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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라고 믿는 게 당신의 전부가 아닙니다. 당신은 누구인가요. 당신이 진정 누구인지 기억할 수 있나요?」 최면사 오팔이 공연의 클라이맥스가 될 마지막 쇼로 넘어갈 준비를 하고 있다. - P13
그녀의 손끝이 한 사람에게서멈춘다. 「이분!」 젠장. 운도 없지. 「네, 거기, 남자분. 제 쪽으로 와주시겠어요?」 - P14
「성함과 나이를 말씀해 주시겠어요?」 「르네 톨레다노, 서른두 살입니다.」 그가 마지못해 부루퉁히 대답한다. 「무슨 일을 하시죠?」 「조니 알리데 고등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고 있어요.」 - P15
「한 가지 여쭤볼게요. <잊힌 기억들>이라면 뭐가 떠오르시죠?」 호기심을 느낀 르네가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적극적인 태도를 취한다. 「역사 교사인 제 눈에 지금 세계는 기억 상실을 앓고있어요. 과거의 실수들이 초래한 결과를 망각했기 때문에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는 거죠」 곳곳에서 공감의 소리가 들리자 르네가 용기를 얻어말끝을 단다. - P16
「역사 교사가 기억을 상실하면 큰일이잖아요. 안 그래요?」 르네가 즉시 대답하지 못하고 관객석의 동료를 힐끗쳐다본다. 엘로디도 나처럼 궁금해하고 있을 거야. 왜 쇼를 시작하지 않고 이렇게 사적인 질문들로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지 말이야. - P17
「제가 이야기하려는 건 단기 기억도 장기 기억도 아닌・・・・・・ <심층> 기억이에요. 아주 깊은 심층의 기억 말이죠. 자, 지금부터 당신의 의식 아래 켜켜이 쌓여 있는 기억의 지층들을 함께 발견해 보기로 해요. 당신을 당신이게 만드는 바로 그것을 말이에요. 심층 기억을 만날 마음의 준비가 되셨어요?」 - P17
「이 체험을 수락하면 아시게 될 거예요. 먼저 한 가지솔직히 말씀드릴게요. 이 쇼를 무대에 올리는 건 오늘이처음이에요.」 뭐? 그럼 내가 최초의 피험자란 말이야? 최면 기술을 완벽히 터득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뜻이잖아. 사람들이 나만 쳐다보고 있을 테니 빨리 뭐라고 대답을 하긴 해야 하는데, 내가 얼마나 바보 같아 보일까. 그래, 하는 수 없어. 어차피 되돌리기엔 늦었어. 그가 입을 비쭉하고 나서 고개를 끄덕인다. - P18
「르네, 제 말 듣고 있어요? 아직 우리랑 같이 있죠? 대답해요. 문이 보이죠?」 지금 눈을 뜨면 사람들이 다 날 쳐다보고 있겠지? 적극적으로 최면에 응하지 않으면 분명히 엘로디가 전통 마술만 좋아해쇼를 망쳤다고 날 원망할 거야. 에이, 까짓것, 노력을 좀 해보자. 방금 뭐라고 했지? 그래, 계단, 계단을 내려가면 뭐가 보인다고? 맞아, <무의식의 문>이라고 했어. - P19
「가장 가까이 보이는 숫자가 뭐예요?」 흐릿한데 초점을 모아 볼까. 「111.」 「그건 당신이 지금 나온게 112번 문이라는 뜻이에요. 당신은 112번째 생을 살고 있는 거죠! 이제 어떤 전생에가보고 싶은지 생각해 봐요. 가장 가보고 싶은 전생을 골라 봐요.」 「흠・・・・・・ 내가 가장⋯⋯⋯⋯ 영웅적인 삶을 살았던 때가 궁금하네요.」 - P20
「네, 109번에 불이 들어왔어요.」 (중략). 「어서 열어 봐요, 겁내지 말고, 제가 여기 있고, 우리모두 당신 곁에 있어요. 혼자 내버려 두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 P21
2 「......내 손인데......」 르네는 눈앞에 보이는 대로 관객들에게 묘사해 나가기 시작한다. (중략). 그의 주변에 똑같은 청회색 제복을 입은 사내들이 여러 명 눈에 들어온다. 역사 전공자인 르네는 그 제복이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프랑스 군인들이 입었던 군복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 P22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군모를 쓰고 견장을 단 부사관 하나가 점호 시작을 알린다. 이름들과 성들이 낱알처럼 공중으로 흩어진다. <상병 이폴리트 펠리시에>가 들리는 순간 르네는 흠칫하며 저도 모르게 대답한다. 「넷!」르네는 지금 와 있는 <지난 생>에서 자신의 <지난 이름>이 이폴리트 펠리시에라고 추론한다. - P23
「만나서 반갑다, 제군. 나는 니벨 장군이다.」 이 유명 지휘관의 명성을 익히 들어 온 병사들이 압도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본다. 「오늘 1917년 4월 16일, 랑시(市) 인근 이곳에서 아군은 독일군의 저지선을 뚫기 위한 공격을 개시한다. 적은슈맹 데 담에 저지선을 구축하고 있다. 보병대가 선두에 나서 3분에 1백 미터씩 전진하며 공격을 이끌 것이다. 비슷한 여건의 베르됭 전투에서 두오몽 요새를 수복했을때보다 조금 더 빠른 속도가 될 것이다. 그때 우리를 승리로 이끌었던 전술을 이번에도 똑같이 쓰려고 한다. 한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 전투에는 슈나이더 전차를투입해 배후의 적군을 포격함으로써 보병대의 공격 부담을 덜어 줄 거라는 점이다. 일몰 전에 랑 남쪽에 도달하는 것이 목표다.」 - P25
중사가 악을 쓰듯 호령한다. 「공격 태세 돌입!」 병사들이 용기를 내기 위해 럼주를 채운 수통을 들고 벌컥벌컥 마시기 시작한다. 이폴리트의 수통에는 시칠리아산 적포도주가 채워져 있다. - P27
사기충천한 아군 보병 부대가 다시 비탈을 오르기 시작한 지 몇 분도 지나지 않아 독일군 기관총 진지에서 불이 뿜어져 나온다. 선두에 위치한 병사들이 우수수 쓰러진다. 이폴리트는 전우들과 함께 낮은 포복으로 땅을 기면서 독일군 사격호 너머 짙은 색깔의 철모들을 조준 사격하기 시작한다. - P28
청회색 군복들이 찰박찰박하며 진탕을 뛰어가기 시작한다. 총알이 비 오듯 쏟아지고 아군이 짚단처럼 쓰러진다. 중사가 빽빽 소리를 지른다. 「전진! 빌어먹을! 전진하라니까!」그가 독기를 품고 악을 쓴다. 「되돌아오는 비겁한 놈은 비탈 아래 특별히 배치된 기록류관총 세례를 받게 될 것이다. 요행히 살아남아도, 이탈한높은 총살을 면치 못할 것이다!」 - P29
병사들이 상관의 명령대로 교전을 벌이는 사이 날이훤하게 밝아온다. 비탈 아래서 등장한 적들은 모두 소탕했지만 아군은 전력에 막대한 타격을 입고 사상자는 어마어마하다첫 번째 공세에서 부대원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이폴리트는 영웅은커녕 쫓기는 짐승의 다급한 처지가 된다. 신속한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 - P30
이폴리트는 굴 안으로 상체를 넣는다. 계단을 몇 개내려가자 천장을 가로대로 떠받쳐 놓은 지하 통로가 나온다. 프랑스군의 포격을 피하고 접전 시 필요에 따라 신규병력을 투입하기 위해 독일군이 오래전부터 이곳에 거미줄처럼 땅굴을 파놓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 - P31
그들은 헐떡거리며 숨을 몰아쉰다. 무기를 휘두르며거리를 지킨 채 공격 기회를 노린다. 체격과 힘에서는 유리하지만 민첩성이 부족한 상대의 약점을 이용해 이폴리트가 독일군에게 여러 번 창상을 입힌다. 하지만 두툼한지방이 방패 역할을 하는 그의 몸속 깊이 칼을 찔러 넣기는 역부족이다. - P32
이폴리트가 상대의 목을 움켜잡은 손에 다시 필사적으로 힘을 준다. 하지만 이내 힘이 풀리고, 칼끝은 그의 오른쪽 눈에 와 박힌다. 빠삭 하는 소리와 함께 칼이순식간에 두개골을 통과해 지나간다. - P33
3
르네 톨레다노는 소스라치며 눈을 번쩍 뜬다. 한쪽 눈이 실쭉실쭉한다. 최면사가 다급히 소리친다. 「안 돼요! 아직 눈을 뜨면 안 돼요! 최면에서 깨어날때는 잠수에서처럼 단계를 밟아야 해요. 다시 눈을 감아요.」르네는 들은 체 만체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다. - P34
애초에 내가 최면에 응한 게 잘못이었어. 그녀가 한 일이라곤 악몽을 꾸는 내 모습을 관음증에 걸린 관객들에게 보여 준 것뿐이야 사람들 눈에 내가 얼마나 불쌍하게 비쳤을까. - P35
스킨헤드가 칼을 훅 내찌른다. 르네가 본능적으로 몸을 피하는 중에 칼끝이 손등을 스친다. - P36
르네가 바닥에 떨어진 칼을 힘껏 차서 강물로 날려 버린다. 스킨헤드가 씩씩거리면서 독일어로 욕을 내뱉더니성난 황소처럼 몸을 구부려 달려들 태세를 갖춘다. 그가장딴지에 붙은 칼집에서 이번에는 칼날이 더 넓고 긴 칼을 하나 꺼내 든다. 인간 수컷들의 싸움이 재미난 구경거리라도 된다는 듯 강둑을 돌아다니던 쥐들이 모여들기시작한다. - P37
온다. 르네가 득달같이 달려들어 그의 손목을 꺾고 칼끝이 반대로 향하게 돌려놓는다. 서슬에 놀란 그가 바닥에넘어지는 순간 칼이 가슴에 박힌다. (중략). 르네는 상대가 죽은 척하는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면서조심스럽게 다가가 몸을 뒤집어 본다. 스킨헤드는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미동도 하지 않는다. - P38
그가 스킨헤드의 시체를 멀뚱히 내려다보며 서 있다. 아냐, 경찰에서 내 말을 믿어 줄 리 없어. 내가 노숙자를 찔러죽였다고 할 거야. 정당방위를 입증할 증거도 없어. 손에 입은 상처를 보여 줘도 코웃음을 치면서 단순한 찰과상이라고 우길 거야. 아무리 샅샅이 둘러봐도 목격했을 만한 사람은 주위에 보이지 않는다. -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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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는 적에게 쫓기듯이 집으로 뛰어 들어가 문을 쾅닫는다. 그는 자물쇠를 모두 잠그고 문에 기대서서 가쁜호흡을 가다듬는다. 파리 15구 샤를미셸역 근처 작은 건물 8층에 있는 자기 아파트의 낯익은 풍경 속으로 들어오고 나니 안도감이 든다. - P41
「나는 누구지?」 그는 마치 거울 속의 사람과 대화하듯묻는다. 내가 아닌 것 같아. 거울 속에 보이는 이 사람은 누굴까? 이게나란 말이야? 내가 어떻게 이 몸과 이 얼굴을 갖게 됐을까? 과연 이 외피가 내가 진정 누구인지 말해 줄 수 있을까? 스스로 영웅이라고 자부하지만 괴물에 불과한 이자는 누굴까? 다 그놈의심층 기억 때문이야. 그 비밀의 동굴에 들어가지 말았어야 했는데. 구역질이 인다. 「나는 누구였을까?」 그는 소리 내어 묻는다. - P42
「(전략). 이 사건은 우리에게 한 가지 시사점을 준단다.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가 아니라 역사가들이 무엇을 기술했는지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말이지.」 「그럼 역사가들이 제일 힘이 세요? 그래서 아빠도 역사를 전공했어요?」 - P45
「쥘 미슐레도 마찬가지란다. 너도 알다시피 그가1840년에 집대성한 프랑스 역사는 우리한테 절대적 권위를 가진 교과서로 인식돼 있지. 하지만 그가 제멋대로역사를 해석했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어떤 전투가 중요한지, 어떤 왕은 위대하고 어떤 왕은 별 볼 일 없는지, 그가 선택하고 자의적으로 판단해 썼다는 뜻이야. 자신의 정치적 비전에 부합하게 왜곡했다는 거야. 하지만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단다.」 - P46
하루는 어린 르네가 에밀에게 물었다. 「아빠, 이 얘기들을 왜 수업에서는 해주지 않아요?」에밀이 아들을 진지하게 쳐다보면서 입을 뗐다. 「아빠 말을 잘 기억해 두렴. 진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사람들에게 다짜고짜 얘기해 줄 수는 없단다. 거짓에익숙해진 사람들의 눈에는 진실이 의심스럽게 보이기 마련이거든.」 - P47
(전략). 오늘 초저녁까지만 해도 그는 난파자처럼 기억의 옛목을 붙잡고 조용히 살고 있었다. 어제와 오늘이 다르지않은 착실한 공무원, 엘로디의 친구, 상사들의 인정을 받는 열정 넘치는 역사 교사, 알츠하이머라는 다모클레스의 검을 머리에 이고 살아가는 미래의 퇴직자. 그런데 바로 한 시간 전에 그 빌어먹을 <심층 기억>이예기치 않게 등장하는 바람에 자신의 숨겨진 단면을 발견하게 됐다. - P49
르네는 인터넷을 뒤져 제1차 세계 대전 공식 사망자명단을 찾아낸다. 거기에서 슈맹 데 담 전투에 참전해23세의 나이로 전사한 이폴리트 펠리시에 상병의 이름을 발견한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사진이 있는지 확인하려고 클릭하는 순간, 퇴행 최면의 거울 속 얼굴과 똑같은 얼굴이모니터에 나타난다. 똑같은 회색 눈, 콧수염, 얇은 입술, 턱 보조개까지. 르네는 이폴리트 펠리시에 상병의 복무기록을 읽어 내려간다. -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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므네모스: 망각의 여신 레테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밤의 여신 닉스에게는 쌍둥이 아들인 잠의 신 히프노스(최면이라는 단어의 어원이됨)와 죽음의 신 타나토스(<타나토노트> 같은 단어의 유래가 됨)가 있다. 잠에서 깰 수 있고 없음이 이 두 형제사이의 미묘한 차이점이다. (후략). - 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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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어제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질렀으니 경찰이 집으로 들이닥치는 건 시간문제야. 아니, 일부러 직장에서 날 체포할지도 몰라. 학생들이 다 지켜보는 앞에서 선생인 사람이 자신도 통제하지 못하고 충동에 휩쓸려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질렀으니, 망신도 그런 망신이 없지. 자신을 드러내는 걸 싫어하는 그는 신문 머리기사의주인공이 된 상상을 하며 몸서리친다. - P56
르네는 가슴을 쓸어내린다. 다행히 아직 센강에 시신이 떠올랐다는 뉴스는 들리지 않는다. 영영 발견되지 않을지도 몰라. 혹시 발견돼도 기삿거리가 되지 않을 수도 있고, 술에 취한 노숙자가 강에 빠지는 일이야 종종 일어나니까. 그 일은 내 기억 속에만 존재할 뿐이야. 내가 잊어버리기만 하면 돼. 그럼 그 일은 일어나지 않은 게 될 거야. 심사가 복잡한 상태에서 운전을 하던 그는 오른쪽에서 나타나는 차를 미처 보지 못해 추돌 사고를 일으킬 뻔한다. 운전자가 차 창문을 내리고 그에게 욕을 해댄다. -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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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톨레다노가 조니 알리데 고등학교의 주차장에차를 세우고 건물을 향해 걸어간다. 건물 입구에는2017년에 사망한 청소년들의 우상이었던 인물의 동상이 서 있다. - P61
그는 교실로 들어가 교단 위로 올라간다. 첫 수업을 듣는 학생 서른한 명이 벌써 자리에 앉아 기다리고 있다. 학생들이 그를 쳐다본다. 그를 이전에 본 적이 없더라도분명히 정상이 아니라고 느낄 것이다. 앞에 서 있는 선생이 창백한 얼굴에 퀭한 눈을 실쭉거리며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다는 사실을 당연히 눈치챘을 테니까. - P63
「여러분과 6월까지 함께 공부하게 됐습니다. 별 탈 없이 마무리할 수 있길 바랍니다. 학년 말에 바칼로레아가있으니까 말이에요. 준비 없인 당연히 합격이 불가능하다는 걸 명심하길.」 - P63
「교과서에 실린 공식 역사조차 자의적인 재단(裁斷)의 결과물인 경우가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는 글자를 가졌던 문명들이 남긴 흔적이죠. 그중에서도 또 역사가들이 존재했던 문명들이 전하는 과거가 전부예요. 게다가 모두 승자들의 버전이고」 「그 이유가 뭐죠, 선생님?」 맨 앞줄에 앉은 여드름 빼곡한 열성적인 남학생이 묻는다. 「전쟁에서 벌어진 이야기를 죽은 사람이 들려주는 경우는 극히 드무니까」 - P67
도수 높은 두꺼운 안경 속에서 눈이 뱅글뱅글 돌고 있는 앞줄의 또 다른 남학생 하나가 손을 든다. 「지금 말씀하신 건 다 너무 원론적인 내용이에요. 구체적인 예를 하나 들어 주실 수 있나요?」 - P69
르네가 학생들을 쳐다보며 알 듯 말 듯한 소리를 한다. 「실제 벌어진 역사와 기술된 역사, 피지배자의 역사와지배자의 역사는 차이가 있습니다. 정치에서 기억은 사활이 걸린 문제예요. 그래서 수많은 정치인이 기억을 거머쥐고, 자신들한테 유리하게 주물러 빚으려고 하는 거죠」 「그런데, 선생님.」 한 학생이 말꼬리를 문다. 「선생님얘기를 듣고 교과서에 없는 엉뚱한 얘기를 적으면 바칼로레아에서 떨어질 텐데요.」 - P71
「진실을 아는 것보다 바칼로레아에 합격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말이니?」 - 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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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를 알리는 종이 울린다. 점심시간. (중략). 르네는 식당 오른쪽 구석, 늘 가는 제일 조용한 자리에앉아 있는 엘로디 테스케를 발견한다. 「안색이 창백한데, 잠을 못 잤어? 」그녀가 다가오는 르네를 보면서 묻는다. - P74
「있잖아, 내가...………」 그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우물쭈물한다. ・・・・・・사람을 죽였어. 「......어제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괴물이 되고 말았어. 다들 얼마나 한심하게 여겼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해.」 - P75
「있잖아, 우리가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전생들이 현재의 삶을 <오염시킬 수 있어서 그런 거야. 내 경우에도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병사로 살았던 삶이 다시 떠오르고 나서, 내가・・・・・・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졌잖아.」 「그건 나도 봤지.」 「그것 때문에 어젯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어.」 엘로디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입을 삐죽 내민다. - P76
「어제 한 퇴행 최면 실험으로 나는 금지된 경계선을넘었어. 그래서・・・*****괴물이 튀어나왔고, 나는 그 통제 불가능한 괴물의 포로가 됐어.」 생물과 지구과학을 가르치는 엘로디가 그를 향해 <농담이지?> 하는 표정을 짓는다. 그녀가 할 말이 있는 듯 잠깐 입술을 들먹이더니 의자를 뒤로 밀면서 일어난다. - P77
「뭐, 좋은 학생이긴 하겠지만 좋은 인간인지는, 글쎄, 두고 봐야지. 어쨌든 애들이 자율적 사고의 중요성을 몰라! 시험에 붙기 위해 그저 수업에서 들은 얘기를 외워서말할 뿐이야. 애들 머릿속에는 바칼로레아 생각밖에 없어. 자기 조상들한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안중에도없다고. 내가 가르치는 게 그 조상들의 얘기라는 것조차모를걸.」 - P78
「이폴리트의 삶을 다시 살고 보니 조금이라도 독일을연상시키는 건 왠지 기분 나쁘게 느껴지네.」 그녀는 맥주를, 그는 적포도주를 한 잔씩 집어 든다. 르네가 말끝을 잇는다. 「마치 테스토스테론이 과잉 생성되고 있는 것처럼 전에 없던 공격성을 느껴. 전투 중인 군인들이 그렇다잖아. 내가 정말로 참전이라도 한 것처럼 그 호르몬이 내 몸에남아 있는 것 같아. 그래서 잠을 못 잤나 싶기도 해.」 -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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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의 엘로디 테스케는 반에서 제일 예쁜 아이가 되고 싶었다. 부모님을 졸라 인형처럼 옷을 입어도 성에 차지 않았다. 모든 사람의 부러움을 사는 아름답고 완벽한 몸을 가지고 싶었다. 늘씬하고 긴 다리에 호리호리한 몸으로 포즈를 취하는 잡지 표지 모델의 몸을 꿈꾸며소녀는 먹은 음식을 게워 내고 수시로 완하제를 복용했다. -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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