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구조대원이 천천히 몸을 돌려 순찰대 경찰 둘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저은 뒤 구급 장비를 둘러멨다. 그리고 들것을 들고있는 동료에게 그들의 일은 다 끝났다는 신호를 보냈다. 침대에 누워 있는 남자는 이미 몇 시간 전에 숨을 거두었다. - P14
숨이 끊어졌으면 식환에 연락할 것이지. 구급대는 뭣 하러불러? - P14
경찰 행동 매뉴얼에 따르면, 현장에서 타살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될 시 시신을 발견한 증인의 진술과 현장 상황을 기록한 뒤 ‘식환서‘라고 불리는 식품환경위생서¹에 연락해 시신을 공공 화장장으로 운반한다.
1 식품 및 환경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홍콩의 정부 부처. - P15
숯불을 피워 자살한 사건으로 판단하고 매뉴얼에 따라 처리하면 되겠다고 생각했지만 선배 키다리가 구조대를 불렀다. 아썬은 키다리의 행동이 불필요해 보였지만, 사실 혹시 모를 가능성에 대비하는 것만이 아니라 성가신 마찰을 피하기 위한 목적이 더 컸다. - P16
터무니없는 민원에 대해서는 당국이 강경하게 대응하고 있지만, 경찰대 내부의 직장 문화는 또 별개의 문제였다. - P16
대단한 공을 세우지 않는 한 말단 경찰이 경위로 승진하는데 걸리는 기간은 평균 15년. 아무리 출세욕이 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누구든 같은 직급의 동료가 하나 줄어드는 건 반가운법이다 - P17
처음에 키다리는 연로한 어머니와 둘째 아들이 아침에 일어난뒤 숯을 피우고 자살한 맏아들을 발견한 상황일 거라고 예상했지만 간단히 심문해보니 부인은 사망자의 어머니가 맞지만 옆에 있는 남자는 이웃이었다. - P17
네 평쯤 되는 방. 홍콩의 평균 주거 면적으로 보면 꽤 큰 침실에 잡동사니가 가득 쌓여 있었다. (중략). 벽에는 애니메이션과 온라인 게임 포스터가 붙어 있고, 어수선한 컴퓨터 책상 위에 게임 캐릭터 피규어와 장식품까지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 P18
"카, 화장실이 딸린 방이라니. 은둔족의 천국이네." 아썬이옷장 옆 모퉁이에서 문을 발견하고 열어보니 창이 없는 작은화장실이었다. (중략). ‘은둔의 천국‘이라는 아썬의 말에 담긴 조롱의 뉘앙스를 키다리는 알아채지 못했다. - P18
키다리는 이런 사람이 하나 사라져도 무덤덤하기만 한 사회의 냉혹함을 생각했다. 내일 신문에 이 남자의 죽음이 짤막하게라도 실릴지 장담할 수 없었다. - P19
키다리가 고개를 들어 방의 다른 쪽으로 시선을 옮기자 아썬이 그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문이 열린 옷장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아썬, 내 말 안들…………." - P19
다만 키다리와 아썬의 눈앞에 있는 유리병에 담긴 것은 쥐나 개구리가 아닌, 잘린 팔다리와 장기였다. 인간의 팔다리와 장기. - P20
1장
일선 경찰의 다급한 보고가 경찰 본부에 도착한 직후 홍콩섬 총구總區 강력반 제2B팀에 사건이 배정되었고, 사건의 심각성을 고려해 B팀 팀장인 쉬유이가 직접 현장에 나가 수사를 지휘하기로 했다. - P23
오늘도 야근이군. 쉬유이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사실 그는야근을 별로 싫어하지 않았다. - P24
"감식 요원은 뭐래? 피해자가 몇 명이야?" "아직 확실하지 않지만 최소 두 명인 것 같아요." 자치가 유리병 중 하나를 가리켰다. "발바닥 네 개는 확인했어요. 왼쪽 둘, 오른쪽 둘." - P24
속이 울렁거려 다른 데로 시선을 옮기자 위 칸에 있는 병 하나가 다시 그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단발의 여자 머리였다. 이목구비가 단정하고 예쁘장하게 생긴 얼굴이었다. - P25
"젠장....... 이 변태는 토막 살인도 부족해서 시신의 자세까지 연출해놓았나?" 자치가 검은 비닐에 덮인 사망자를 흘긋보고 중얼거렸다. - P26
"이 사람이 이 방 주인이라고?" 쉬유이가 침대로 다가가 검은 비닐을 젖혔다. 겉보기엔 흉악무도한 변태 살인마처럼 보이지 않았다. 머리칼과 수염은 지저분했지만 야윈 체형과 가느다란 팔다리는 가해자보다 피해자에 가까워 보였다. - P26
"어머니 성을 따랐나? 아버지는 없어?" "그런 것 같아요. 이 주소지에는 어머니와 아들만 등록되어있어요."자치가 수첩을 덮었다. "마흔 넘도록 직업도 없이 어머니와 살았으니 은둔이겠죠." - P27
"자살이 확실해?" 쉬유이가 방 한가운데 그릇 속에서 하얗게 탄 숯을 내려다보았다. "일차적인 판단은 그래요. 자세한 건 부검의가 부검해봐야죠." (중략). "죄를 짓고 죄책감에 자살한 거라면 수사에 도움이 되도록범행을 자백하는 유서를 남겼을 텐데." 쉬유이가 방 안을 둘러보며 만화, 소설, DVD가 빼곡히 꽂혀 있는 책장을 가리켰다. - P27
무수한 살인 현장을 목격한 쉬유이에게도 표본이 된 토막시신은 처음이었다. (중략). 그는 셰바이천에게 시체기호증이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 P28
아마추어 코스프레모델이 참혹하게 살해된 사건이었는데 그 사건을 조사하다가 ‘오토코노코‘¹라고 불리는 젊은 남자들이 많다는 걸 알았다. 여자 캐릭터로 분장하는 걸 즐기는 남자들이었다. - P28
"담당 형사님이세요?" 셰메이펑이 소파에서 튕기듯이 일어나 쉬유이의 두 팔을 붙잡고 울부짖었다. "이게 무슨 일이에요? 왜 나를 내 집에서 내보냈어요? 우리 바이천이 용의자라고요? 애가 죽었는데 무슨 범죄를 조사한다는 거예요?" - P29
"네・・・・・・ 쉬 경위님, 이 늙은이가 부탁할게요. 구조대원들이우리 바이천을 살릴 수 없다고 했어요. 혹시 방에서 마약 같은걸 찾더라도 모른 척해주세요." "마약이요?" - P30
"시, 시체요?" 셰메이펑이 더듬더듬 물었다. "셰바이천의 옷장에서 시신이 담긴 유리병 열 몇 개가 발견됐습니다. 시신을 토막 내서 표본으로 보존한 겁니다." 셰메이펑이 쉬유이의 두 손을 힘없이 놓았다. - P30
"옆집에 사는 칸즈위안闞致遠입니다. 여기서 30년 가까이 살았고 바이천과는 어릴 적부터 아는 사이입니다." 칸즈위안이 노부인의 손등을 토닥여 안심시키며 대답했다. "쉬 경위님, 무슨 착오가 있는 거 아닙니까? 바이천의 방에 시신이 있다니요? 동물 표본이나 인터넷으로 산 영화 소품이겠죠?" "저도 착오이길 바랍니다만, 지금으로선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 P31
"셰 여사님, 현장 상태로 볼 때 셰바이천이 제일 유력한 용의자입니다. 일차적인 판단으로는 셰바이천이 범행을 저지른 뒤 두려움에 시달리다가 자살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최종결론을 내리기 전에 여사님의 협조가 필요합니다. 일상생활에 이상한 점은 없었는지, 교우 관계는 어땠는지 말씀해주십시오." - P31
"잠깐. ‘그중 한 구‘라고요?" 칸즈위안이 쉬유이의 말을 끊고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반문했다. "바이천의 방에 시체 여러 구가 있었단 말입니까?"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최소 두 구 이상입니다." - P32
"그럴 수도 없어요. 내가 출근해도 바이천은……………." "쉬 경위님." 셰메이펑이 입만 벙긋거리며 말을 잇지 못하자 칸즈위안이 말을 받았다. "바이천은 그럴 수가 없습니다.………….바이천은 ‘은둔형 외톨이‘입니다. 집 밖에 나가서 낯선 사람을 접촉하는 걸 두려워했습니다." - P32
"바이천은 20년 동안 밖에 나오지 않았다고요!" 셰메이펑이 벌컥 소리쳤다. 쉬유이는 멍해졌다. 그녀의 말에 그의 추리가 헝클어졌다. - P33
"20년이요? 20년 동안 집에 틀어박혀 살았다는 겁니까?" "네, 쉬 경위님." 칸즈위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살인은커녕 편의점에 사이다 한 병 사러 나가지도 못했어요." "몰래 빠져나갔을 가능성이 없다고는 못 하겠죠." "아뇨! 바이천은 몰래 나간 적도 없어요! 밖에 나갔다면 제가 어떻게 모를 수 있겠어요?" 셰메이펑이 아들의 혐의를 부인하듯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 P33
"메이펑 아주머니는 가사도우미 일을 하셔서 오전에만 일하세요. 바이천의 방에서 발견된 피해자가 두 명 이상이라고 하셨는데, 여러 명이 대낮에 이 집에 들어와 바이천에게 살해당한 뒤 토막 났다는 말씀이신가요? 전혀 불가능한 얘기는 아니라고 해도 누가 그런 황당한 추리를 믿겠습니까? 바이천을 범인으로 단정하지 말고 객관적으로 조사하십쇼!" 쉬유이는 예상보다 똑똑한 칸즈위안에게 정곡을 찔렸다. - P34
쉬유이는 하는 수 없이 방법을 바꾸어 처음부터 차근차근물어보기로 했다. "셰바이천이 사망한 걸 어떻게 아셨나요?" - P34
"(전략). 그런데 오늘 아침에는 문 앞에 음식이그대로 있었고 방에서 온라인 게임 소리도 들리지 않고 문을두드려도 대답이 없어서 아주머니가 걱정하며 제게 도움을 요청하셨습니다." - P35
"항상 문을 잠가두었어요. 억지로 열려고 하면 심하게 화를냈어요......." 셰메이펑이 수심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쉬유이는 ‘자애로운 어머니 밑에 못된 자식이 많다‘는 말을 떠올렸다. - P35
"네. 열쇠는 바이천이 갖고 있었어요. 그래서 억지로 문을 열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경찰에 신고한 건가요?" - P36
"출근은 안 하시나요?" "재택근무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메이펑 아주머니가 제게 도움을 청한 겁니다." 전염병이 많은 직장인의 일상을 바꿔놓았으므로 쉬유이도이상하게 여기지 않았고, 칸즈위안이 IT나 온라인 업계 종사자일 거라고 생각했다. - P36
"아들이 은둔형 외톨이가 된 특별한 계기가 있습니까?" - P36
"바이천이 어떤 공포증을 앓았던 것 같아요. 차츰 사람을 멀리하고 자신이 설정한 공간 밖으로 나가면 불안해했습니다." 칸즈위안이 말했다. "처음에는 메이펑 아주머니와 제가 바이천의 방에 들어가 말을 걸고 얘기도 나눌 수 있었지만 언젠가부터는 문도 잠그고 우리와도 문을 닫은 채 얘기하거나 온라인 채팅으로 대화했습니다." - P37
"20년 동안 그렇게 생활했다는 건가요?" 쉬유이가 약간 퉁명스럽게 물었다. "바이천은 제 외아들이에요. 그 애가 마음 편하게 살 수 있다면 저는 그걸로 충분했어요. 그래서 뭐든 원하는 대로 하게 내버려뒀어요...... 바이천...... 왜 이렇게 바보 같은 짓을 했니엄만 널 원망한 적이 없어. 널 평생이라도 데리고 살 수있는데……………" - P38
"칸 선생님, 저는 자살한 용의자의 어머니보다 참혹하게 토막 살해된 피해자에게 더 마음이 쓰입니다. 우린 아직 그 피해자들의 이름도 모릅니다." 쉬유이도 물러서지 않고 당당하게 말했다. "불만이 있으면 C&IIB³에 민원을 제기하시지요."
3 Complaints and Internal Investigations Branch의 약자. 홍콩 경찰의 관리 감독 및 감찰 업무를 담당하는 부서. - P39
"계속 바이천을 범인으로 단정하고 계신 것 같은데, 다른 가능성은 전혀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누군가 살인죄를 뒤집어씌우려고 바이천을 살해하고 자살로 위장했다거나..." 칸즈위안도 쉬유이의 반박에 물러서지 않고 노기를 누르며 새로운 가능성을 내놓았다. - P39
쉬유이는 셰바이천의 집에 다시 들어가다가 셰바이천과 칸즈위안의 집 인테리어가 조금 다르다는 걸 알았다. - P40
단칭맨션은 층마다 두 세대씩 있는 6층짜리 아파트였다. 60여 년 전 분양 당시에는 중산층은되어야 살 수 있는 서양식 아파트였지만, 세월이 흐르며 인기없는 구닥다리 아파트가 되었다. - P41
"피해자가 둘뿐이면 좋겠군." 셰바이천에 대한 정보를 조금 파악하고 온 쉬유이가 새로운 단서가 있는지 방 안을 둘러보았다. "휴대폰을 찾았어요. 그런데......." "그런데?" - P41
"그릇에 컴퓨터 부품 조각들도 있어요. 하드 드라이브인 것같아요." 자치가 책상 위 컴퓨터를 가리켰다. "확인해봤는데 하드가 없었거든요. 작정하고 증거를 은폐한 것 같아요.……………." 쉬유이는 턱을 쓰다듬으며 이 사건이 자신의 형사 경력에서 가장 힘든 일이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 P42
"자치, 이 골목이 어디로 통하지?" 쉬유이가 뭔가 생각난 듯 부하에게 물었다. "포만 스트리트일걸요? 코너를 돌아서 쭉 가면 올드리치 스트리트고요. 그건 왜요?" 쉬유이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셰바이천이 방 안에 틀어박혀 있는 척하면서 어머니 몰래 창문을 넘어 밖으로나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P42
낮 12시, 쉬유이는 단칭맨션 앞에서 간단한 언론 브리핑을통해 사건을 설명하고 기자들의 질문을 받았다. - P43
쉬유이는 현장에 도착한 순찰대가 자살자의 방에서 유리병에 보존된 토막 시신을 발견했다는 사실만 공개하고, 시신의 토막 형태나 피해자의 특징, 셰바이천이 은둔형 외톨이라는 것 등 세부적인 내용은 공개하지 않았다. - P43
"무직에 41세인 자살자가 범인인가요?" 한 기자가 물었다. "수사 중입니다만, 그럴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습니다." 기자들은 범인이 이미 사망해 연쇄살인범이 어딘가에 숨어있을 걱정은 없으니 시민들은 안심하고 생활해도 좋다는 행간의 뜻을 알아들었다. - P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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