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이 있어야해요.
마당 깊은 집단독주택 설계를 의뢰받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오래전 읽었던 김원일 작가의 소설 《마당 깊은 집) 분단 상황으로 홀어머니와 살게 된 주인공의 성장소설이다. - P17
주택을 짓고자 하는 건축주는 대부분 첫 번째 이유로 스스럼없이 마당을 꼽는다. 그때마다 김원일의 소설을 떠올리곤 했다. 마당 깊은 집을 제안하고 싶었다. 이번에 의뢰받은 건은 하나의 부지에 19세대의 단독주택을 짓는 일이었다.* 이미 2층 규모의 단독주택 19세대를 허가받은 상태로 의뢰가들어왔다. 드문 일이다. (중략).
& 당시의 건축법에 따르면, 20세대 이상일 때 좀 더 엄격한 허가 조건을 맞추는 사업 승인절차를 밟아야 했다. 따라서 소규모 공동주택은 대부분 19세대를 넘지 않았다. 현재는 사업승인 대상을 30세대 이상으로 완화하여 적용하고 있다. - P18
하지만 마당이 없다는 말로 건축주는 불만을 대신했다. 이곳 단독주택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30~40대의 젊은 부부로 아이가 한둘정도 있는데, 무엇보다 작게나마 마당이 있는 집이어야 했다. - P19
현대 주택에서 마당이란?
우리나라 현대건축에서 마당은 하나의 거대한 담론을 형성하고 있다. 동양과 서양에서 마당이 지닌 의미가 다르고, 우리는 지리적으로 가까운 일본과도 또 다르다. - P20
현대의 주택은 쓰임새가 다르고, 마당이 다르다. 땅은 작고 그 안에 담아야 할 기능은 넘친다. 공사비는 또 어찌하겠는가. 모든 제안은 공사비와 직결된다. 무시할 수 없는 조건이다. - P21
현대 주택에서 마당은 분명 전통 한옥의 마당과는 다르다. 그 여유로움을 담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택의 기능을 확보한 후에 남는 외부 면적을 마당으로 할애하는 건 더더욱 해답이 될 수 없다. - P22
마당은 창문이 없는 또 다른 거실이다. - P23
하늘이 열린방, 마당
아이들이 그린 ‘내가 살고 싶은 집‘
그럼 이번 프로젝트와 같은 현대 주택에서의 마당은 어떻게 디자인되어야 하는가, 안방과 거실을 배치하듯 벽의 구획은 없으나 하나의 공간으로 설계되어야 한다는 점에 우선 합의했다. - P24
내심 기대했던 건 지금 살고 있는 집의 방과 거실과 주방의 크기를그림으로 느껴 보게 하는 것이었는데, 아이들 대부분이 아파트의 겉모습을 그리기 시작했다. 하기야 아파트에서 태어나서 자라고 있으니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였다. 반듯한 콘크리트 덩어리에 촘촘히 창문들이 뚫렸다. - P25
사실 일산 신도시의 단독주택은 하나의 필지가 200제곱미터(60여 평)정도로 구획되어 있어 빼곡하게 진열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1층을100제곱미터(30여 평) 정도로 계획하고, 집 주변으로 1미터 이상을 띄워보자. 필지 안에 주차장도 확보해야 하니 집의 마당으로 쓸 수 있는 공간은 기껏해야 20제곱미터(6평) 정도가 고작이다. - P25
더 재미있는 사실은 살고 싶은 집을 그려 보자는 시간에 아이들 모두가 빠짐없이 꽃과 나무와 들판에 놓인 집을 한 채씩 그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거실과 방을 그리고 난 뒤에는 어김없이 널찍한 마당을 그렸다. - P27
나도 유년 시절에 단독주택에서 지낸 ‘마당‘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중략). 지금 생각하면 단독주택의 그 ‘마당‘은 특별할 것이 없었다. (중략). 하지만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마당은 있는 것만으로도 우선은 고마운 공간이다. - P27
나만의 마당은 가능한가?
이제 현실로 돌아와 이번에 계획하게 된 땅을 살펴보자. 일반적으로 검토하면 한 층에 25~30평(80~100제곱미터)의 주택이 네 개 층으로 이루어진 다세대주택이 가장 적정해 보인다. - P28
그럼에도 건축주(발주처)의 생각은 달랐다. 당시 유행한 분양 슬로건이 있다. "우리가 분양하는 주택은 도시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마당을 함께 드립니다." 단독주택을 이어 붙인 공동주택 분양이 땅콩주택이라는 별명으로 인기를 끌고 있었다. - P28
주택단지의 모든 사람이 공동으로 쓰는 마당이 아니라 상추를 키우고 아이들이 모래 장난을 칠 수 있는 그런 마당을 원했다. 계산기를 두드렸다. - P28
마당에 대한 이야기로 몇 차례 모임이 계속될수록, 내심 ‘이건 좀 어렵겠구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게다가 사용자의 눈높이는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높아져 이미 더 나은 주택을 요구하고 있었다. 논의를 거듭할수록 이번 사업의 경쟁력에 의문이 들었다. - P29
이 땅에서만, ‘따로 또 같이 마당‘
모든 땅은 저마다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 특징이라는 것이 언뜻 보기에는 단점일 수도 있고, 장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좀 더 고민해 보면그 모든 장단점은 그 땅만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모습이다. 언제든지 단점이 장점으로, 장점이 단점으로 태세 전환할 수 있다. - P30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건 각 세대의 프라이버시와 마당의 기능이다. 마당이 야외 식당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잘 꾸며져 바라보면 ‘힐링‘의 공간이 되기도 할 것이다. - P31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자
문제는 세 가지 주택 형태 중 B타입과 C타입이었다. A타입의 배치 컨셉처럼 다양한 조건의 마당을 확보하기는 불가능했다. 토지의 면적이 우선 턱없이 부족했고, A타입을 배치하고 남은 토지의 모양은 반듯했다. A타입과 같은 다양한 형태의 마당을 제안하기 어려웠다. - P33
하지만 내게 B타입과 C타입의 그림은 계속 ‘이건 답이 아닌데‘ 싶었다. 사업 일정은 늘 빠듯했고, 위 배치도를 기본으로 설계에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 P34
마당이 꼭 1층에 있으란 법이 있나?
‘마당이 꼭 1층에 있으란 법이 있나?‘ 언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누구와의 미팅에서였는지 기억나지는 않는다. 물리적으로 거실 앞의 마당을 갖지 못한다면, 그런데 꼭 마당을 갖고 싶다면 집 안 어딘가에 마당을 마련하면 되지 않을까? - P34
각 층에 두는 발코니며 테라스라면 아주 새로운 생각은 아니다. 하지만 단독주택의 마당을 생각하며 2차원의 평면에서 줄곧 디자인을하고 있었고, 그 상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이었다. - P35
(전략). 프라이버시가 확보될 수 있는 크기 정도로만 구성하고 나머지 마당은 2층과 다락 층에 배치했다. 여긴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마당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다. 어쩌면 이곳에서 상상하지 못한 많은 이야기가 일어나지 않을까. - P37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꿈꾸는 마당, 우여곡절 끝에 공사는 시작되고
"소장님! 그런데 이 시점에 또 새로운 안을 제안하는 것이 맞을까요? 벌써 충분한데요." "이미 건축주도 오케이 했고 협력사들 작업도 엄청 진행된 상황이잖아요. 다음 달까지 허가받기로 약속까지 하셨고요." 건축 계획의 변경은 언제나 후폭풍이 심하다. - P39
‘괜한 문제를 만드는 것은 아닌지이미 결정된 계획안이고, 분양 시장에 대한 조사도 마치지 않았는가. 나중에 혹시 사업에 문제가 생기면 이번 제안으로 심리적 책임을질 수도 있지 않은가‘ 나 스스로를 설득해야 했고, 팀원들과 뜻을 같이하기 위해서는 좀더 설계안을 검토해야 했다. - P40
. 단독주택 필지 공급 당시의 토지가격이 2~3년 사이에 두 배 이상 오른 것만 봐도 사람들에게 단독주택에 대한 갈증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단독주택 가격은 아파트에 비해 월등히 높았다. - P40
단독주택에 대한 갈증, 마당에 대한 막연한 꿈을 이루기에 이보다적절한 경우도 찾기 힘들었다. 주변에 아파트 단지가 인접해 있으니 기반시설이나 근린상가 등의 인프라도 좋았으며, 무엇보다 아이들의 교육환경이 좋았다. 시골의 전원주택을 선망하지만 가장 치명적인 결함은 교육 환경이니 그도 그럴 만하다. - P41
"텃밭이 마당일 수는 없죠. 크기가 문제가 아니라 그곳에서 뭔가 다양한 일들이 일어날 수 있도록 그렇게 설계하는 게 맞죠." "설계안이야 저도 찬성이지만 이 많은 문제를 어떻게 하시려고요. 시간은 또 얼마나 더 걸릴 것이며, 설계비는 더 받을 수 있겠어요?" 지금까지 조성된 주택단지에서 마당은 어떤 형태로 조성되어 왔는지, 그리고 마당이 주택단지의 분양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까지 모두 조사했다. - P42
하지만 건축주와의 미팅은 예상대로 쉽지 않았다. 기존 설계안보다조금 더 넉넉한 크기의 마당을 원했을 뿐인데, 일이 커졌다는 반응이었다. 대출금 상환 일정을 조율해야 했고, 분양 팸플릿은 물론이고 이미 구두로 약속받은 입주민들의 이사 계획도 수정해야 했다. - P42
두 달가량 사업 일정이 연기되었고, 그에따라 일을 두 번 하게 된 발주처의 실무진은 만날 때마다 투덜거렸다. 변경 설계비는 계약서를 다시 쓰지는 못한 채 구두로 일정 금액을 약속받은 채 서둘러 일을 진행했다. 결국 협력사에 지급해야 할 추가 비용만 떠안게 될 줄은 이때만 해도 알지 못했다. - P43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말
나중에 안 일이지만, 변경안은 생각지도 못한 사업 포인트로 결정되었다. 골조 공사가 한창 진행되던 어느 날 현장소장이 지나가는 말처럼던졌다. "중정의 외벽 부분에 앵글(설치물을 지지하기 위한 철제 구조물)을 설치할자리를 마련하려고요. 나중에 혹시 지붕을 씌우려면 미리 이렇게 해놓으면 좋을 것 같아서요." - P43
인허가 과정 중에 담당 주무관이 2층에 마련된 마당 공간을 보며한마디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여기는 나중에 불법으로 전용할 공간이아니냐고. 그 말에 불같이 화를 냈다. 모든 사람을 예비 범법자 취급하시는 거냐고. 돌이켜 보면 어처구니없는 장면이다. - P44
게다가 외벽에 앵글을 붙이기 위한 사전 작업 정도는 정식으로 설계변경을 받을 일도 아니었다. 물론 그때까지만 해도 한창 골조 공사 중이었고, 그 정도의 불협화음은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고 마음을 다스렸다. (중략). 그러나 오판이었다. 착공 전, 시공사가 결정되고 공사 내역서를 보는데 뭔가 이상했다. 변경하기 전 기존 허가 도서의 공사비와 다르지 않았다. 외장재의 수준도 한 단계 상승했고, 무엇보다 면적에 포함되지 않는 공간이 추가로 더 생겼으니 공사비가 같을 리 없었다. - P44
현장의 공사는 걸핏하면 중단되었다. - P45
그나마 공사가 간신히 끝날 수 있었던 것은 준공필증과 함께 공사비가 대출되기 때문이었다. 건축주도 시공자도 그쯤이면 분양이 문제가 아니었다. 어떻게든 대출을 발생시켜서 급한 불을 꺼야 했다. - P46
건축가의 손을 떠난 마당
모든 프로젝트가 그렇듯, 이번 ‘마당 깊은 집‘ 역시 설계와 시공, 유지관리 세 가지가 각자의 역할을 정확히 해야만 그 모습을 갖춘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시공팀에 책임을 모두 물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 P46
그 후 현장을 다시 방문한 것은 시청 담당 공무원의 부탁을 받고서다. 그는 이웃집의 민원이 들어왔는데 관계자들이 아무도 연락되지 않는다며 담장 경계와 차면 시설을 좀 확인해 달라고 부탁했다. - P47
(전략). 주말에 한잔하러 모인 이웃들은 자리가 좁다고 투덜거릴지도 모르겠다. 마당은 건축 관계자들의 손을 완전히 떠나 그곳에 있었다. 그렇게 도면에 없는 모습으로 마당은 주택단지의 저녁을 만들고 있었다. - P48
숲이 집안으로
숲세권, 나홀로 아파트 이야기
"이 땅이 돈이 될까요?"
돈이 되는 땅, 분양이 되는 땅
건축주는 땅을 매입하기 전 망설여진다며 연락을 해왔다. "이 땅이 돈이 될까요? 아무래도 좋은 땅이 아닌 것 같아요. 경사도 심하고 바로 뒤에 숲도 있어서 이 땅이 돈이 될지 모르겠어요. 포기할까 하는데, 그래도 한번 와서 봐주시겠어요?" - P85
토지의 시장가격은 생각보다 단순하게 결정된다. 토지를 매입해서 주택 사업을 할때는 예상하는 분양가에 토지비와 공사비, 금융비용과 각종 간접비를 제하고 얼마나 이익이 남는지로 결정된다. - P86
‘이 땅이 돈이 될까요?‘라는 말은 ‘이 땅에 주택을 지어서 분양이 잘될까요?"라는 말과 같다. - P86
땅은 잘못이 없다 극복할 단점이 있을 뿐는
부지 자체가 프로젝트의 발주처 실무팀뿐 아니라 인근 부동산 관계자들 그리들 모두에게 매력적이지 못했다. - P87
보통 램프(경사면)의 각도와 대지의 길이가 맞아떨어져야만, 용적률에 포함되지 않는 마치 1층 같은 지하층을 형성할 수 있고, 수익도 극대화된다. 너무 완만한 경사면이라면 지하층으로 계산될 수 없고, 또한 너무 급경사라면 외부에 접한 1층 같은 지하층을 기대하기 어려워진다. - P88
두 번째 문제였던 숲과 인접한 비좁아 보이는 땅 또한 장점이었다. 사실 건축주가 분양성이 좋은 아파트보다는 다세대주택으로 사업을 검토하게 된 것은 까다로운 법규 때문이었다. 부지는 제2종 일반주거지역이다. 우리나라 건축법 중에서도 가장 규제가 심한 부지로 ‘정북 방향 이격 거리‘라는 것이 있다. - P89
그런데 관점을 조금만 바꿔 보면, 부지의 북측을 제외하고 나머지는도로와 숲에 접해 있어 창을 내는 설계가 오히려 자유로웠다(참고로 창을 내는 방향으로 도로 쪽은 도로의 중심선에서부터 띄우는 거리를 계산하고, 숲이나 공원 쪽으로는 반대편의 경계선부터 거리를 계산한다). - P90
"물론입니다. 이 땅은 돈이 되는 정도가 아니라 고객들에게 브랜드를명확히 알릴 기회가 될 겁니다." "수익도 내고 회사의 브랜드도 알릴 수 있다고요? 그렇지 않아도 이정도 규모의 주택 사업을 계속해 볼까 고민 중이었는데, 그게 가능하다는 건가요?" - P91
"이땅에무엇을 지을까요?" 아파트를 지어 보자고요?
토지를 매입한 뒤에도 건축주는 계속 혼란스러워했다. "아파트를 지어 보자고요? 제2종 일반주거지역의 땅에 아파트가 가능할까요? 사업 기간도 오래 걸릴 것이고, 그냥 다세대주택을 지어서빨리 털어 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 P92
. 게다가 서울은 제2종 일반주거지역 중상당 부분을 7층 이하 개발로 한 번 더 규제하고 있다. 이번 사업지도 그범주에 포함된다. 인구가 집중되는 서울은 저층 주거지역의 수요가 반드시 있을 터이니, 그 수요에 맞춰 토지를 관리하고 있는 것이다. - P93
숲을 바라보는 장점이 있으나 이번 사업지도 예외는 아니었다. 게다가 겨우 1150제곱미터(약 350평)의 세모 모양인 까다로운 땅임을 감안하면 선택의 폭도 넓지 않다. - P93
어느 지점에서자 초록이 눈앞에 한가득
2021년 여름, 현장을 방문해 주변을 둘러보고 곳곳을 걸었다. 주택이 들어선다는 가정하에 곳곳을 살폈다. -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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