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te 1950년 11 월 26 일
애초에 일기장을 산 것 자체가 실수였다. 그것도 아주 큰 실수. 하지만 후회해봤자 소용없다. 이미 물은 엎질러졌으니까.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일기장을 산 건지 모르겠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다. 처음부터 일기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아니었다. - P9
내가 일기장을 사게 된 사연은 이렇다. 보름 전 일요일, 나는 아침 일찍 남편에게 담배를 사다주기 위해 집을 나섰다. 일요일마다 늦잠을 자는 남편이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바로 볼 수 있게 침대 머리맡 탁상 위에 담배를 놓아두고 싶었다. - P9
담배 가게에는 손님이 많았다. (중략). "저 공책도 한 권 주세요." 나는 돈을 꺼내려고 핸드백을 뒤지며 말했다. 고개를 들자 담배 가게 주인이 엄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안 됩니다. 금지된 일이거든요." 그는 자기가 팔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일요일마다 담배 외에 다른 물건을 판매하지는 않는지 확인하려고 경찰이 가게 주변을 어슬렁거린다고 해명했다.* 때마침 가게에는 나밖에 없었다.
*1950년대 이탈리아에서는 담배 가게와 문방구의 공정한 경쟁을 위해서 일요일에는 담배 가게에서 담배 이외의 상품을 판매 금지하는 법이 있었다. - P10
그러자 가게 주인은 주변을 둘러보더니 재빨리 공책 한 권을 집어 들고 계산대 너머로 건네주었다. "코트 아래에 숨겨요." 나는 공책을 코트 아래 숨긴 채 집으로 향했다. 건물을 관리하는 여자가 가스관 이야기를 하는 내내 행여나 공책을 떨어뜨릴까 두려웠다. - P11
그렇다고 침대 머리맡 탁상 서랍에 넣어두면 미켈레의 눈에 띌 수 있으니 곤란했고, 책상은 이미 리카르도가 독차지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집에는 나만을 위한 서랍이나 물건을 보관할 수 있는 공간이 하나도 없다. 이제부터라도 내 권리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P11
Date 12월 10일
2주 넘게 한 글자도 못 쓰고 일기장을 감춰만 두었다. 가족들에게 들키지 않을 곳을 찾기 위해 보관 장소를 바꾸느라 첫날부터 애를 먹었다. 리카르도가 공책을 발견하면 대학교 강의 노트로 쓰겠다고 가져가버릴 것이다. 미렐라 눈에 띄면 일기장으로 쓰겠다고 제 방 서랍에 넣고 열쇠로 잠가버릴 것이다. - P13
나는 축구 경기 티켓 세 장을 구입한 뒤 직장 동료에게서 선물받았다고 거짓말을 했다. 티켓을 사기 위해 생활비도 줄여야 했으니 이중으로 거짓말을 한 셈이다. (중략). 남편과 아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들이 축구 경기를 보러 가는 것이 아니라 셋이 내가 파놓은 함정을 향해 달음박질치는 것만 같았다. 남편과 아이들이 웃으며 서로를 바라보는 모습을 보니 후회감이 밀려오면서 가슴이 아렸다. - P14
문제는 막상 나만의 비밀 장소에서 일기장을 꺼내 들고 글을 쓰기 위해 자리를 잡고 앉으면 굳이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고단한 일상 외에는 쓸 말이 없다는 사실이다. 지금은 일기장을 겨울 옷을 보관해두는 오래된 여행 가방 속에 숨겨두고 있다. - P14
"우리 엄마가 오늘 기분이 왜 안 좋으실까?" 남편의 말을 들으며 마흔 줄을 넘긴 여자들이 으레 그렇듯 나 역시 과민하고 신경질적으로 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남편도 그렇게 생각할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깊은 수치심이 몰려왔다. - P15
Date 12월 11일
어제 쓴 일기를 다시 읽어보니 내 성격이 변하기 시작한 것이 남편이 장난스레 나를 ‘엄마‘라고 불렀을 때부터가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미켈레가 나를 그렇게 불렀을 때는 기분이 좋았다. 이 집에서 인생이 무엇인지 아는 유일한 어른이 된 것 같았으니까. - P16
미켈레는 나를 발레리아라고 불러주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학창 시절 친구들은 나를 아직도 피사니라고 부르고, 다른 사람들에게 나는 미켈레의 아내이거나 리카르도와 미렐라의 엄마일 뿐이다. 하지만 오직 미켈레에게만큼은 나는 발레리아였다.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 P17
Date 12월 15일
일기장을 펼칠 때마다 가장 먼저 첫 페이지에 적힌 내 이름이 눈에 들어온다. 내 수수한 필체가 마음에 든다. 다소 나지막하고 한쪽으로 약간 기울어진 글씨에서 어쩔 수 없이 연륜이 느껴진다. 솔직히 내가 마흔셋이라는 사실이 좀처럼 믿기지 않는다. - P18
어쨌든 마흔셋이나 됐는데 일기 한번 쓰겠다고 매번 유치한 술수를 써야 한다는 사실이 수치스럽다. 어떻게 하든 미켈레와 아이들에게 일기장의 존재를 알리고 내가 원할 때 방에 들어가 글을 쓸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해야 한다. 애초에 시작부터 잘못됐다. - P18
하지만 미켈레는 그날이 대학 등록금 납부 마감일이라 리카르도가 등록금을 제대로 냈는지 묻기 위해 전화를 걸었을 뿐이었다. - P19
Date 12 월 21 일
어제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미렐라에게 책상 서랍을 열쇠로 잠그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미렐라는 놀라면서 그렇게 한지 이미 몇 년이 지났는데 새삼스레 왜 그러냐고 항의했다. - P20
미렐라는 서랍을 잠그는 것은 그 안에 일기장을 보관하기 때문이라면서, 솔직히 오빠도 자기가 받은 연애편지를 보관하는 서랍을 잠그고 다닌다고 했다. (중략). "우리에게도 그런 서랍이 있어." 미켈레가 말했다. "돈을 보관하는 서랍 말이야." 내가 나만을 위한 서랍을 가지고 싶다고 하자 남편이 미소를지으며 말했다. "그 안에 뭘 넣으려고?" - P20
"우리 엄마가 일기장에 대체 뭘 쓰려고 그러시나?" 남편이 물었다. 미렐라도 방금 전까지 화를 낸 사실을 잊고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꿋꿋하게 주장을 굽히지 않자, 리카르도는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내게 다가왔다. "엄마 말씀이 옳아요." - P21
미켈레는 내 손을 잡고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오 여보, 이 나이에 무슨 비밀이 있을 수 있겠어?" 미켈레의 말투가 뻔뻔하거나 놀리는 투였다면 바로 반박했을것이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서글프게 들려서 순간내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지고 말았다. 나는 리카르도와 미렐라도 내가 잠시 약한 모습을 보인 이유가 질투심 때문이었다고 오해할까봐 아이들이 자기 방에 있는지 확인하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 P22
Date 12월 27일
(전략). 남편과 아들은 딸과 여동생에게서 처음으로 발견한 매력적인 여인의 모습에 놀라움과 경탄이 섞인 탄성을 내뱉었다. 내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미렐라의 모습에 자부심이 느껴질 정도였다. 평소에도 이렇게 스무 살 또래 아가씨들처럼 행복하고 사랑스러운 모습이면 좋겠다고 미렐라에게 말하려다 어쩌면 그애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항상 가족에게 보이는 것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입을 다물었다. - P25
리카르도는 어렸을 때처럼 엄마가 기적처럼 모든 걸 해결해줄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희망에 가득 찬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정말로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주 잠시, 나는 ‘아주 잘 맞는구나‘라고 말해줄까 망설였다. - P26
우리는 함께 거실로 돌아왔다. 리카르도의 귀는 새빨갛게 달아올랐고, 얼굴은 백지장처럼 창백했다. "우리 오늘 무도회에 못 가." 리카르도가 뿔난 목소리로 선언했다. 그애는 드레스를 물어뜯을 듯한 눈빛으로 제 동생을 바라보았다. - P26
"우리 주변에는 죄다 가난한 사람들뿐이네요." 그 말에 미켈레가 쏘아붙였다. "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야" 그러자 리카르도는 반농담처럼 말했다. "턱시도를 대여하는 건 어떨까요? 엑스트라 배우처럼요." "그만하면 됐다." 미켈레가 말했다. 나는 미켈레가 우리 결혼식 때 입었던 연미복과 정장을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P27
나는 결국결론을 내렸다. "무도회에는 미렐라만 가는 걸로 하자." 미켈레가 뭔가 말하려 했지만, 나는 모두의 시선을 외면하고 말을 이어나갔다. "새로운 상황을 받아들일 줄도 알아야지. 턱시도 없이도 살 수있고, 아가씨 혼자 무도회에 갈 수도 있는 거야. 내 시절에는 상상조차 못 할 일이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좋은 면이있는 법이란다. 여보, 당신은 미렐라를 바래다주고 집으로 돌아와줘요. 우리 셋이서 즐거운 저녁을 보낼 수 있을 거야. 리카르도는 아쉽지만 이해하렴." 리카르도는 침묵을 지켰다. - P28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우리는 라디오 주변에 모여 앉았다. 자정에 따려고 스파클링 와인을 한 병 사두었는데, 날카로운 눈빛으로고집스레 침묵을 지키고 있는 아들 때문에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언젠가부터 리카르도의 눈빛에서 그런 적의가 느껴지곤 했다. 평소에는 너무나 상냥하고 예의 바른 아이이기에, 그런 표정을 볼때마다 속이 상했다. - P30
사실 리카르도는 전에도 몇 번 미켈레가 오랫동안 은행에서 근무했으면서도 사업가가 되지 못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 이야기인즉슨 미켈레가 돈을 제대로 못 모았다는 말이었다. - P30
- 잠시 후 -새벽 두 시다. 일기를 쓰려고 일부러 일어났다. 잠이 오지 않았다. 모든 게 다 이 일기장 때문이다. 전에는 집에서 일어난 일을 곧바로 잊었는데, 일기를 쓰면서 일상을 기록하기 시작한 후부터는 우선 머릿속에 저장해놓았다가, 대체 왜 그런 일이 자꾸만 일어나는 건지 이유를 찾으려 한다. 일기장의 은밀한 존재는 내 삶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주었지만, 솔직히 그 덕분에 내 삶이 더 행복해지지는 않았다. - P32
"전쟁 때 아이들한테 암시장에서 신발을 샀다는 걸 학교에 가서 말하지 말라고 했던 것 기억나?" 미켈레는 건성으로 왜 그 시절 이야기를 꺼내는 거냐고 물었다. 이유를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나는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우리가 해외 라디오 채널을 듣는 것도 말하지 말라고 했잖아." 나는 남편에게 그 시절에는 미렐라가 거짓말을 해도 그애를 벌주기가 힘들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싶었다 - P33
(전략). 그럼에도 나는 과거의 신념을 믿지 않을 수 없다. 그날 나는 남편에게 언제부턴가 미렐라와 리카르도가 우리를 못 미더워하게 된 것은 이러한 우리의 의구심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하고싶었다. - P34
Date 1951년 1 월 1 일
집에 혼자 있는 느낌이다. 미켈레는 잠이 들었지만 일기를 쓰기 시작한 후부터는 남편이 나를 놀래주려고 일부러 자는 척하는 것은 아닌지 두려웠다. 지금은 부엌 식탁에 앉아 일기를 쓰고 있다. - P35
미켈레는 내게 언제나 잠시라도 좋으니 좀 쉬라고 하고 리카르도는 직장을 구하면 제일 먼저 나를 카프리나 리비에라 같은 휴양지로 보내줄 것이라고 한다. 내 노고를 인정하는 순간 자기들은 모든 부담을 내려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가족들은 허구한 날 심각한 표정으로 그만 일하고좀 쉬라고 한다. 마치 내가 변덕스러워서 휴식을 취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 P36
한마디로 내가 쉬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공표했는데 그렇지 않으면 가족들은 고작 하루 쉰 것을 한 달 내내쉰 것처럼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중략). 그런데 그 해에는 겨울이 될 때까지 조금이라도 피곤한 내색을 하면, 가족 모두 입을 모아 휴가를 다녀왔으니 건강이 좋아졌을거라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8월에 일주일 쉬었다고 10월까지 피곤하지 않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 P37
가족들이 내가 아프다는 사실을 믿어주는 것은 심한 고열이 날 때뿐이었다. 열이 나면 미켈레는 나를 걱정해주고 아이들은 내게 오렌지 주스를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나는 좀처럼 열이 나지 않는다. - P37
Date 1월 3일
어제는 줄리아나 집을 방문했다. (중략). 그럴 때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반대하다, 결국에는 생일파티에 갔다. 어제 평소보다 완강하게 생일파티에 가지 않겠다고 하자 미렐라가 말했다. "어차피 갈 거잖아요. 일부러 그날 쓸 검은 모자까지 수선해놓았으면서." 우리는 서로를 싸늘하게 쏘아보았다. 미렐라에게 뭐라 대꾸하지 못한 건 그애 말이 맞기 때문일 것이다. - P39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내 머릿속은 온통 모자 생각으로 가득했다. 목 위로 떨어지는 깃털 장식이 달린 모자를 생각하면서, 나는 모델처럼 묘하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가족 중에서 내가 딴 생각에 잠겼다는 사실을 눈치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미켈레도 마찬가지였다. 남편은 평소와 다름없이 "이제 왔어, 엄마?" 하고 나를 반겨줄 뿐이었다. - P40
중산층 법조인 가문 출신인 아버지는 내가 학교 친구들 이름을 이야기할 때마다 뿌듯해했다. 반면에 베네토 지역의 몰락한 귀족가문 출신이었던 어머니는 내가 친구 이야기를 해도 대수롭지 않은 척했다. 오히려 친구들 가문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어머니는 그들 가문의 족보를 완벽하게 알고 있었다. - P42
그날 나는 친구들이 하는 이야기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처음 입학했을 때 그애들의 빠른 프랑스어를 이해하려고 애썼던 것처럼 말이다. 카밀라는 교묘한 술수와 지혜로 남편에게서 값비싼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아낸 이야기를 신나게 늘어놓았다. - P43
마르게리타는 우리를 가르쳐주시던 수녀님의 캐리커처를 그려서 반 친구들에게 돌리던 때와 똑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순간 마르게리타의 남편이 갑자기 들이닥친다면, 수녀님에게 그림을 들켜서 교실에서 쫓겨났을 때처럼 얼굴이 새빨개졌을 것이다. - P44
"학창 시절 기숙사에서 지내지 않는 학생들을 데리러 오던 통학 버스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 너희도 그 버스 기억나지?" 내 말에 다들 학창 시절 추억은 언제나 아름답다고 하면서 포옹하고 작별 인사를 했다. 카밀라, 마르게리타, 지아친타는 다음 주 금요일에 카드놀이를 하기로 했다. 모두 세심하게 남편이 출근하지 않는 일요일은 피해서 약속을 잡았다. 마르게리타는 한숨을 내쉬며 자기는 베이비시터가 나오지 않는 목요일에도 약속을 잡을수 없다고 했다. - P45
순간 과연 나는 정말 좋은 아내인지 의구심이 들었다. 할부로라도 내가 번 돈으로 옷을 맞추는 비용이나 미용실 비용을 지불하는 바람에 오히려 미켈레가 어떤 식으로든 이러한 경쟁에 참여하지 못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 P47
Date 1월 5일
내일은 주현절이다. 이로써 드디어 연말연시 연휴도 끝이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해가 갈수록 연말연시가 되면 마음이 불안해진다. - P49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 집에 돌아오면 아무리 피곤해도 그날이면 유난히도 얕은 잠을 자는 아이들을 깨우지 않도록 까치발을 하고 난로로 직행했고, 미켈레는 그런 나를 안쓰럽게 바라보곤 했다. "대체 왜 그렇게 피곤하게 살아? 당신이 선물을 얼마나 힘들게 준비했는지 아이들이 알아줄 것 같아?" 미켈레의 물음에 나는 아이들은 내 노고를 알아줄 거라고 대답했다.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나는 아이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했다. "그것이야말로 이기주의가 아닐까?" - P50
오늘 밤도 변함없이 나는 잠을 자지 않고 아이들에게 줄 소박한 선물을 준비하고 있다. 미켈레가 곁에 있어주겠다고 했지만, 나는 이렇게 말했다. "고맙지만 괜찮으니 어서 들어가 자도록 해요." 사실 그렇게 말한 진짜 이유는 선물 포장을 마친 다음에 일기를 쓰고 싶어서였다. 이제는 무슨 일을 하든, 무슨 말을 하든 일기장의 존재가 느껴진다. 하루 동안 일어나는 모든 일에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믿게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 P51
Date 1 월 7 일
(전략). 마지막으로 전화번호부를 바꾼 것이 불과 6~7년 전이었는데, 그새 옛 수첩 앞부분에 있던 이름 대부분이 쓸모없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들 이름 옆에는 연필로 급히 받아 적은 후임자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 P53
어찌 되었든 평생 친구로 지내기는 힘든 법이다. 살다보면 모두 변하기 마련이니까. 어떤 이는 앞으로 나아가고, 어떤 이는 같은 자리에 머무른다. 가는 길이 달라지면 만나기도 힘들고 공통점도 없어진다. - P55
이혼 후에 클라라는 영화 연출을 시작했고, 그러면서 우리 부부는 잘 모르는 사람들과 만나기 시작했다. 지금은 꽤 유명해져서 극장에 가면 그녀의 이름이 자주 오프닝 크레딧에 등장하곤했다. 가끔 만나러 가도 그녀는 정신없이 바빴다. - P55
새 수첩에 번호를 모두 옮겨 적은 후, 나는 적어도 나와 미켈레는 몇 년 동안 하나도 변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변했더라도 둘이 함께 변해서 다행이라고 말이다. - P56
Date 1월 9일
걱정되고 속상하다. 미렐라에게 제멋대로 늦은 시간에 귀가하는 버릇이 생겼기 때문이다. 심지어 어젯밤에는 열 시가 다 되어서 들어왔다. 그애가 집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한 번만 더 늦게 들어오면 저녁을 주지 않겠다고 했다. "그럼 당장 오늘부터 그렇게 하세요." 미렐라가 상냥하지만 건방지기 짝이 없는 말투로 말했다. "저녁은 안 먹어도 되니까 안녕히 주무세요." 순간 미렐라가 남자랑 밖에서 저녁을 먹고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 P57
나는 새삼스레 다시 남편을 바라보았다. 내가 그이라면 이런 문제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을 보이지 못했을 것이다. 남편을 보고 있자니 그가 음악에서 위안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마음이 애틋해져서 미켈레 곁으로 다가갔다. "그만 가요, 여보." 순간 나는 그 말을 한 것을 후회했다. - P58
이게 다 일기장 탓이다. 일기장을 없애야겠다. 그렇다. 반드시 일기장을 없앨 것이다. 누군가 휴지통에서 일기장을 찾아낼 수도있다는 위험만 없다면, 지금 당장 내다버릴 텐데. 그렇다고 일기장을 불태우면 남편과 아이들이 종이 타는 냄새를 맡을 것이다. (중략). 이번주 일요일에 없애야겠다. - P59
Date 1월 10일
최근 미렐라의 태도가 너무 안 좋아져서 일기장에라도 하소연하지 않으면 참기 힘들 정도다. (중략). 그런 일이 있었는데 태평하게 잠을 자다니. - 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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