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 곧 가게에서 쫓겨나 골목에서 알몸으로 자고 있던 바보(나는 이쪽으로 정했다)는 어째서인지 오늘 아침 우리집 방바닥에 대자로 누워 있었다. 눈을 뜨자마자 그 모습을 본 시점에서 오늘의 운세는 끝장이다. - P26

우여곡절 끝에 잔뜩 취해서 깊이 잠들어버린 누드남은결국 같은 대학 같은 과 녀석이라는 사실이 판명되었다.
문제는 거기부터였다. 좀처럼 눈을 뜨지 않는 녀석을 어째서인지 내가 떠맡게 된 것이다.
단순히 비어 있던 자리에 앉아서 술을 따라줬다는 이유만으로 여자에게 맡길 수 없는 것은 이해하지만 내가 돌봐줘야 할 이유도 없다 - P27

잠시 후 잠에서 깨어난 바보가 상반신을 일으켰다. 일어나자 타월 이불이 몸에서 흘러내려 또 다시 알몸이 부활했다. 보기 흉한 정도가 아니라 안구테러다. - P28

"야, 닥쳐! 내가 혼난단 말이야!"
놈은 내가 말리는 것을 무시하고 그대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 녀석, 아직 술이 덜 깼나! 아침부터 아파트에서 큰 소리 내지 마! 바보는 통곡하듯 노래를 계속했다.
몇 번이나 말렸지만 바보는 뿌리치고 결국 끝까지 노래를 완창했다. - P29

"술 취한 요정이 술집으로 날아온 거냐? 홀딱 벗고."
"요정이 옷을 입으면 이상하잖아."
"옷을 입지 않은 요정도 현대 사회에선 충분히 이상하거든."
"날 미친놈 취급하는 거야? 너무하네. 이래 보여도 난아주 평범한 사람이거든."
평범한 사람은 남의 집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홀딱 벗고 있지 않는다. - P30

"에이, 뭐야. 알몸으로 밖에 나가라고? 너 착하게 생겨서 성격은 악마 같구나."
귀찮은 녀석이군. 옷을 몰래 숨겨서 갖고 있을 리는 없다. 숨길 곳도 없으니까.
"알았어. 옷은 내 걸 빌려줄게. 내일 학교에서 돌려줘."
내가 왜 이 녀석을 살뜰하게 챙겨줘야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계속 눌러앉기라도 하면 곤란하다. - P31

지갑도, 휴대전화도, 통장도 가방에 들어 있다. 도난당하면 곤란한 물건은 아무것도 없다. 아, 컴퓨터는 곤란하겠군. 하지만 저걸 들고 대학까지 갈 수는 없다. 게다가 같은 대학 학생이라는 신원은 알고 있으니까 만약 훔쳐가더라도 쉽게 수색할 수 있다.
또 곤란한 것은 그동안 소설을 쓴 노트. 읽으면 창피하겠지만 아마 별 관심은 보이지 않을 것이다. - P33

"걱정 마. 난 의리 빼면 시체니까. 아무튼 나는 머리를쓰는 바보거든."
졸리니까 빨리 꺼지라는 것처럼 귀찮은 듯이 말한 후 바보는 타월 이불을 온몸에 돌돌 말았다. 내게 등을 돌리고이야기를 거부했다. 마치 너나 빨리 꺼지라는 것처럼.
"그 뻔뻔함이 어떤 의미로 감탄스럽군." - P34

그리고 나는 대학에서 돌아왔다. …음, 대학에서 너무아무 일 없이, 그저 평범하게 강의를 듣고 돌아오는 바람에 묘사할 게 없다. 다만 같은 과 여학생 집단이 내게 말을걸기는 했다.
"있지, 있지, 그래서 어떻게 됐니? 무슨 얘기긴, 홀딱벗었다며, 홀딱." - P35

아파트 문을 열었다. 현관에서 신발을 벗는 도중, 문을잠그고 나가는 걸 깜빡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중략).
"... 역시 있군."
한숨을 쉬며 집 안을 바라보았다. 바보가 신중한 손놀림으로 두 개의 젓가락을 움직여 컴퓨터 키보드를 누르고있었다. - P36

"그보다 옷부터 입어라."
왜 아직도 알몸에 타월을 말고 있는 걸까. 저런 녀석과맨정신으로 상대하긴 싫다.
"남의 옷을 맘대로 입긴 미안하잖아?"
"남의 컴퓨터를 맘대로 사용하는 것도 미안한 짓이라는생각은 안 드냐?"
"아, 글쎄 하루에 한 번은." - P37

바닥에 주저앉아서 바보가 열어놓고 간 야동 사이트를바라보았다. 왜 이런 사이트는 금발 누님의 비율이 높은걸까. 뭐 나도 좋아하긴 하지만. 마우스를 손에 들고 적당히 조작하자 야동 사이트 외에도 워드프로그램을 열어봤던흔적이 보였다.
의아한 마음으로 확인해보려던 순간. 끼익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 P38

등 뒤로 야동 사이트의 빛을 받으며 웃는 그 모습은 최고로 경솔하고 바보 같았다.
"뭐야, 너 쓸쓸하냐?"
"너야말로 정말 고집쟁이로군."
어째서 바보가 집 안을 둘러보았다. 재미있는 건 아무것도 없을 텐데.
"아-. 옷 고마워." - P39

"뭘 본 거지. 컴퓨터? 노트?"
"둘 다."
그는 여전히 태연한 태도였다. 오히려 이 분위기에 익숙해졌는지 입가에 미소마저 매달려 있었다. - P40

"전혀 미안하지 않은 눈치로군.
"정체도 알 수 없는 사람을 자기 집에 재워주는 착해빠진 녀석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고 싶어서. 살펴보는 동안 아주 멋지고 시적인 문장을 발견했지."
"꺼져." - P40

"야, 아직도 화났냐? 뒤끝 쩌네."
"뒤끝이 아니야. 아직 화가 안 풀린 것뿐이야."
다음 날, 대학에서 느닷없이 바보와 만났다. - P42

"나 그런 모험 이야기 되게 좋아해.‘
"...너희 부모님이 남의 물건을 멋대로 뒤져도 된다고 가르치던?"
일주일 전에 읽은 만화의 대사를 흉내 내서 빈정거리며말했다. 바보는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였다.
"인생의 양식이 된다면 약간의 나쁜 짓은 해도 상관없다고 가르치셨어." - P43

"왜 나한테 치근대는 거냐."
바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건 왜 묻냐?"는 표정이었다. 뭐야, 이상한가?
"이유 따윈 없어. 굳이 말하자면 그냥, 어쩌다 보니까?" - P44

"수강 신청 끝나고 밥 먹으러 가자."
"난 집에서 먹고 왔어."
"그럼 내가 먹는 걸 얌전히 구경하면 되겠네!"
와하하. 바보가 웃으며 말했다. 나도 덩달아 하하하 메마른 웃음을 지었다. 빈정거림이 담긴 웃음이었지만 바보는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결국 나는 여러 가지로 포기하고말았다. - P45

(전략).
"뭐 어때, 너는 꿈을 이뤄서 좋고, 나는 인세 절반이 주머니에 들어와서 좋고."
"그 발언에 다각적인 태클을 걸고 싶다만 우선 첫 번째,
왜 네가 절반을 먹는 거냐?"
"프로듀싱비."
나와 세상을 만만하게 보지 마. - P46

"소설가가 되고 싶다며? 될 수 있어. 너라면 아마 될 수있을 거야."
(중략).
"있긴 하지만 얘기해봤자 아마 넌 믿지 않을 거야."
"……그런 건 근거라고 할 수 없지 않을까?"
"근데 넌 왜 그렇게 시큰둥한 거냐." - P47

‘카이 쇼코‘야, 아까 그 애."
(중략).
"그거 알아? 구내 매점 문고본 코너에도 그 애 책이 있어." - P49

"설마 너, 아까 그 카이란 애를 라이벌로 의식하는 거야?"
(중략).
"...야, 카이 쇼코는 프로, 난 그냥 지망생이야."
아무 생각 없이 소설가 지망생이라는 사실은 공언하고말았지만 바보는 신경 쓰지 않았다. - P50

바보는 팔짱을 끼며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지금 내가 해야 할 반응 아닌가?
"빨리 카이에게 잘 보여서 연줄을 만들어. 그래서 작가로 데뷔하는 거야." - P50

"헌팅인 척하고 처음엔 거짓말로 속여서 친해진 다음에
‘사실은 나도‘ 하면서 잘 얘기를 꺼내봐."
바보가 자신의 생각을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대체 어떻게 반응하는 게 현명한 길일까?
"그거 참 멋진 작전이군. 멋지지만 한 가지 궁금한 게있는데, 그 작전에 뭔가 깊은 의도라도 있어?" - P51

"깊은 의도는 없어. 넌 그냥 헌팅이나 하면 돼."
"그 시점에서 이미 망했거든, 병신아."
오랫동안 쓸데없이 이어지던 작전 회의에 적신호가 켜졌다. 하지만 바보는 물러서지 않았다. - P52

"너 소설가가 되고 싶다며?"
갑자기 바보의 말투가 돌변했다. 내가 당황하자 바보는앞으로 내밀었던 몸을 다시 원래의 위치로 되돌려서 적절한 거리를 취했다. 그리고 샌드위치 봉지와 우유팩을 한꺼번에 힘껏 움켜쥐었다.
"뭐야, 갑자기 진지하게."
"데뷔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아. 그렇게 생각하지 않냐? 아니, 생각해, 위기감을 가져." - P52

"나는 꽤 좋아하는 편이야, 카이 쇼코, ・・・아, 소설 말이야."
그래서 질투심이 들긴 하지만, 주머니에서 쓰레기를 꺼내며 반대의 감상을 늘어놓자 바보는 나를 흘낏 바라보았다. (중략).
"나는 그 애한테 한 방 먹여주고 싶어. 그러니까 너한테기대를 걸고 있는 거야." - P53

"보는 눈이 없구나. 너."
"글쎄, 과연."
마치 미래를 예견하는 현자처럼 잘난 척하며 바보는 벤치에서 일어섰다. - P53

솔직히 흥미진진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다른 사람이 말을 걸어보라고 등을 떠밀어도 실행에 옮길 리가 없다. 현역 소설가, 게다가 동갑내기. 호기심에 쏟아부을 연료로 그보다 더 훌륭한 것은 없었다. - P55

지하층은 사서의 허가가 필요하다고 설명서에 적혀 있었기 때문에 나중에 돌아보기로 하고 먼저 중앙 계단을 올라갔다.
(중략). 그 아래에는 소파 몇 개가 놓여 있고 학생들이 그위에 누워서 뒹굴고 있었다. ‘여기에서 잠들지 마세요‘라는주의문 따윈 아무도 지키지 않고 곤히 잠들어 있거나 잡담을 나누는 사람도 보였다. - P56

가까이 다가가자 망설임은 더욱 커졌다. 나의 평범한 인생을 생각해보면 지금부터 하려는 짓은 지나치게 엉뚱하다. 내 인생에는 어울리지 않는 너무나 거대한 만용이다.
도서관 바닥에 깔린 융단을 소리 없이 밟았다. 카이 쇼코는 등 뒤에 있는 나를 아직 눈치 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 P57

‘데뷔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다‘를 가슴에새기며,
나는 한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머릿속이 구석부터 새하얗게 물들고 마치 벌거벗은 것 같은 심정으로 카이 쇼코에게 다가갔다. 대학 생활 4년 동안 사용할 용기를 모두 가불해서 그 뒤통수를 향해 말을 건넸다.
"실례합니다."
주먹을 불끈 쥐며 말을 걸자 카이 쇼코가 고개를 살짝움직여 나를 돌아보았다. - P59

싫다는 말이 즉각 되돌아오는 바람에 왠지 위축됐지만 카이 쇼코는 그러건 말건 신경 쓰지 않고 말을이었다. 자세도 여전했다.
"당신은 그때 술집에서 홀딱 벗고 돌아갔던 사람." - P60

수직으로 내려다본 카이 쇼코의 얼굴은 어디에서나 볼수 있는 대학생에 불과했다. 긴장이 살짝 풀렸다. 카이 쇼코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눈도 깜빡거리지 않고 나를 응시했다.
"내 등을 잡아줘서 빚을 지울 셈인가요. 그래서 뭘 어쩌려는 거죠?"
"소설가가 되려고."
"41?"
"아, 아니, 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뭐죠?" -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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