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모노레일
도쿄만(東京)에 인접한 화물선적 창고 안은 햇빛이 전혀 들지 않는다. 마치 종유동(洞)처럼 서늘해 보이지만, 천장에 매달린 백열등 아래로 포크리프트(forklift)를 타고 오가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흥건히 땀이 밴다. - P9
부채는 원래 붙어 있던 종이가 뜯겨나가 부챗살만 남았는데, 누군가 물건 포장에 쓰는 투명 비닐테이프를 대용으로 붙여놓았다. - P10
료스케는 포크리프트를 차고에 넣고 운전석에서 뛰어내렸다. 착지와 동시에 관자놀이에 맺혀 있던 땀방울이 주르르 뺨으로 흘러내려 제멋대로 자라난 수염 사이를 지나 턱 언저리로 번져갔다. - P10
료스케는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늦게 안벽으로 나왔다. 햇빛이 쏟아지는 도쿄만을 바라보며 땀에 젖은 티셔츠를 벗어든 료스케는 슬쩍 손목시계로 눈길을 주어 시간을 확인했다. - P11
료스케는 오스기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바닥에 놓아둔 캔커피 주입구에 새까맣게 달라붙은 개미들이 보였다. "약속이라도 있는 거야?" - P11
옆에서 개미의 움직임을 지켜보던 오스기가 "개미 말야, 정력제로 쓴다더라." 라고 중얼거렸다. "이걸?" "개미는 자기 몸집보다 몇 십 배나 큰 물건도 운반하잖아. 이녀석들은 불가사의한 파워를 지녔다니까!" - P12
약 한 달 전, 료스케가 ‘메일 미팅사이트에 등록한 것이 교토에서 일어난 ‘메일 연쇄살인 사건이 계기라고 하면 좀 과장된 이야기이긴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전혀 관계가 없지 않았다. 왜냐하면 한때 사무실에서 료스케의 얼굴이나 분위기가 그 사건으로 체포된 스물다섯 살짜리 범인과 닮았다는 이야기가 화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 P13
료스케는 그 후로도 여러 번 와이드쇼나 잡지에서 범인의 사진을 봤다. 잡지에는 "여자를 궁지에 몰아넣은 게 즐거웠다."는범인의 진술이 게재되어 있었고, 이유는 모르지만 어쩐지 그 말이 마음에 걸렸다. 물론 그 말에 공감했던 건 아니다. - P13
오스기나 회사 사람들로부터 범인과 얼굴이나 분위기가 닮았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인지 료스케는 TV 뉴스에서 그 사건을 다룰 때면 볼륨을 올렸고, 식당에서 펼쳐든 신문에 속보라도 실려 있으면 포크커틀릿이 식는 것도 모르고 열중해서 기사를 읽곤 했다. - P14
료스케가 타월을 어깨에 걸치고 목욕탕으로 들어가는 미닫이문을 열려는 순간, 로커에 넣어둔 휴대폰이 울렸다. 허둥지둥급히 꺼내보니 ‘오늘밤 약속, 7시 30분에서 8시로 바꿔주세요.‘라고 찍혀 있는 ‘료코‘의 문자메시지였다. - P15
료스케는 그 메일을 농담처럼 받아들였다. 모노레일을 한 번도 타본 적이 없다는 말을 농담으로 여긴 게 아니라, 한 번도 타보지 않아서 타보고 싶다는 그 말을...………. - P16
‘로코‘의 메일을 받은 것은 시부야에서 바람을 맞고 나서 3일이 지나서였다. 그때는 이미 오는 메일도 거의 없어 슬슬 사이트 등록을 해지하려던 참이었다. - P17
목욕을 마친 료스케는 일단 아파트로 돌아가 새 티셔츠와 바지로 갈아입고, 곧바로 집을 나왔다. 지갑에는 어제 역 앞에서 찾은 3만 엔이 그대로 들어 있었다. - P17
흔해빠진 대화이긴 했지만, 2주동안이나 서로 메일을 주고받았기 때문에 료스케는 자기만의 ‘로코‘ 모습을 만들어놓았다. 핸드백에서 휴대폰을 꺼내는 눈앞의 여자는 상상과는 너무 동떨어진 모습이었다. - P18
"료스케 씨는 무슨 일을 해요? 메일로는 물어보지 않았죠" "나・・・・・・ 글쎄 뭐라고 해야 하나, 선박 관계." "선박 관계? 혹시 모터보트 선수?" "네? (중략). "그쪽 선박 관계 일이었구나." ‘료코‘ 가 아주 살짝 고개를 뒤로 젖히며 웃었다. 가까이서 보니 ‘로코‘ 입술의 립스틱이 약간 번져 있었다. -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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