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도착
K가 도착한 때는 늦은 저녁이었다. 마을은 눈 속에 깊이 잠겨 있었다. 성이 있는 산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안개와 어둠이 산을 둘러싸고 있었고, 그곳에 큰 성이 있음을 암시하는 아주 희미한 불빛조차 눈에 띄지 않았다. K는 국도에서 마을로 이어진 나무다리 위에 서서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허공을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 P7
K는 몸을 반쯤 일으키고 머리를 단정하게 매만지고 나서, 두 사람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내가 길을 잃은 모양인데 여기가 무슨마을인가요? 이곳에 성이 있다는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젊은이는 천천히 말했고,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K의 무지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베스트베스트¹ 백작님의 성입니다."
1 독일어로 ‘서쪽‘을 의미하는 ‘베스트‘(West)가 두번 중복된 이름이다. 일반적으로 서쪽은 ‘몰락‘ ‘쇠락‘을 의미하지만, 서구사회에 동화되고자 했던 동구 유대인들의 방향성을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혹은 이스라엘의 성전에서 신이 임재하는 지성소로 들어가는 방향을 암시하는 단어로 볼 수도 있다. - P8
"그렇다면 나도 가서 허가를 받아와야겠군요." K는 하품을 하면서 이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듯 이불을 걷어 젖혔다. "그래, 도대체 누구한테서 받는다는 거죠?" 젊은이가 물었다. "백작님한테서 받아야겠죠." K가 말했다. "다른 방도가 없는 것같군요." "이 한밤중에 백작님의 허가를 받아오겠다고?" 젊은이는 이렇게 소리치며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안된다는 거요?" K는 태연하게 물었다. "그렇다면 왜 나를 깨운거요?" 이에 젊은이는 화가 치밀어 제정신이 아닌 듯했다. "아주 부랑자 짓을 하는군!" 그가 소리쳤다. - P9
K는 유난히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고, 다시 자리에 누워 이불을 끌어당기며 말을 이었다. "젊은이, 도가 좀지나치군요. 당신 행동에 대해서는 내일 다시 따질 거요. 혹시 내게 증인이 필요하다면, 주인장과 여기 있는 분들이 증인이 될 거요. 그런데 말이 나온 김에 사실을 말하면, 나는 백작님의 초빙을 받은 토지 측량사²요. 내 조수들은 필요한 도구를 마차에 싣고 내일 도착할 거요. 나야 눈 속을 헤치고 걸어오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는데, 몇차례 길을 잃고 헤매는 바람에 이렇게 늦은 시각에 도착한 거요. 나의 도착을 성에 알리기에는 너무 늦은 시각이라는 건 당신이 가르쳐주기 전에 나 스스로 잘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여기 이런 곳에 투숙하는 걸로 만족한 것인데, 당신은 좋게 말해 그마저방해하는 무례함을 보인 거요. 내 설명은 이게 다요. 안녕히 주무세요, 여러분." K는 이렇게 말하고 난로 쪽으로 몸을 돌렸다. "토지 측량사라고?" 그의 등 뒤에서 머뭇머뭇하며 묻는 소리가 들리더니 모두 잠잠해졌다.
2 토지 측량사(독일어로는 ‘Landvermesser)라는 뜻의 히브리어는 ‘maschoach‘로 ‘maschiasch‘ (메시아)와 유사하다. 카프카가 유대교에 대한 이해가 있었음을 감안하면 언어유희로 볼 수 있으며, K의 태도에서 ‘메시아‘ 의식이 엿보이기도한다. - P10
"내가 전화를 걸어 물어봐야겠어요." 뭐라고, 이런 시골 여관에 전화가 있다는 거야? 시설이 꽤나 잘되어 있었다. 하나하나 따져보면 K에게는 놀랄 일들이었지만, 전반적으로는 그가 기대했던 바였다. 전화기는 바로 그의 머리맡에 설치되어 있었는데, 졸음에 취한 상태여서 미처 보지 못했던 모양이다. - P10
성 관리인은 이미 잠자리에 든 상태였으나, 프리츠라는 하급 관리인 하나가 전화를 받았다. 젊은이는 슈바르처라고 자신을 밝히고, K를 발견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행색이 몹시 남루한 삼십대 남자 하나가 근처에 옹이가 돋은 지팡이를 하나 두고 자그마한 배낭을 베개 삼아 짚 매트리스에서 태평스럽게 자고 있다. 너무도 수상해 보이는데, 여관 주인이 의무를 소홀히 한 게 뻔해서 슈바르처 자신에게 이 사안을 제대로 알아볼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 P11
이어 모든 것이 정적에 잠겼다. 저쪽에서는 프리츠가 사안을 알아보고, 이곳 여관에서는 사람들이 대답을 기다렸다. K는 누운 자세 그대로 몸도 뒤척이지 않고 별 관심 없다는 듯 멍하니 앞을 바라보았다. 악의와 신중함이 뒤섞인 슈바르처의 진술을 들으며 K는성에서는 슈바르처 같은 하찮은 인물들도 어느정도 외교적 소양을갖추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 P11
(전략). 그는 수화기에서 들려오는 다소 장황한 설명을 듣더니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착오가 있었다고요? 이거 정말 난감한 일이군요. 사무국장이 직접 전화를 했다는거죠? 참 이상한 일이군요. 그렇다면 이제 토지 측량사에게 뭐라고설명해야 되죠?" K는 귀를 기울였다. 그러니까 성에서는 그를 토지 측량사로 임명한 것이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그에게 불리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성에서 그에 대해 필요한 사항은 모두 알고 있고, 또 벌써 판세를 저울질한 상태에서 미소를 머금고 그의 도전을 받아들였음을보여주기 때문이다. - P12
"나는 아직 백작님을 알지 못합니다." K가 말했다. "백작님은 홀륭하게 일을 해내면 보수를 후하게 준다고 하던데, 사실인가요? 나처럼 아내와 자식을 두고서 멀리 떠나온 사람이라면 한몫 잡아 돌아가고 싶은 법이죠." "그 점이라면 선생은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보수가 박하다는 불평은 듣질 못했거든요." "그런데 말이오." K가 말했다. "나는 천성이 소심한 사람이 아니라 백작님이라고 해도 내 의견을 당당히 말씀드릴 수 있어요. 하지만 신사 나리들과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 당연히 낫겠지요." - P13
K는 그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려야 했다. 그래서 시계를 보며 말했다. "이제 곧 내 조수들이 도착할 텐데 그들도 여기 묵게 해줄 수 있죠?" (중략). "아직 확실하지 않아요." K가 말했다. "우선은 성에서 내게 어떤일을 맡기려는지 알아야 해요. 예를 들어 성 아래 이곳 마을에서 일하게 된다면, 마을에 머무는 것이 더 적절하겠지요. 그리고 저 위성에서의 생활이 안 맞을지도 모르죠. 언제나 자유롭게 살고 싶은사람이라서요." - P14
"저 사람은 누구인가요?" K가 물었다. "백작님인가요?" K는 그림 앞에 서서 주인 쪽은 돌아보지 않았다. "아니요." 주인이 말했다. "성의 관리인입니다." "성에는 정말 용모가 수려한 관리인이 있군요." K가 말을 이었다. "그런 관리인이 버릇없는 아들을 두었다니 유감이네요." "그렇지 않아요." 주인은 K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고는 귓속말로 속삭였다. "슈바르처는 어제 좀지나쳤어요. 그의 아버지는 하급 관리인에 불과해요, 가장 하급에 속하죠." 그 순간 K는 주인이 마치 어린아이처럼 여겨졌다. -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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