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차
1925년 우메하치 공장에서 만들어진 C51형 기관차는 같은시기, 같은 공장에서 제작된 3등 객차 3량과 식당차, 2등 객차, 2등 침대차 각각 1량씩. 그 외 우편물이나 짐을 싣는 화차3량, 모두 아홉 칸에 얼추 200명 남짓한 승객과 십만을 넘는통신, 이에 얽힌 숱한 가슴 아픈 사연들을 싣고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오후 2시 반이면 피스톤을 흔들거리며 우에노에서 아오모리를 향해 달렸다. - P84
바로 작년 겨울, 시오타가 데쓰 씨를 고향으로 돌려보냈을 때의 일이다. 데쓰 씨와 시오타는 같은 고향에서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낸 듯하고, 나도 시오타와 고등학교 기숙사에서 한방을 쓴 사이다 보니, 가끔씩 연애 이야기를 들었다. - P85
그럭저럭 나도 시오타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함께 도쿄에 있는 대학에 들어갔다. 그 후 삼 년이 지났다. 이 기간이 내겐 힘든 시절이었지만 시오타는 그렇지 않았던 듯, 매일 태평스레 지낸 것 같다. 내가 처음 방을 빌린 집이 대학 바로 근처였기 때문에, 시오타는 입학 당시엔 그나마 두세 번 들르기도했지만, 환경도 사상도 소리를 내며 상반되어 가는 두 사람에게 예전처럼 거리낌 없는 우정은 도저히 바랄 수 없었다. - P85
그 무렵은 나도 어떤 못 배운 시골 여자와 결혼했고 새삼시오타의 그 사건에 가슴 설레는 풋풋한 기분을 점차 상실해가던 터였으므로, 시오타의 갑작스런 방문에 얼마간 허둥거리면서도 그가 방문한 저의를 꿰뚫어 보는 걸 잊지 않았다. 한소녀의 출분을 친구들에게 퍼뜨리고 다니는 일은 얼마나 그의 자존심을 만족시켰던가. - P86
103호 열차는 차가운 빗속에서 검은 연기를 토하며 발차시각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열차 창문을 하나하나 꼼꼼히 찾아다녔다. 데쓰 씨는 기관차 바로 옆 3등 객차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삼사 년 전 시오타의 소개로 한 번 만난 적이 있지만, 그때에 비해 낯빛이 무척 하얘지고 턱 언저리도 통통하니 살이 올랐다. - P87
데쓰 씨와 아내는 날씨에 대해 두세 마디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대화가 끝나 버리자, 다들 한층 하릴없이 무료해졌다. 데쓰 씨는 창가에 얌전하게 올린 토실한 손가락 열 개를 괜스레 구부렸다 폈다 하면서, 한곳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 P87
나는 전기 시계 근처에 멈춰 서서 열차를 바라보았다. 열차는 비에 흠뻑 젖은 채, 검푸르게 빛났다. (중략). 몇 해 전 나는 어느 사상 단체에 잠시나마 관계한 적이 있고 그 후 얼마 못 가 변변찮은 변명을 내세워 그 단체와 헤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병사를 눈앞에서 지켜보고, 또한 창피를 당하고 더럽혀진 채 귀향하는 데쓰 씨를 바라보노라니, 나의 그런 변명이 서고 안 서고를 따질 상황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 P88
(전략). 그러나 미련스러운아내는 열차 옆구리에 내걸린 파란 철판에 물방울이 그득한문자를 요즘 갓 얻은 어설픈 지식으로, FOR A-O-MO-RI, 하고 나직이 읽고 있었다. - P89
참새
이부세 마스지¹에게. 쓰가루 말로
1) 井伏鱒二(1898~1993). 소설가. 학창 시절, 이부세의 단편 「도롱뇽을 읽고 감명받은 다자이는 그를 찾아갔으며, 두 사람은 일본 문단의 대표적인 사제지간으로 남아 있다. - P112
한 무리 아이들, 드넓은 벌판에서 불장난에 푹 빠져 있었어. 봄이 되자 눈 녹아 넓디넓은 눈벌판 여기저기, 너른 들판누르스름한 잔디밭, 푸른 새싹 돋아나, 우리 고향 아이들, 누르스름하게 시든 잔디에 불 질러, 들불놀이 했어. 그리고 서로제각기 들불을 만든 아이들, 두 편으로 나뉘었어. 한쪽씩 대여섯 명, 소리 맞춰 노래했어. - P113
이렇게 노래하자, 건너편에서 구슬픈 가락으로 다시 노래했어-삼나무 불붙어 갈 수가 없어. 그러자 이쪽 편에서는 더더욱 갖고 싶어 노래했다. -그 불 피해 날아서 오렴. 건너편에서 참새 한 마리 풀어 보내 줬어. 다키는 참새, 양쪽 팔을 날개처럼 펼쳐 팔락팔락팔락, 날갯짓 소리를 입으로 흉내 내며 뜨거운 들불 피해 날아 왔다지. 이건 우리 고향, 아이들 놀이야 - P114
다키를 갖고 싶어 했어. 가운데 참새 다키, 노랗게 타오르는들불 너머로 밉살맞은 마로사마를 째려봤어. 마로사마, 너글너글한 목소리로 다시 노래했어. -가운데 참새 갖고 싶어. 다키는 아이들에게 뭔가 소곤소곤 이야기했어. 아이들, 그걸 듣고 키득키득 웃으며 노래했어. - P115
어느덧 밤이 되었어. 들판은 어둑해지고 추워졌어. 아이들은 제각기 집으로 돌아가고, 제각기 할머니의 고타쓰 속으로 기어들었어. 늘 밤이면 밤마다 똑같은 옛이야기를 하고, 듣는거야. - P116
여행
나비
노인은 아니었다. 스물다섯을 넘겼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역시 노인이었다. 보통 사람의 일 년 일 년을, 이 노인은 넉넉히세 배로 살았다. 두 번, 자살에 실패했다. 그중 한 번은 정사(情死)였다. 세 번, 유치장에 들어갔다. - P197
노인은 지금, 병상에 있다. 방탕에서 얻은 병이었다. 노인에겐 생활이 궁하지 않을 정도의 재산이 있었다. 하지만 방탕하게 돌아다니기에는 부족한 재산이었다. 노인은 지금 죽는 걸억울하게 여기지 않았다. 근근이 이어 가는 생활을, 노인은 이해할 수 없다. - P198
먹고 싶은 건 뭐든지, 라고 하자, 팥죽, 하고 대답했다. 노인이 열여덟 살에 처음 소설이라는 걸 썼을 때, 임종의 노인이 팥죽을 먹고 싶다고 중얼거리는 묘사를 한 적이 있다. 팥죽은 만들어졌다. 죽에 삶은 팥을 뿌리고, 소금으로 맛을 낸 거였다. 노인 고향의 맛있는 음식이었다. 눈을 감고 똑바로 누운 채 두 숟가락 후루룩 먹고는, 그만 됐어, 했다. 그 밖에 다른 건? 하고 묻자, 씩 웃으며, 바람피우고 싶어, 라고 대답했다. - P198
도적
올해 낙제가 뻔했다. 그래도 시험은 본다. 보람 없는 노력의아름다움. 나는 그 아름다움에 마음이 끌렸다. 나는 오늘 아침만큼은 일찍 일어나 참으로 일 년 만에 학생복을 걸치고, 국화 문장(紋章)이 빛나는 크고 높다란 철문 안으로 들어갔다. 쭈뼛쭈뼛 들어갔다. 곧장 은행나무 가로수가 있다. - P199
찌푸린 하늘 아래 연못 수면은 하얗게 빛나고, 간지러운 듯 잔물결이 일렁거렸다. 오른발을 왼발 위에 가볍게 얹고 나서, 나는 중얼거린다. -나는 도적. 앞의 샛길을 대학생들이 한 줄로 나란히 지나간다. 끊임없이 줄줄 흐르듯 지나간다. 모두가 고향의 자랑. 선택받은 수재들, 노트의 똑같은 문장을 읽고, 그걸 너나없이 모든 대학생들이 한결같이 암기하려고 애썼다. - P200
나는 오늘 처음, 이 남자를 보았다. 몸집이 상당히 컸고, 나는 그의 미간 주름에 나도 모르게 위압감을 느꼈다. 이 남자의 제자로는, 일본 제일의 시인과 일본 제일의 평론가가 있다. 일본 제일의 소설가. 나는 그걸 생각하고, 몰래 뺨이 화끈거렸다. - P201
칠판에는 프랑스어가 대여섯 줄. 교수는 교단의 팔걸이의자에 추레하게 앉아, 자못 언짢은 듯 단언했다. -이런 문제로는 낙제하고 싶어도 못 하겠지. 대학생들은 낮게 힘없이 웃었다. 나도 웃었다. 교수는 그러고 나서 도통 알 수 없는 프랑스어를 두세 마디 중얼거리더니, 교단의 책상 앞에서 뭔가를 쓰기 시작했다. - P201
선생님, 낙제만은 면하게, 따위는 쓰지 않는다. 두 번 되풀이해서 읽어 잘못 쓴 데가 없음을 확인하고 나서, 왼손엔 외투와 모자를 들고 오른손엔 한 장의 답안을 들고 일어섰다. 내 뒤의 수재는 내가 일어선 탓에, 몹시 허둥거렸다. - P202
- 나는 도적. 희대의 반골. 일찍이 예술가는 사람을 죽이지않는다. 일찍이 예술가는 물건을 훔치지 않는다. 나. 하찮고 약삭빠른 동료. 대학생들을 잇달아 밀어제치고, 간신히 식당 입구에 다다랐다. 입구에 붙여 놓은 작은 쪽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 오늘, 여러분의 식당도, 외람스럽습니다만 창업 3주년을맞았습니다. 이를 축하하는 의미에서 조촐하나마 봉사해 드리고자 합니다. - P203
결투
외국 흉내를 낸 게 아니었다. 과장이 아니라, 상대를 죽이고 싶다고 소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동기는 심각하지 않았다. 나를 꼭 빼닮은 남자가 있어, 이 세상에 똑같은 건 두 개는 필요 없다는 생각에서 서로 미워한 것도 아니고, 그 남자가내 아내의 옛 애인인 데다 만날 두 번인가 세 번 그 사실을 상세히 자연주의풍으로 이웃 사람들에게 떠벌리고 다니기 때문도 아니었다. - P204
나는 카페에 들어가서도 결코 기세 좋게 굴지 않았다. 방탕에 지친 척했다. 여름이면, 시원한 맥주를, 이라 했다. 겨울이면, 따끈한 술을, 이라 했다. 내가 술을 마시는 것도 단지 계절 탓이라 여기게 했다. 마지못한 듯 술을 씹어 넘기면서, 나는 미인 여급에겐 눈길도 주지 않았다. - P203
결투의 밤, 나는 ‘해바라기‘라는 카페에 들어갔다. 나는 기다란 감색 망토를 걸치고 새하얀 가죽 장갑을 끼고 있었다. 나는 한 카페에 연달아 두 번은 가지 않았다. 으레 오 엔짜리 지폐를 내는 걸 수상쩍게 여길까 두려웠다. ‘해바라기‘ 방문은 두 달 만이었다. - P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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