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토 도서기지를 나오자마자 남자는 부하를 질타했다. 비합법적인 정보 제공을 요구하고 있는데 제공된 정보를 공적으로 취급하리라는 뜻을 암시하다니, 설령 교섭상대가 협력적이었더라고 해도 몸을 사릴 일이다. - P186
"너도 이야기 정도는 들었던 적이 있겠지. 20년 전의 ‘히노의 악몽." - P186
"저 이나미네라는 남자는 ‘히노의 악몽‘의 생존자다. 저 다리도 그 사건으로 잃었어." 미디어 양화법을 지지하는 정치결사가 히노 시립도서관을 습격해 도서관원 중 사망자 12명을 낸 대참사였다. 이나미네는 당시의 히노 도서관장이었다. - P187
법무성 조직인 미디어 양화위원회의 권한을 존중한다고 표면적으로 내세우기는 했지만 사실은 법무성과 경찰청 사이의 균형 게임의 결과라는 점이 명백해, 중앙성청에 조직이 소속되지않은 도서관에는 불공평한 대응이었다. - P187
또 습격자의 무장이 너무나 강력했다는 점에서 양화특무기관의 관여도 의심되었지만 이 수사도 도중에 중단되었다. 당시 그 수사에 관련된 남자가 보아도 그 중단 과정이 대단히 부자연스러웠기에, 공정하지 않은 어떠한 압력이 들어왔다고 어렵잖게 상상할 수 있었다. - P188
그리고 도서관은 자위의 길을 나아갔다. 현재는 실전경험비율에서 경찰을 뛰어넘어 이미 도서관은 경찰의 원조를 필요로 하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 P188
도서관은 별안간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연쇄 무차별살인사건의 수사에 도서대가 협력을 거부했다는 사실이 경찰의 공식발표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 P189
소년범죄가 증가하는 상황에서 미성년 용의자를 옹호하는 여론은 적었고, 수사협력을 거부한 도서대를 비난하는 의견이 압도적이었다. - P189
소년의 독서이력이 밝혀진다 해도 그 사실은 심증 중 지극히 일부밖에 되지 않고 수사의 대세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객관적인 사실은 무의식적인지 고의적인지 무시되었다. - P190
매일 십여 종류를 받아보는 신문 역시 도서관 자료의 일부였고, 매일 아침 모든 신문을 바인더에 끼워 전시하고 있었다. - P190
시바사키가 쓸데없는 이야기를 한 탓에 그만 쓸데없는 생각을 하게 되어 스스로에게 짜증이 났다. 이 녀석들이 사귀든 말든알게 뭐냐. - P192
테즈카의 표정이 너무나 무뚝뚝해서 약간 걱정이 되었다. "다만... 사귄다면 대충대충 대하지는 마라." 그렇게 덧붙인 뒤에야 괜한 말을 했다며 입을 다물기 전에 얼굴을 찌푸렸다. "그건 상대가 카사하라이기 때문입니까?" - P193
"어라. 카사하라 씨는?" 밖에 나갔던 코마키가 돌아와서 다행이라고 내심 안도했다. 오늘 정리할 각종 주간지를 가지고 갔던 것이다. 그러나. "설마 밖에 나가진 않았겠지." 코마키가 이렇게 말을 잇자 도조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무슨 일이 있었나?" - P194
"도서관이 범죄자 옹호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갑자기 악의로 가득 찬 목소리가 들려와 이쿠는 저도 모르게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대답해주세요!" "세 사람이나 죽인 범죄자를 도서관은 왜 비호하는 겁니까!" "비, 비호하는 게 아닙니다!" 밀려드는 목소리의 압력에 저도 모르게 반박하고 말았다. - P195
"그 원칙은 범죄자에 대해서도 지켜야 합니까?!" 그런 말을 물어봐야 알 바 없잖아. 모든 국민은 법 아래 평등, 그 말을 떠들어대는 건 도서관이 아니라 일본 헌법이다. - P195
"미안합니다. 비켜주세요. 취재라면 도서대의 홍보과로 가주세요!" "도망치는 겁니까!" 이 사람들은 어쩌면 이렇게 사람 속을 뒤집는 데에 능숙할까. - P196
시끄러워, 입 닥쳐. 분노를 고스란히 드러내며 소리치려고 한순간. "이쿠!!" 소동을 잠재울 만큼 날카롭게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입을 다물었다. 그 목소리가 성이 아닌 이름을 불렀다는 사실에 놀랐기 때문이다. - P197
"취재라면 도서대 홍보과에서 받고 있습니다!" 이쿠를 끌어안은 도조가 사람들 사이를 거침없이 헤치고 나갔다. 걸어가고 있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몸으로 부딪쳐서 길을만들고 있었다. 과연, 이 정도로 하지 않으면 그들을 돌파할 수없나보다. (중략). "홍보과에서 받고 있습니다"하고 반복했다. 통용문으로 들어가며 "이쪽 입구는 관계자 전용이라서요! 죄송합니다!"하며 달라붙을 여지도 주지 않은 채 문을 닫아버리고재빨리 출입구를 열었다. - P198
"타이밍이 나빴지만 늦지 않아서 다행이다. 주변에 보도진이몰려 있다고 듣고서 서둘러 쫓아나왔어, 저 수법에 걸려들고서 네가 사고를 안 칠 리 없으니까." "죄송합니다, 성격이 급해서." "그보다는 직선적이니까." 도조의 말투는 대수롭지 않았으며 별달리 말을 고르지도 않고 중얼거린 그 모습이 도리어 굳어 있던 마음을 파고들었다. - P199
눈물을 닦아내면 울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같아서 닦지 않고 두었지만, 눈물은 결국 멈추지 않았다. 도조는 한동안 말없이 이쿠 앞에 서 있었지만 이윽고 한숨을 쉬며 자신의 오른쪽 어깨를 두세 번 두드렸다. "쓰고 싶으면 써." - P200
국가권력을 비판하는 논조는 찍히기 쉬우니까. 그런 화제에 대해서는 미디어 양화위원회의 감시도 엄격하고 위쪽에서도 경계망을 칠 가능성도 있어. - P200
하지만 미디어 양화법이 통과되었을 때에는 보도진이 대부분 문제 제기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도조에게 불평을 해봐야 소용없지만 그 말을 하자, "싸우려고 하는 곳도 있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 P201
(전략). "뭐야, 특정 답변을 유도하는 듯한 이 앙케트는." 이쿠가 얼굴을 찡그리자 시바사키가 차를 끓이면서 "관장대리님이야"라고 대답했다. - P203
"이번에는 특별히 어디선가 무슨 말을 들은 건 아닌 듯하지만말이야." 어쨌든 체제에 거스르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니까. 라고 말하며 시바사키가 이쿠에게 차를 내어주면서 어깨를 움츠렸다. - P204
각 도서관장과 기지사령관의 직함은 동급이라서 지지하는 방침에 대립이 생기면 관련된 도서관들이 협의를 하고, 경우에 따라 도서관협회도 참여해 방침을 결정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제4장은 확대해석 여지가 너무 많아서 특례가 통하기 쉬워. 32조도 ‘이용자의 비밀을 지킨다‘이지 ‘지켜야만 한다‘가 아니잖아. 물론 원칙적인 해석은 정해져 있지만 도서관의 재량으로 바꿀 수 있는 부분도 많다는 거지." - P205
"다만 경찰이 영장을 가져오지도 않았는데 원칙을 굽힌다면 무척 꼴사나워지겠지." 경찰도 영장을 가져올 수 없었기 때문에 암암리에 도서관 측에 융통성을 요구한 셈이라 그 요청에 고개를 숙이면 도서관의 신용은 바닥에 떨어진다. - P205
"기회주의자 주제에 약삭빠르다는 점이 못마땅해." 시바사키도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앙케트를 적었다. "그러고 보니 말이야." 이야기를 바꾸려는 낌새라 몸을 내밀자 시바사키는 터무니없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바꾸었다. "요전에 보도진이랑 부딪친 뒤에 도조 교관을 끌어안고서 울었다는 이야기가 들리던데?" 홀짝거리고 있던 차를 잘못 들이켜 세차게 기침을 했다. - P207
"정말로 그런 거였더라면 당연히 남의 눈을 피했을 것 아냐! 게다가 도조 교관님이라면 너에게든 테즈카에게든 똑같이 했을거야, 아마. 그 상황이라면." 너 소름 돋는 상상을 하는구나, 얼굴을 찌푸린 시바사키는 테즈카의 경우를 상상한 듯했다. 기왕이면 자신으로 상상하면 될텐데 이상한 여자다. - P208
"그런데 너, 나 같은 입장이 되고 싶어?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입장 말이야." "아니, 그건 정말 싫어. 네 수준으로 떨어지다니 말도 안 되지." 시바사키랑 똑같은 말이냐! 라고 이번에는 이쿠가 부루퉁해진 채로 그 자리를 떴다. 도대체가 사람한테 사귀자니 뭐니 해놓고선 그 폭언은 뭐야. - P210
겐다를 사령실로 불러들인 이나미네는 허를 찔린 듯 눈을 깜박인 뒤 웃었다. "여전히 자네는 이야기가 빠르군." "돌려 말하는 건 성격에 안 맞아서요." - P211
부임한 뒤로 뭔가 수상쩍은 행동이 잦은 토바 관장대리도 행정파 인맥이라서 부사령관은 행정파로서 토바를 지지하고 있었다. 그러니 원칙파인 이나미네의 심복은 될 수 없다. - P212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나미네는 곤란한 듯이 웃으며 말했다. "히노 사건의 원한으로 경찰에게 완고하게 구는 게 아니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할 자신은 없네." 겐다는 대답하지 않았다. ‘히노의 악몽‘으로 이나미네가 무엇을 짊어졌는지 알고 있기에 안이한 말을 입에 담을 수 없었다. 잃어버린 다리는 이나미네가 짊어진 것 중 극히 일부에 지나지않는다. - P213
원칙이냐 특례냐로 도서대가 흔들리는 가운데, 교육위원회가 무사시노 제1도서관을 다시 찾아왔다. 양화특무기관과 암묵적으로 검열을 획책했던 때가 바로 얼마 전이라 도서관은 갑자기 술렁거렸다. - P214
"부관장님도 동석하고 있잖아? 끝난 뒤에 부관장님께 경과를 물어보면 되지, 뭘." "넌 정보수집의 참맛을 모르는구나, 카사하라." 시바사키는 그렇게 말하며 관장실 문 앞으로 살그머니 다가가 문에 귀를 찰싹 붙였다. - P215
소리를 내지 않고 몇 밀리미터쯤 틈을 벌린 문에 시바사키가귀를 가져갔다. 기왕 이렇게 된 것, 이쿠도 따라했다. 여기까지온 바에야 공범인데 자기만 못 들으면 손해다. "요전에는 위험한 사태를 겪으시게 해서 죄송했습니다." 이 사람은 관장대리다. "아닙니다. 오늘은 느긋하게 이야기할 수 있도록 잘 부탁드립니다." 이쪽은 방문객인 듯했다. - P216
돌아보자 코마키가 쟁반을 들고 서 있다가 두 사람에게 그 쟁반을 내밀었다. 쟁반 위에는 찻잔 네 개가 놓여 있었다. 실내에 있는 사람들과 같은 숫자다. "자, 엿들을 셈이면 적어도 차 정도는 가져가. 타이밍만 잘맞으면 안에서 이야기도 약간은 들을 수 있겠지." - P217
"무차별살인사건의 용의자 소년에 대해서 말입니다만." 이렇게 시작되고 있던 본론은 시바사키가 들어가도 끊어지지않았다. 시바사키가 자연스럽게 문을 약간 열어놓고 들어갔기 때문에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쿠와 코마키에게도 이야기가 똑똑히 들려왔다. - P217
"도서관의 대응을 교육위원회는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 발언은 적어도 이쿠가 듣기에는 뜻밖이었고, 관장대리가 듣기에도 마찬가지였던 듯하다. 하? 하고 얼빠진 듯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아무리 중대한 범죄를 일으켰다 해도 용의자는 미성년자입니다. 인도적 견지에서 보더라도 소년의 개인 정보가 마구잡이로 경찰에 유출되어서는 안 되지요. 소년의 갱생을 위해서도 도서관은 일시적으로 안이한 감정론에 치우쳐서는 안 됩니다." - P218
"앞으로도 도서관에는 소년의 인권을 존중한 대응을 기대하겠습니다." - P218
"어쩐 일로 교육위원회가 갑자기 도서관 편을 드는 걸까." 바로 얼마 전에는 도서관을 적대시하는 행동을 했는데 이번에는 도서관을 옹호하는 듯한 발언을 하다니, 이쿠의 눈에는 갑자기 태도를 휙 뒤바꾼 것처럼 보여 미심쩍었다. 그러나 코마키와 시바사키는 그다지 의외도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예상할 수 있는 범위이긴 했어." - P219
"게다가 우리들은 소년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 비난받는 게 아니잖아요. 저런 말을 듣다니 마음에 들지 않아요." 도서관은 도서관의 규칙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었다. 적어도 이쿠는 용의자 소년을 옹호할 생각은 요만큼도 없다. - P220
다. 코마키의 말을 뒷받침하듯이 방 안에서는 부관장이 입을 열었 "지지해주신다니 영광입니다만, 지금은 도서대 내부에서도 원칙을 지켜야 하는지 어떤지에 대한 의견이 나뉘고 있습니다. 미성년자를 배려하고 싶은 마음은 알겠습니다만 여론도 안 좋고, 이대로 규정을 굽히지 않기는 아무래도 어렵겠군요." 부관장은 원칙파일 텐데도 갑자기 관장대리 및 행정파를 지지하는 듯한 발언이다. - P221
"부관장의 대응은 당연해." "역시 너도 그렇게 말하는구나." 혼자서 풀이 죽은 이쿠는 한숨을 쉬었다. - P223
"도조 이정도 아마 부관장님과 똑같은 판단을 할걸." 테즈카는 당연하다는 듯이 도조에 대해 말했다. 테즈카에게도 역시 도조는 그런 식으로 보였던 걸까. - P223
"아픈 데를 찌르네." 원망스럽게 중얼거리자 테즈카는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눈살을찌푸렸다. "네게서 그런 말을 들을 이유는 없어." 그렇게 내뱉듯이 말하고는 먼저 가버렸다. 왜 그럴 이유가 없다는 건지는 짚이는 데가 없었지만, 말만 앞세우지 않는 도조나 ‘왕자님‘은 이미지로 보아 납득할 수 있었고, 개운하지 못했던 마음도 편해졌다. - P224
교육위원회는 약속대로 도서관의 원칙론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각종 매체에 표명했고, 그 사실은 과열된 여론과 보도에 돌을 던졌다. 문제는 청소년 보호의 시비로 옮겨갔다. - P224
이윽고 소년이 자백을 개시했다는 뉴스와 함께, 도서관 원칙론을 비난하는 여론은 그 자체가 없었던 것처럼 종식되었다. 특례조치 채택 움직임도 그와 동시에 딱 끊겼다. 관장대리가 지도한 앙케트도 회수된 뒤에는 전혀 쓰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 P225
그런 이쿠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바사키는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거야"라고 대충 말을 맺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화제를 바꾸었다. "이제 남은 건 너랑 테즈카 사이의 문제뿐이네." 이제 그만 적당히 대답해주지 않으면 아무리 그래도 가엾잖아 등등 그럴듯한 말을 하려나 싶었더니, "그래서 결국 어떻게 할 건데. 사귈 거야?" - P226
이쿠가 테즈카를 기다리게 한 시간은 결국 2주일 정도였다. 돌아가는 길에 좀 보자고 해서 아마 대답을 하리라고 생각했지만, 과연 도서관 근처의 카페에 들어가 자리에 앉자마자 "요전의 그 이야기 말인데"라고 이쿠는 말을 꺼냈다. "역시 너랑 못 사귀겠어." - P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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