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해어들


나는 헌책시장에 약하다.
헌책시장을 너무 오래 서성이다 보면 정해놓고 편두통이덮쳐와 비관적이 되고 자학적이 되고 가슴이 두근거리고 숨이 차 결국에는 자가중독 증상을 일으킨다.
(중략).
그러므로 헌책시장이 열리는 계절이 되면 나는 정해놓고우울해진다. 그래서 올해는 절대로 안 간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막판에 아무래도 가야만 하는 처지에 몰렸다. - P93

헌책시장을 방황하던 그녀가 한 권의 책을 발견하고 의욕적으로 손을 뻗는다. 그곳으로 뻗어 오는 또 하나의 손. 그녀가 얼굴을 들면 그곳에 내가 서 있다. 나는 신사적으로 그책을 그녀에게 양보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그녀는 예의바르게 감사 인사를 할 것이다. - P94

아무리 생각해도 나무랄 데 없이 깔끔한 계획이었다. 계획의 단계 단계가 실로 행운유수와도 같이 아주 자연스럽게이어진다. 일이 성취되는 날에는 우리는 어김없이 이렇게이야기할 것이다. "생각해보니 그때 그 책에 함께 손을 뻗은것이 우리의 시작이었어"라고.
한없이 달려 나가는 상상 속의 로맨틱 엔진을 멈출 수가없어서 결국 나는 너무나도 부끄러운 나머지 코피를 내뿜었다. - P95

교토, 시모가모 신사의 참배로.
나이 먹은 녹나무와 팽나무가 줄줄이 서 있는 다다즈 숲을 널찍한 참배로가 가로지르고 있다. 마침 오봉 휴가에 해당되는 때, 매미 소리가 줄기차게 쏟아졌다.
펄럭펄럭 나부끼는 짙은 남빛 깃발에는 ‘시모가모 납량 헌책축제‘라고 쓰여 있었다. - P96

(전략).
부아가 나서 달마오뚝이같이 볼떼기를 부풀렸건만 끝없이이어지는 책의 바다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책들은 말한다.
"우리를 읽고 조금은 똑똑해지는 게 어때, 친구?" 하지만나는 이제 책이라면 넌덜머리가 났다.
헌책시장의 신이여, 나에게 책 속의 지식이 아니라 현실의 윤택함부터 달라.
지식은 그런 뒤에 줘도 된다. - P97

한 헌책방 앞에서 손에 든 문고본을 찬찬히 읽고 있는 자그마한 여성의 뒷모습. 여름에 맞춰 짧게 자른 검은 머리가 반들반들 윤이 난다. 그녀가 클럽 후배가 된 이후로 자진해서 그녀의 뒤를 따르며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또 바라본 지어언 몇 달, 이미 나는 그녀의 뒷모습에 관한 한 세계적 권위자라 할 만하다. 그런 내가 하는 말이니 틀림없다. 그녀다! - P98

. 나는 비틀거리는 와중에도 혀를 차면서 사랑의 길을 방해한 그 아이를 매정하게 노려보았다. 초등학교 고학년쯤되어 보이는 남자아이였다. (중략). 내려다보니 소년이 먹던 소프트 아이스크림의 잔해가 내 셔츠에 찰싹 들러붙었지않은가.
"이런, 빌어먹을, 어떻게 할 거야." 나는 으르렁댔다. "끈적끈적하잖아."
"불평하기 전에 먼저 나한테 사과하는 게 순서 아니겠는가" 소년은 모래를 털며 느닷없이 어른처럼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 P99

그녀는 손에 든 문고본을 아주 열심히 읽고 있었다. 책읽는 모습이 매력적인 건 그 책에 폭 빠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에 푹 빠진 아가씨는 아름답다고 하지 않는가. - P100

삼가 해설을 해드리자면 그때 내가 정신없이 읽던 책은제럴드 더렐의 『새와 짐승과 친척들』이었습니다. - P100

남북으로 뻗은 승마장에 양쪽으로 수많은 헌책방이 늘어서서 저마다 사람들의 눈길을 잡아당겼습니다. 오른쪽 헌책방에서 "여기 재미있는 게 있어" 하고 부르면 왼쪽 헌책방에서 "여기 것이 더 재미있어" 하고 부릅니다. 처음엔 맛있는 물에 유혹당하는 비와호 수로의 반딧불이처럼 우물쭈물하다가 결국은 그래 내가 몽땅 다 봐주마, 하고 헌책시장에빠져들었습니다.
그러다가 만난 것이 『새와 짐승과 친척들』이었습니다. - P101

더구나 내가 중학생 때부터 갖고 싶었던 책이 백 엔짜리동전 한 개라니! 지갑에 대한 신뢰에 일말의 그림자가 드리운 우리들에게는 감사하기 이를 데 없는 일입니다. 비바, ‘비기너스 럭‘(초보자의 행운-옮긴이). - P102

"히구치 씨, 오래간만이에요." 나는 머리를 숙였습니다.
히구치 씨는 싱글벙글했습니다.
"그날 밤 이후로 처음이군. 잘 지냈어? 여전히 잘 마시나?"
"덕분에 잘 지내고 있어요. 하지만 술 마실 기회는 별로없었어요."
"그럼 이번에 한잔하러 가야겠네. 하누키도 보고 싶어 해."
"하누키 씨는 오늘 안 오셨나요?"
"그 사람은 헌책을 안 좋아해. 다 헐어빠진 물건을 왜 돈내고 수집하느냐고." - P103

"아무리 히구치 씨가 사주시다뇨......"
"그렇지? 내가 남한테 사주는 일은 사반세기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긴 하지만, 오늘은 괜찮아. 아무튼 수확이있었으니까."
히구치 씨는 의기양양하게 책 몇 권을 보여주었습니다. - P104

그런데 이야기를 하다 보니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되었습니다. 실망.
"아는 사람이 이 책을 갖고 싶다고 했거든. 그에게 비싼값으로 팔아 치울 거야. 게다가 오늘은 달리 또 돈을 벌 건수가 있어. 그러니 마음 놓고 날 따라와." - P104

히구치 씨는 책을 보자기에 싸서는 앞장서 걸었습니다.
"글쎄 말이야, 그냥 종이 다발에 잉크가 스민 것뿐인데이렇게 비싼 돈을 내고 사겠다니." 그는 감탄한 듯 말했습니다. "정말로 책이란 고마운 물건이야." - P105

(전략).
"어린 건 어쩔 수 없다니까!"
나는 웃어젖혔다.
"망중한忙中閑이 있고, 한중망閑中忙이 있는 법이야. 너 같은아이야 내가 그냥 어슬렁거리는 것으로 보일지 모르지만내 두뇌는 지금 어지러울 정도로 바삐 움직이는 중이야. 너야 꼬맹이니까 단지 고요한 태풍의 눈만 보고 그러겠지만이 형님의 정신은 사실 거대한 태풍처럼 휘몰아치고 있느니라."
"거짓말쟁이. 방금 생각해낸 말이지?" - P107

"검은 머리를 짧게 자른 자그마한 사람이지? 피부는 하얗고."
(중략).
 "어이, 어떻게 그걸 알지?"
"나랑 부딪혔을 때 가게 앞에 있던 여자를 부끄러운 줄도모르고 열렬히 쳐다보고 있었잖아. 그걸 보고도 모른다면바보지." - P108

"그런 신기한 일들은 모두 신이 관장하는 거야."
히구치 씨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습니다. "헌책시장의신이 뭔지 아니?"
"아뇨, 아뇨, 처음 듣는데요."
(중략).
나는 등골이 오싹해졌습니다.
"신을 우습게 여긴 수집가의 서고에 쌓인 책들이 어느 날홀연히 사라지는 거지. 헌책시장의 신이 서고의 책을 몽땅 가져가는 거야." - P110

나는 우리 집에 남몰래 모아놓은 책을 생각했습니다. 나는 헌책시장의 신에게 기도를 한 적이 없습니다. 나는 허둥지둥 합장을 하고 "나무나무!"라고 기도했습니다. 이것은내가 독자적으로 개발한 만능 기도인데, 그림책을 읽던 어린 시절부터 애용해왔습니다. - P111

그녀의 뒷모습에 관한 한 세계적 권위자임을 자부하는 내가 그 본령을 발휘할 수 없는 건 오로지 내 뒤에 딱 달라붙어 따라오는 소년 때문이다. 이건 세상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마음에 드는 검은 머리의 아가씨를 부득불 쫓아갈 수 있는 권리에 대한 명백한 침해였다.
내가 그녀에 대한 검색 능력을 발휘하려고 하면 소년은그 비위에 거슬리는 말투로 "오, 마음속의 사람을 찾는구나" 하고 실없는 소리를 해댔다. - P113

소년은 내 셔츠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어떤 책을 찾는데?"
"성가시구나. 엄청나게 딱딱한 책이야. 꼬맹이들은 몰라."
『일본 정치사상사 연구』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나 『논리철학논고』 같은, 사람들이 지레 겁먹는 덕에대접받는 책들 말이야?"
"차라, 투, 스트라 같은 말을 혀도 안 깨물고 잘도 말하는군." - P113

나는 몇 만 권은 되어 보이는 엄청난 양의 책등을 바라보며 내 인생에 영광의 새 지평을 열어줄 하늘이 내린 책이 이중 어딘가에 묻혀 있을 거라는 낯익은 망상에 시달렸다. 책들이 외치기 시작했다. "넌 나조차도 읽지 않았잖느냐. 부끄러운 줄 알아라. 이 엉터리꽈당아." "나같이 뼈대 있는 책을읽어서 네 영혼을 좀 성장시켜봐." "나를 읽기만 하면 넌 모든 것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거다. 지식, 재능, 근성, 기백, 품격, 카리스마, 체력, 건강, 윤기 있는 피부. 그리고 주지육림(호사스런 술잔치를 이르는 말-옮긴이)도 네가 바라는 대로될 것이다. 뭐? 주지는 필요 없다고? 그런 건 아무래도 좋으니 우선 나를 읽어라."
"무리하지 않는게 좋아, 형님."
(중략).
"더 재미있어 보이는 책이 얼마든지 있잖아. 소년은 늙기 쉽고 학문은 이루기 어렵다, 라구." - P115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읽은 책을 모두 순서대로 책꽂이에 꽂아보고 싶다. 누군가가 그렇게 쓴 걸 읽은 적이 있어.
너는 그런 생각 한적 없니?"
히구치 씨가 걸으며 말했습니다. "난 책을 잘 읽지 않으니까 꽂아봤자 뻔하고." - P116

나는 라타타탐Ra ta ta tam이라는 말이 갑자기 떠올랐습니다.
그래, 라타타탐!
(중략).
『라타타탐-꼬마 기관차의 신기한 이야기』는 마티어스라는 남자아이가 만든 작고 새하얀 기관차가 여행을 나선 마티어스를 따라다니며 신기한 모험을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 P117

"어쩌다 잃어버린 걸까요!" 나는 신음했습니다.
그렇게 좋아해놓고는 그 뒤로 내 인생에서 만난 수많은 다른 책에 눈길을 빼앗겨 그만 잊어버리고 지낸 거예요. 이름까지 써놓았는데! 이 바람둥이! 파렴치한!
(중략).
"○○서점" "○○서점, 본부까지 오십시오" 하는 확성기소리가 나른한 헌책시장의 공기를 갈랐습니다. - P118

나는 멍하니 있다가 걸어오던 양복 입은 노인에게 들이받혔다. 화가 나서 그를 쫓았는데, 그는 뛰다시피 하여 수상쩍은 한 헌책방 안으로 들어갔다. (중략).
내가 좁은 입구에서 안을 들여다보려는데, 소년이 "거긴난 싫어"라고 했다.
"형님, 거긴 그만두는게 좋아. 봐, 구텁텁한 냄새가 나잖아." - P118

단순히 두 개의 통로로 이루어졌나 했더니 계산대 오른쪽으로 뻗은 또 다른 통로가 있었다.
대부분의 헌책방은 그냥 텐트 주위에 책꽂이를 늘어놓는게 고작인데 이 가게는 책꽂이로 건축물 같은 구조를 만들어놓았다. 계산대보다 더 안쪽, 책꽂이 사이로 난 통로 위로는 베니어판을 걸쳐서 천장을 만들었다. - P120

이미 오후 3시가 지난 시각입니다. 날이 조금 흐리고 무더워졌습니다.
그림책 코너에서는 그리운 그림책들을 많이 찾았지만 『라타타탐』은 없었습니다. 그런 아름다운 그림책을 헌책방에 팔아버릴 사람이 있을 리 없지 하고 생각하니 그걸 잃어버린 나 자신이 자꾸만 더 한심스러워졌습니다. - P121

. 귀여운 소년이 말을 걸어왔습니다. "누나, 뭘 찾아요?"
잘 보니 아까 선배의 옷자락을 잡고 걷던 아이였습니다.
가까이에서 보니까 정신이 아찔할 정도로 예뻤습니다. 주위에 선배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걸로 봐서 아까 선배의 동생이라고 생각한 건 내 착각이었나 봅니다. - P121

그리하여 나는 소년과 함께 『라타타탐』을 찾았는데, 아무리 찾아도 역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내가 풀죽어했더니히구치 씨가 "아직 방법은 있어"라고 말했습니다.
"헌책방에 수색을 의뢰하면 돼. 가비서방의 주인한테 부탁해보자."
"찾을 수 있을까요?"
"분명 필사적으로 찾아줄 테니까 기대해봐." - P122

나는 함께 책을 찾느라 애쓴 소년에게 고맙다는 인사를하려고 고개를 돌렸으나 소년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어쩐지 환상 속의 소년 같았습니다. - P123

조금 전보다는 편한 마음으로 책꽂이 사이를 걷는데 또그 소년이 나타났다.
"아이답게 그림책 코너도 돌고 왔어. 당신도 갔으면 좋았을걸. 당신이 그리는 사람이 거기 있었거든."
"뭐?"
"『라타타탐』이란 책을 찾던데."
"아니, 그 수엔 안 넘어가." 내가 말했다. "뭐야, 괴상망측한 제목하고는 그런 책이 어딨냐?" - P123

곁에는 소년이 앉았다. 그는 종잇조각 다발을 손에 하나가득 들고 만지작거렸다. 하나하나에 가격과 서점 이름이쓰여 있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헌책에 붙었던 가격표인 듯했다.
"어이, 무슨 짓이니. 헌책방 아저씨한테 혼나."
"신경 쓰지 말게나. 훗날 이게 도움이 될 테니." - P125

그녀의 모습은 안 보였지만 몇몇 눈에 띄는 사람들이 있었다.
우선 신경이 쓰인 건 옆 평상에 앉은 기모노 차림의 아름다운 부인이었다. 기모노도 눈에 띄는데 양산을 받쳐 들고단정히 앉아 『오다 사쿠노스케 전집』을 탐독하는 것이 수상쩍었다. 그 모습이 이곳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지 어떤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았다. - P126

평상 곁에는 키가 작은 대학생이 홀로 서 있었다. 사각의검은 테 안경을 낀 얼굴 역시 사각이며 발 옆에 둔 무거워보이는 두랄루민 케이스도 사각이었다. 철두철미하게 사각을 만드는 것이 그의 신조인가 보았다. 기묘하게도 그는 오로지 전철 시각표를 읽는 데 몰두했다.
나는 머리가 멍해지면서 공상에 빠져들었다. - P127

"악랄한 수집가의 손에서 고서를 해방한다."
히구치 씨가 그렇게 선언하자 가비서방 주인은 "그럴듯하군" 하고 캐득캐득 웃었습니다. - P127

"아가씨, 이런 밑도 끝도 없는 소리를 진짜로 받아들여서는 안 돼."
주인이 말했습니다. "헌책시장의 신이라니, 쯧쯧."
"수집가 분들이 매월 초가 되면 헌책을 바치고 대연회를연다고 하던데요?" 하고 말한 나.
"그게 사실이라면 흥미롭군."
주인은 눈살을 찌푸리며 웃었습니다. "어이 히구치 씨,
자네도 참, 적당히 하라고. 사람을 놀리면 안 되지." - P128

주인은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며 보온병에서 차를 따라 꿀꺽 마셨습니다.
"수집가의 손에서 해방하다니, 수집가 입장에서 보자면쓸데없는 참견 좀 작작해라. 그거지. 한 번 더 뜻밖의 행운을 잡을 수 있는 거니까 우리에게야 고마운 이야기지만하지만 오늘의 일괄 경매 모임에 신이 개입한다면 큰일인데...."
"내가 신이라면 지금쯤이면 이백 씨에게 천벌을 내릴 때가 됐어." - P129

주인이 설명해준 바에 따르면 오늘 이 헌책시장의 한쪽구석에서 개인적인 경매 모임이 열린답니다. 주최자는 이백씨라는데, 나도 한 번 대작을 했던 분입니다. 겉보기에는 부드러운 할아버지지만 엄청난 부자이며 또한 피도 눈물도 없는 극악무도한 고리대금업자라고 합니다. - P130

헌책방 주인들은 그 비밀 모임에 참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히구치 씨가 가비서방의 밀명을 받아 대신 참가할 모양이었습니다. 히구치 씨가 말한 ‘돈벌 건수‘란 게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 비밀 모임에서는 어떤 걸 하는데요?"
주인은 한쪽 뺨을 일그러뜨리며 웃었습니다. - P131

"무슨 일이 있을지는 아무도 몰라. 이백 씨가 내는 시험을 통과하는 사람은 원하는 책을 가질 수 있어. 하지만 손쉬운 시험은 아니야. 도전자들은 상상을 뛰어넘는 시험 앞에서 자존심이고 뭐고 다 잃고 납작 엎드리게 될 거야. 이백씨는 그 광경을 안주 삼아 술을 마시는 거지." - P131

"저기, 형님."
소년이 갑자기 작은 소리로 말하며 가느다란 팔을 들어보이지 않는 요요를 당겨 올렸다 놓았다 하는 듯한 몸짓을했다.
"아버지가 옛날에 나한테 말했어. 이렇게 한 권의 책을들어 올리면 헌책시장이 마치 커다란 성처럼 공중에 떠오를거라고. 책은 모두 이어져 있기 때문이라는 거야. - P133

"처음에 형님은 『셜록 홈즈 전집』을 봤어. 저자인 코난 도일은 SF라 할 『잃어버린 세계를 썼는데 그건 프랑스 작가쥘 베른의 영향을 받은 거였어. 그 베른이 『아드리아 해의 복수』를 쓴 건 알렉산더 뒤마를 존경했기 때문이야. 그리고 뒤마의 몬테크리스토 백작을 일본에서 번안한 것이 《요로즈초호》(?朝?, 근대의 진보적 일간지-옮긴이)‘ 주간을 했던 구로이와 루이코인데, 그는 『메이지 바벨탑』이라는 소설에서 작중 인물로 등장해, 그 소설을 쓴 야마다 후타로가 『전중파 암시장 일기』 속에서 ‘우작‘이라는 단 한마디 말로 참수시킨 소설이 『귀화』인데 그걸 쓴 것이 요코미조 세이시. 그는 젊은 날 잡지 <신청년>의 편집장이었는데 그와 손을 잡고 <신청년>의 편집에 관여한 편집자가 안드로노스의 후예를 쓴 와타나베 온. 그는 업무상 방문한 고베에서타고 있던 자동차가 전철과 충돌하여 죽게 되지. 그 죽음을「춘한」이라는 글로 추도한 것이 와타나베에게서 원고를 의뢰받았던 다니자키 준이치로. 그 다니자키를 잡지에서 비판해 문학 논쟁을 전개한 것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인데 아쿠타가와는 논쟁 몇 개월 후에 자살을 해. 그 자살 전후의 모습을 모티브로 우치다 켄이 『중산모자』를 썼고 그 우치다의 글을 칭찬한 것이 미시마 유키오, 미시마가 스물두 살때 만나서 나는 당신이 싫다‘ 하고 맞대놓고 말한 상대가다자이 오사무 다자이는 자살하기 일 년 전에 한 남자를 위해 추도문을 써서 ‘너는 잘했다‘라고 했어. 다자이에게서 추도사를 받은 남자는 결핵으로 죽은 오다 사쿠노스케야.
봐봐, 저기 그의 전집을 읽는 사람이 있어." - P134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응. 그래서 오늘 내가 여기 온 거야. 나한테는 아버지의책을 이 바다에 돌려줄 사명이 있어."
소년은 비가 그쳐가는 하늘을 가리켰다.
"악랄한 수집가의 손에서 고서들을 해방한다. 나는 헌책시장의 신이다." - P135

소년이 또 헌책 한 권에서 가격표를 떼며 중얼거렸다.
"아, 너 또 그런 나쁜 짓을!"
"놔둬."
"어떻게 놔두냐, 이 바보야."
그런 말을 주고받는데 콧수염을 기른 헌책방 주인이 우리가 하는 말을 듣고 달려왔다.  - P136

"이게 무슨 소리야? 당신, 이 아이한테 무슨 짓을 했어?"
"네? 아무 짓도 안 했는데요."
"이 애가 당신이 시켜서 했다잖아."
헌책방 주인은 내 팔을 잡았다. "똑바로 이야기 안 하면 경찰을 부를 거야."
"모른다니까요, 농담 말아요."
"그야 농담이면 곤란하지." - P137

그때 먼발치에서 이 소란을 지켜보던 사람들 사이에서 서른 살쯤 되어 보이는 좀 뚱뚱한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그 사람, 아는 사람인데요......" 했다.
"아아, 치토세 씨군요. 거참." 헌책방 주인이 머리를 숙였다.
"그 사람은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에요. 아이가 질이 나빠요. 아까도 비슷한 짓을 해서 소란을 일으키는 걸 봤어요." - P138

치토세야의 젊은 주인은 내 팔에 손을 대더니, "보답을해달라는 것 같아서 좀 그렇지만, 부탁할 게 있어" 하고 말했다.
"좋은 일이 있거든. 여기서 만난 것도 무슨 인연이겠지." - P139

침침하고 조용했다. 통로 끝의 계산대 앞에서 비밀스러워보이는 옆의 통로로 들어서려는데 기모노 차림의 여성이 갑자기 발을 멈췄다.
"죄송합니다. 전 갑자기 자신이 없어졌어요."
"엉? 그래요?"
검은 테 안경의 헌책방 주인이 말했다. "잘 생각했어요.
당신 같은 분은 여기서 돌아가는 편이 좋아요."
"여기까지 온 김에, 라기엔 좀 그렇지만, 이걸 이백 씨한테 좀 전해주세요." - P142

드디어 그 통로가 끝나고 2층쯤 되는 높이까지 이어지는계단이 정면에 나타났다. 계단을 올라가니 중후한 철문이다. 램프가 그 옆에서 오도카니 불을 밝히고 있는 것이 쓸쓸한 거리의 모퉁이를 생각나게 했다. 문 옆에는 나무 팻말이매달렸는데 거기에 "이백"이라고 요세문자로 쓰여 있었다.
헌책방 주인이 벨을 눌렀다. - P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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