 고객에게 돈을 받고 데이트를 해주는 것이었다. - P150
자치는 지난 주말 칸즈위안의 행적을 떠올리며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던 행동과 반응의 이유를 그제야 알았다. - P150
다음번 췬완행 열차가 역으로 들어오자 여자가 손을 흔들며 열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 P151
전체적인 생김새는 다르지만, 얼굴 윤곽, 입술, 귀가 그 표본병 속 여자와 몹시 흡사했다. 그러자 지금의 이 모든 상황에 들어맞는 해답이 자치의 뇌리를 스쳤다. - P151
예쁜 외모를 가진 여자가 이 도시에서 자력으로 생존하고자 할 때 렌털 애인은 여러 선택지 중 하나가 된다. - P152
렌틸 애인은 단골손님에게 자기 속사정을 자연스럽게 들키게 되고, 손님이 나쁜 마음을 먹는다면 그녀를 상대로 아주 수원하게 범행을 벌일 수 있다. - P152
왼쪽을 보니 그 여자가 긴 좌석의 제일 오른쪽 자리에 앉아휴대폰에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중략). 그녀는 범인의 허점을 포착하는 중요한 단서가 될지도 모른다. - P153
망자의 고백 2
이런 걸 쓴다고 무슨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시작했으니조금 더 쓰려고 한다. 어차피 인생도 무의미한 것이니까. 안 그런가? - P154
나는 그날 아위안과 집에 오지 않고 하고 종이 울리자마자근처 서점으로 달려갔다. <혼진 살인 사건>을 새로 사서 아위안에게 돌려주려고 했다. 용기를 내어 점원에게 물었지만 타이완책은 팔지 않는다며 코즈웨이베이나 몽콕에 가서 찾아보라고 했다. - P159
"수경이랑 마스크도 써. 고춧물이 튀어도 문제없을 거야. 그위에 두건을 쓰면 놈들이 우릴 알아보지 못하겠지. 내가 며칠동안 다페이 뒤를 밟으면서 언제 어디서 공격해야 아무도 모르게 손봐줄 수 있는지 다 알아놨어. 오늘을 놓치면 일주일을 기다려야 돼." - P161
아위안이 칭찬하듯 내 어깨를 툭툭 쳤고, 나는 계면쩍은 미소를 지었다. 그때 우린 여느 중학교 1학년 개구쟁이들처럼 진심에서 우러난 웃음을 지었지만 내가 웃는 이유는 그 또래 아이에게 걸맞지 않은 것이었다. - P164
약자를 학대하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도덕과 교훈이 무엇이든, 질서와 법률이 어떻든, 강자는 이런 쾌감을 누릴 수 있는 이들이다. - P165
강자를 억누르고 약자를 돕는 것이 올바른 길이라고 모두들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인간은 태생적으로 강자가 되길 바라는 종족이며, 약자를 착취함으로써 쾌감을 얻는다. 이것이야말로 인생의 가장 궁극적이고 원시적인 의의일 것이다. - P166
아이잉이 휴대폰을 보았다. 저녁 6시 55분. 약속 시간까지 5분이 남아 있었다. (중략). 고객에게 자신이 이 만남을 간절히 바란다는 인상을 주고싶지 않았다. 상대에게 특별한 호감이 있는 경우가 아니면 그녀는 늘 약속 시간 1분 전에 약속 장소에 나타난다. - P169
올해 스무 살인 그녀는 약 1년 전 애인 렌털업에 뛰어들었다. (중략). 아이잉은 오래전 부모와 연락을 끊었다. 아빠가 몸이 아파실직한 뒤 엄마도 아빠와 아이잉의 남동생을 돌보느라 일하지못하고 공공 임대주택에 살면서 정부의 저소득층 지원금만 가지고 생계를 꾸려야 했다. - P170
어릴 적부터 사랑과 관심을 독차지하며 학원에 다닌 남동생은 학교 성적이 좋았지만, 부모의 무관심 속에 자란 아이잉은 중학교에 올라가 사춘기가 되면서 점점 반항심이 생겼고 부모에게 더더욱 눈엣가시가 되었다. - P170
비록 대학은 가지 못했지만 전문대학 입학 자격을 얻은 그녀는 2년제 광고 미디어 과정에 지원했다. (중략). 하지만 아무리 높은 뜻을 세워도 가난한 현실을 바꿀 수는없었다. - P171
. 그래서 고민 끝에 독한 마음을먹고 렌털 애인 일을 시작했다. (중략). 이 일을 오래 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수입이 점점 줄어들다가 스물일고여덟쯤되면 한참 지난 이월 상품으로 분류되어 헐값이나 부를 수 있을 것이다. - P171
돈이 전부인 요즘 세상에 가난은 흉이지만 매춘은 흉이 아니다. - P172
그녀의 유일한 철칙은 첫 데이트에서 호텔로 직행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 P172
오늘 고객인 데이비드-물론 가명이라는 걸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의 인스타그램 계정도 연락용으로 따로 만든 것이었다-와는 첫 만남이 아니었으므로 호텔에 갈지도 모른다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왔다. - P173
렌털 애인이라는 직업의 큰 장점 가운데 하나는 바로 저녁 메뉴를 고민할 필요가 없고 종종 이렇게 훌륭한 음식도 먹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 P174
"일찍 들어가는 게 좋지. 어차피 오버나이트 결제했잖아." 데이비드가 엷은 미소를 지었다. 렌털 애인은 시간에 따라 돈을 받는데 다음 날 아침까지 밤을 함께 보내는 오버나이트는가격이 꽤 비쌌다. 아이잉은 반대하지 않았지만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데이비드의 체격을 보면 오늘 밤 잠을 재우지 않을 것 같았다. - P175
"어......?" 객실에 들어가 방 안 광경을 보는 순간 아이잉의몸이 얼어붙었다. 방 안에 다른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중략). "다・・・・・・ 당신들......." "경찰입니다." 창가에 서 있던 남자가 다가오며 아이잉의 눈앞으로 경찰 신분증을 들어 올렸다. "홍콩섬 총구 강력반 쉬유이 경위입니다." - P176
"탄아이잉 씨, 놀라지 마세요. 렌털 애인 일을 한 것 때문에 찾아온 건 아닙니다." 쉬유이는 차분하게 말했지만 아이잉은 기절할 뻔했다. 그녀는 인스타그램에서 본명을 밝힌 적이 없었고, 고객들은 그녀를 ‘신디‘로만 알고 있었다. - P176
"우리가 수사하려는 건 아이잉 씨가 아니라 이 사람입니다." 쉬유이가 샤오후이에게 태블릿을 건네받아 아직 얼떨떨한 표정의 아이잉 앞으로 내밀었다. 태블릿에 칸즈위안의 사진이떠 있었다. "・・・・・・ 앤디?" 아이잉은 조금 정신이 들었다. - P178
아이잉은 ‘앤디‘가 다른 고객들과 달랐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자기 얘기를 하지 않는 남자들은 대개 섹스가 유일한 목적이고, 섹스가 갈급하지 않은 사람은 직장이나 생활에 대한 고민을 얘기하며 긴 넋두리를 늘어놓는다. 하지만 앤디는 두번의 데이트에서 섹스를 화제로 올린 적이 없고, 자기 얘기도 거의 하지 않았다. - P179
사실 아이잉은 앤디에게 상당히 호감이 있었다. 그는 가장 이상적인 고객이었다. 돈 잘 쓰고 말수 적고 성적인 서비스를원하지 않고, 데이트할 때도 추근대지 않고 매너가 좋았다. - P179
쉬유이는 이것저것 자세히 물어보고 그녀에게서 더 얻어낼만한 유용한 정보가 없다고 판단한 뒤 비로소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 남자가 범행을 실토하게 하려는데 탄아이잉 씨의 협조가 필요합니다." - P181
조금 전까지도 주눅 든 얼굴로 떨고 있던 아이잉이 갑자기새된 목소리로 외쳤다. 뜬금없는 비난에도 쉬유이는 화를 내거나 반박하고 싶지 않았다. 경찰과 시민 사이에 신뢰가 사라진 요즘 세태에 강하게 맞서봤자 득보다 실이 많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 P182
"대중과 언론은 자살한 남자가 범인일 거라고 예상하지만우린 작은 단서 하나도 소홀히 넘길 수가 없어요. 공범이나 진범이 법망을 피해 도망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돼요." 쉬유이가 태블릿을 다시 집어 들고 다른 사진을 찾았다. - P183
"우린 탄아이잉 씨가 범인의 다음 표적일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어요." 쉬유이가 이 가설을 제일 마지막에 얘기한 건 먼저 아이잉 스스로 결론을 내리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사람들은 제3자가 알려주는 사실보다 자신이 추론한 가설을 더 신뢰하기 마련이다. - P184
쉬유이는 아이잉과 기본적인 작전 계획을 세우고 서로 연락할 방법을 점검한 뒤 샤오후이와 아싱에게 장비를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쉬유이는 경찰이 정보원에게 지급하는 보수에 따라 비용을 지급하겠다고 했지만, 아이잉은 순수한 정의감으로 하는 것이라며 거절했다. - P186
그런데 불과 사흘 뒤 아이잉에게서 연락이 왔다. 칸즈위안이 인스타그램으로 연락해 내일 만나자면서 함께 밤을 보낼수 있느냐고 물었다는 것이다. "잠시 기다려달라고 했어요." 아이잉의 떨리는 목소리가 전화기를 타고 흘러나왔다. "쉬 경위님, 그러자고 해요? 거절해요? 나한테.. ... 하려는 걸까요?" - P187
쉬유이는 고민했지만 역시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칠 수없다고 판단했다. - P188
"아이잉 씨." 샤오후이가 끼어들었다. "두 사람이 저녁을 먹는 동안 충분한 자료가 확보된다면 적당한 핑계를 대고 데이트를 일찍 끝내도 돼요. 아이잉 씨를 위험하게 만들지 않을게요." 샤오후이의 말에 아이잉도 안심했다. - P189
"이건 무선 이어폰이에요. 왼쪽 귀에 끼우고 머리로 가려요." 샤오후이가 애플 에어팟과 비슷한 크기의 무선 이어폰을 건넸다. "너무 눈에 띄지 않아요? 이러다 들키면…………." 아이잉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이건 눈에 띄어야 자연스러워요. 휴대폰 블루투스 이어폰이라고 해요. 이어폰은 아무리 작아도 안 보일 수가 없어서 감추려 할수록 더 들키기 쉬워요. 감추려는 의도가 뻔한 이어폰을 들켜버리면 변명할 수가 없잖아요." 아싱이 말했다. - P190
"이어폰과 마이크가 이 보조배터리에 연결되어 있어요. 배터리에 유심칩이 있어서 휴대폰 기능도 해요. 우리가 이걸로 아이잉 씨의 위치를 계속 추적할 거예요. 혹시 말로 도움을 요청할 수 없는 긴급 상황이 오면 배터리 옆에 있는 버튼을 3초간 눌러요. 그러면 우리가 신호를 받고 즉시 손을 써서 아이잉씨를 구할게요." - P191
약속 시간 5분 전, 아이잉이 타이쿠싱 한가운데 중정으로 가서 ‘앤디‘의 연락을 기다렸다. (중략). 중정을 서성이며 기다리고 있는데 저편의 의류 매장 쇼윈도앞에서 마스크를 쓰고 고개를 숙인 채 휴대폰을 들여다보고있는 아싱이 시야에 들어왔다. - P192
"응....... 나 왔어. 중정의 인형 조형물 앞에 있어……….. 99이어폰에서 아이잉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쉬유이는 차량안에서 모든 동태를 파악하고 있었다. 2분 뒤 칸즈위안이 영상에 나타났다. 아이잉이 그를 보고 다가가 반갑게 팔짱을 꼈다. - P193
칸즈위안과 아이잉은 오향쇠고기, 오이냉채, 샤오룽바오, 탄탄면, 닭고기탕, 돼지고기완자 등 꽤 많은 음식을 주문했다. 짜장면과 콩국만 주문한 아싱은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돌았다. 아싱도 이 식당의 시그니처 메뉴인 샤오룽바오를 먹어보고 싶었지만 팀장이 보고 있으니 마음대로 시킬 수 없었다. "요즘 바빠?" 닭고기탕을 테이블에 올려놓는 종업원을 보며아이잉이 칸즈위안에게 물었다. - P194
"재택근무가 가능해?" 코로나가 유행하면서 재택근무가 흔해졌으므로 아이잉이 이렇게 묻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응. 집에서 일해도 게으름을 피울 수가 없지만." - P194
"홍콩에 월세가 안 비싼 곳이 어디 있나?" 칸즈위안이 씁쓸하게 웃었다. "오래된 아파트도 괜찮다면 조금 싸게 얻을 순있겠지." "고민해볼게. 자기 집에서 가까이 살면 자주 볼 수 있잖아." 수줍게 미소 짓는 아이잉의 연기가 쉬유이도 속일 수 있을 만큼 자연스러웠다. - P195
"거기..." 칸즈위안이 난감한 표정으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내가 사는 아파트야." "뭐? 어머, 세상에! 집이 가까워? 범인을 본 적은 없지?" 칸즈위안이 시선을 조금 떨어뜨리며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하지 않았다. "왜 그래?" - P196
칸즈위안이 비통한 표정으로 말없이 아이잉을 응시했다. 그순간 그녀는 경찰의 말이 근거 없는 거짓말이라고 생각할 뻔했다. 눈앞에 있는 이 남자가 살인마라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눈동자를 스치는 한 가닥 이상한 빛을 놓치지 않았다. 그 눈빛이 스치는 순간 그의 표정이 부자연스럽고 작위적으로 느껴졌다. - P197
그 후 아이잉은 살인 사건에 대한 화제를 다시 꺼낼 적당한 타이밍을 잡지 못했다. - P198
"어쩔 수 없군. 플랜B로 갑시다." 쉬유이가 아이잉에게 말했다. 플랜 B란 호텔에서 칸즈위안이 샤워를 하는 동안 그의 소지품을 뒤지는 것이었다. 칸즈위안이 그날 밤 바로 살인을 저지를 가능성은 적으므로 결정적인 물증은 찾기 힘들겠지만, 그의 옷이나 지갑을 뒤져 사진을 찍은 뒤 기회를 봐서 도망치거나 적당한 핑계를 대고 거래를 중단하기로 작전을 짰다. - P198
"차 가져왔어. 호텔에 가서 마시자." 칸즈위안이 아이잉의손에 깍지를 꼈다. "파크레인에 예약해놨어." 쉬유이가 속으로 탄식을 터뜨렸다. 파크레인은 코즈웨이베이의 4성급 호텔이었다. - P199
두 사람은 곧바로 출발하지 않고 타이쿠싱을 천천히 걸으며 쇼핑센터를 둘러보았다. 칸즈위안은 가전 매장에서 피부 활력증진과 콜라겐 생성을 촉진하는 효과가 있다는 미용 기기를 아이잉에게 선물했다. 아이잉은 2천 홍콩달러가 넘는 기계를 받고 무척 기뻐했지만 자기 임무를 잊지는 않았다. - P199
"7번 출구에서 인터체인지로 내려갔습니다."자치가 무전기를 통해 보고했다. - P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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