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즈워스 M. 투히는 스스로 정한 원칙에 따라 책의 본문에는 어느 건축가의 이름도 싣지 않았다. "나는 신화적이고 영웅 숭배적인 역사 연구 방식에 늘 불쾌감을 느꼈다." 이름들은 각주에만 있었다. 가이 프랭컨의 이름은 각주에 몇 번 등장했는데 "장식이 지나친 경향이 있으나 엄격한 고전주의 전통에서 대기"고 되어 이었다 - P171
1925년 2월, 헨리 캐머런은 실무에서 은퇴했다. 그는 일 년 전부터 이날이 올 것임을 알았다. 그는 로크에게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 로크도 알고 있었고 두 사람은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티자는 생각으로 묵묵히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 P171
"하워드, 자네가 사무실을 닫아줘야겠네, 그래주겠나?" "예." 로크가 대답했다. 캐머런은 눈을 감고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로크는밤새 그의 병상을 지켰지만 노인이 자고 있는지 아닌지도 알수 없었다. - P172
"아닙니다. 그들에게 아무 부탁도 하지 마세요. 제 걱정은마세요." 로크가 말했다. 캐머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러더니 말했다. "하워드, 사무실을 닫아주게. 가구는 밀린 임대료 대신 가져가라고 해. 하지만 내 방 벽에 걸린 그림은 나한테 보내주게. 그것만 보내. 나머진 다 태워버리고, 서류, 도면, 계약서, 다 태워버려." - P173
"이제 가보게. 하워드, 날 보러 오게. ・・・・・・ 너무 자주는 말고....." 캐머런이 선착장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로크는 돌아서서그곳을 떠났다. - P174
피터 키팅은 프랭컨 앤드 헤이어에서 3년째 몸담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당당히 들고 세심하게 계산된 꼿꼿한 자세로 다녔고, 그 모습이 고급 면도기나 중형차 광고에 나오는 성공적인 젊은이를 연상시켰다. 그는 옷을 잘 입었으며 사람들이 그걸 알아보는 걸 즐겼다. - P175
그는 자신의 첫 건물에 대해, 그것의 탄생 과정의 두려움과의심에 대해 까맣게 잊고 있었다. 설계라는 게 아주 간단한 일임을 터득한 것이다. 그의 고객들은 집에 찾아오는 손님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 으리으리한 정면과 웅장한 입구, 화려한 응접실만 제공하면 다른 건 문제 삼지 않았다. - P176
"가이 프랭컨 ㆍㆍㆍㆍㆍㆍ 그 사람, 자식은 있니?" "딸이 하나 있어요." "오...... 어떤데?" 키팅 부인이 물었다. "아직 못 만나봤어요." "이런, 피터, 네가 프랭컨 씨 가족을 만나볼 생각을 안 하는건 그분에게 큰 무례를 범하는 거야." - P177
이튿날 점심식사 시간에 키팅은 그 문제에 부딪적보기로결심했다. "따님에 대한 좋은 얘기들이 들리더군요." 그가 프랑켄에게 말했다. "도대체 어디서 내 딸에 대한 좋은 얘기를 들었나? 프랭이 험악하게 물었다. "아, 그거야, 뭐, 아시다시피, 여기저기서 들었죠 따님이글을 아주 잘 쓴다고 들었습니다." - P178
키팅은 화가 나고 실망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그는 프랭컨의 땅딸막한 모습을 바라보며 딸이 아버지 외모를 얼마나 닮았기에 아버지가 저토록 못마땅해하나 궁금증을 느꼈다. 대부분의 부잣집 딸들처럼 끔찍한 추녀인 모양이었다. - P179
캐서린의 집에 가보니 거실 카펫에 편지들과 휴대용 타자기, 신문들, 가위들, 상자들, 풀통이 잔뜩 어질러져 있었다. "어머! 어떡해!" 캐서린은 복잡한 거실 한가운데에 털썩 무릎을 꿇고 앉으며 말했다. 그녀는 키팅을 올려다보며 천진하게 웃으면서 바스락거리는 흰 종이 뭉치들을 양손으로 덮었다. 이제 그녀는 스무 살이되었는데도 열일곱 살 때 모습 그대로였다. - P180
"그래, 케이티, 너한테 어울려. 끝내주게 잘 어울려. 그런데말이야, 넌 옷 입는 법만 좀 배우면 아주 매력적일 거야. 언제한번 내가 고급 양장점에 데려가줄게. 그리고 언젠가 가이 프랭컨도 만나게 해줄게. 너도 그를 좋아하게 될 거야." "응? 지난번에는 내가 그를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하지 않았어요?" - P182
캐서린은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조용히 듣고 있었다. 그러다 그녀가 갑자기 그의 뒤쪽을 보더니 화들짝 놀라 입이 벌어졌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그쪽으로 달려가더니 책상 밑으로기어 들어가 연보라색 봉투를 꺼냈다. "이번엔 도대체 뭐야?" 키팅이 화가 나서 따졌다. "아주 중요한 편지예요." 캐서린이 무릎을 꿇은 채로 조그만 주먹에 봉투를 꼭 쥐고 말했다. - P184
"케이티, 우리 약혼한 거지, 그렇지?" 키팅은 망설이지도, 힘주어 강조하지도 않고 말했다. 그의 말이 지닌 확실성이 동요 자체를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캐서린의 턱이 희미하게 위, 아래로 움직여 단어 하나를 만들어내는 걸 보았다. "예." 캐서린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 P185
키팅이 그녀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일이 년 안에 우린 결혼할 거야. 내가 독립해서 자리를 잡는 대로 바로 어머닐 모셔야 하지만 일 년만 더 있으면 해결될 거야." 그는 자신의 경이로운 감정을 망치지 않으려고 최대한 냉정하고 실제적으로말했다. - P185
그는 캐서린을 밀쳐내고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케이티! 내가 이러는 게 너의 그 위대하고 가증스런 삼촌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캐서린이 웃음을 터뜨렸다. 키팅은 그 가볍고 태평한 웃음소리를 들으며 자신이 정당성을 입증하고 누명을 벗었음을 깨달았다. - P186
"오, 삼촌은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를 찬성하는 것 같지 않아요. 삼촌은 부도덕한 걸 가르치진 않는 분이지만, 늘 내게결혼은 구식이고 사유재산 제도를 영속시키기 위한 경제적장치고 하여튼 뭐 그런 거라서 자신은 결혼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어요." "그것 참 잘 됐군! 우리가 직접 보여주자." 키팅은 캐서린과의 결혼이 진실로 기뻤다. - P186
캐서린은 모자가 한옆으로 미끄러져 내려갔고, 입술은 반쯤 벌어져 있었다. 동그란 눈은 무력해 보였고, 속눈썹은 반짝거렸다. 키팅은 그녀의 손을 잡고 손바닥을 위로 돌려 바라보았다. 그녀는 검은 털장갑을 끼고 있었는데 어린애처럼 어설프게 손을 펴고 있었다. - P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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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건축가협회 회보 토막소식란에 헨리 캐머런의 은퇴에관한 기사가 짤막하게 실렸다. 캐머런이 건축계에서 이룬 업적이 여섯 줄로 요약되어 있었는데 그의 대표 건축물 두 개의이름 철자가 잘못되어 있었다. - P188
"도대체 하워드 로크가 누군데?" 프랭컨이 물었다. "전에 말씀드렸잖아요. 헨리 캐머런 밑에서 일하는 설계사라고요." ".. "오・・・・・・ 오, 그래, 들은 것 같군. 그럼 가서 데려와." "그의 채용 문제에 대해 제게 재량권을 주시겠습니까?" "도대체 뭐야? 제도사 하나 뽑는 거 갖고 왜 이리 난리야? 그런데, 그것 때문에 그렇게 흥정을 방해해야만 했어?" - P189
"그래? 까다롭게 굴지도 모른다고? 캐머런 밑에 있던 사람한테 여기로 와달라고 애걸할 작정인가? 캐머런 밑에 있었던게 뭐 대단한 경력이라고." "가이, 그건 아니잖아요." - P189
"자네가 뭘 원하는지 알아. 좋아. 얼만가?" 로크가 물었다. "하워드, 그게 무슨 소린가?" "무슨 소린지 자네도 알 텐데." "주급 65달러" 키팅이 불쑥 말했다. 그가 미리 준비한 정교한 접근 방식은 아니었지만 로크가 다 알고 있는 이상 그런접근 방식 자체가 불필요했다. "주급 65달러부터 시작하지. 그게 적다면 다시 생각을……………." "65달러면 되네." - P190
"한 가지 조건이 있어. 난 설계는 안 할 거야. 절대로. 세부작업도, 루이 15세식 마천루 같은 건 안 그럴 거야. 나를 잡아두고 싶다면 미적인 일은 시키지 말아주게. 나를 시공부서에 넣어주게. 현장감리 업무를 주게. 그래도 날 원하나?" - P191
"이봐, 하워드, 그렇게 생각할 필요 없어. 자네도 일단 적응하면 우리와 오래도록 함께 일할 수 있어. 이제 자넨 진짜 사무실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게 될 걸세. 캐머런의 쓰레기장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다가......." "피터, 그만 닥치는 게 좋겠어. 지금 당장." - P192
"자넨 항상 목적이 있어야 하나? 항상 그렇게 심각해야만돼? 다른 사람들처럼 이유 없이 행동할 순 없는 거야? 자넨 너무 심각하고, 너무 겉늙었어. 자네한텐 만사가 중요하지. 만사가 대단하고 의미를 갖고 있지. 매 순간, 자네가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히 있을 때조차. 자네, 좀 편안해질 수 없나? 가벼워질수 없어?" "응." "그렇게 영웅처럼 구는 거, 질리지도 않아?" "내가 영웅처럼 군 게 뭔데?" - P193
"피터, 난 친절한 사람이 아냐" 말문이 막힌 키팅을 보고 로크가 덧붙였다. "피터, 그만 돌아가. 자네가 원하는 걸 얻었으니 이쯤에서끝내게 월요일에 보자고." - P195
로크는 프랭컨 앤드 헤이어의 제도실 탁자 앞에 서 있었다. 손에는 연필을 쥐고 있었고, 오렌지색 머리칼 한 가닥이 이마로 흘러 내려와 있었다. 프랭컨 앤드 헤이어의 진주색 작업복이 마치 죄수복처럼 보였다. 그는 새로운 일을 받아들이는 법을 터득했다. 그가 긋는 선들은 날렵한 강철 들보들이 될 터였지만 그는 그들보들이 지지하게 될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 P195
"로크, 미국 라디오 방송공사 건물에 설치할 고딕식 랜턴에씌울 철장 준비됐나?" 로크는 제도실에서 친구가 없었다. 그는 가구처럼 유용하고 비인격적이며 조용한 존재였다. - P196
로크는 그 스케치들을 보며 그것들을 키팅의 얼굴에 던져버리고 당장 그만두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한 가지 생각 때문에 꾹 참았다. 그 건물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법이니까. - P197
키팅은 로크에게 굴복한 걸 되갚을 방법을 찾아냈다. - P198
키팅은 처음에는 로크의 반응이 두려웠다. 하지만 로크가별다른 반응 없이 묵묵히 복종하자 더는 자제할 수가 없었다. - P198
그는 로크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에서 관능적인 쾌감을 맛보았고 한편으로는 로크의 수동적인 순종에 분노를 느꼈다. - P199
"뭐지?" 전기기사가 화난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인가, 벽돌머리?" "시간 낭비를 하고 있군요." 로크가 말했다. (중략). "그만 가보게, 애송이. 우린 대학 물 먹은 건방진 인간들이여기서 얼쩡거리는 걸 좋아하지 않으니까." "들보에 구멍을 뚫어서 거기로 전선관을 넣어요." "뭐라고?" "들보에 구멍을 뚫으라고요." (중략). "그런 식으론 안 돼." "내가 해봤어요." - P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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