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메이(無名)는 파란색 비단 잠옷을 입은 채로 다다미에 엉덩이를 찰싹 붙이고 앉아 있었다. - P9

고등학생일 때는 발 부분에 약간의 불편함을 느꼈는데, 몸의 다른 부위는 나 몰라라 하듯이 자기들만 척척 멋대로 자라났다. (중략). 대학을 나온 뒤 잠시 회사에 다녔던 시기에는 계속 근무할 생각이 없는 자신의 진심이 주위에 간파되지 않도록 말끔한 갈색 구두를 신었다. - P12

요시로는 손수건을 바깥 장대에 걸고 빨래집게로 고정했다. 언제부터인가 수건을 쓰지 않고 손수건만 쓴다. 수건은 빨아도 잘 마르지 않아 늘 수가 부족했다. - P14

네 평 정도 되는 방과 부엌 사이에 2미터 남짓 되는 폭으로 마룻바닥이 있고, 거기에 야외용 간이 테이블과 낚시꾼이 쏠것 같은 접이의자가 놓여 있다. 들뜬 소풍 기분을 돋우듯이테이블에 놓아둔 너구리 그림이 그려진 둥근 물통엔 커다란민들레 한 송이가 꽂혔다. - P14

민들레 반대파 중에는 "국화는 한 가문을 상징하는 문양으로 선택받을 만큼 고귀한 꽃이므로 잡초인 민들레와 같은 취급을 할 수 없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 P15

요시로는 국화를 보면, 어릴 때 혼자 들판에서 누워 뒹굴며하늘을 바라보던 시간이 떠오른다. 공기는 따스하고 잡초는서늘하다. 멀리서 새 지저귀는 소리가 들린다. - P16

요시로는 소나기 같은 소리를 내며 파라핀 종이 속에서 호밀빵을 꺼냈다. 시코쿠 지방 스타일로 만든 독일 빵으로, 그을린 검정 빛깔에 화강암 정도의 무게다. 겉은 바삭바삭 딱딱하게 말랐고, 안은 수분으로 촉촉하다. 희미한 신맛이 나는 이검은 빵은 ‘아아헨‘이라는 특이한 이름을 가졌다. 빵 주인은자기가 굽는 빵에 ‘하노오바‘, ‘부레멘‘, ‘로텐부로쿠‘³) 등의 독특한 이름을 붙인다. - P17

아침에 일어나야만 하는데도 이불 속에서 꼼지락거리는 것을 ‘인간다움‘이라 한다면, 이 남자에게 인간다움이라고는 요만큼도 없다. 매일 아침 4시가 되면 아직 알람 시계가 울리지않았는데도, 마치 깜짝 상자에서 엉덩이에 용수철 달린 인형이 튀어나오듯 몸을 일으킨다.  - P18

빵집에는 종업원이 한 사람 있었고, 이 사람은 요시로와 마찬가지로 백 살이 넘었다. 체구가 작고 몸놀림은 족제비처럼 재빠르다. 요시로가 그 움직임을 눈으로 좋으니 빵집 주인은 요시로에게 얼굴을 들이대고 "삼촌이에요." 하고 귀엣말을 했다. - P18

"노인이란 본디 옛날부터 요즘 젊은이들더러 틀려먹었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이에요. 그렇게 불평하는 일이 노인 건강에는 좋다고 하네요. 젊은이들을 욕한 뒤에 혈압을 재어 보면 내려가 있다고 해요."
젊은 노인인 빵집 주인은 ‘젊다‘라든가 ‘중년‘ 같은 형용사를 뒤집어쓰지 않은, 진정한 ‘노인‘인 요시로의 얼굴을 부러운듯 바라보면서 말했다.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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