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원고는 전문 의료진을 대상으로 한 웹 포럼이었다가 2012년 오프라인 형태로 전환되면서 폐쇄된 MDconfessions.com에 ‘나는 어쩌다 의학을 포기할 뻔했는가‘라는 제목으로 게재되었다. 원작자가 필명으로 쓴 데다 신원이 드러날 수 있는 내용은 세세한 부분까지 바꿔놓은 바람에 작가의 정체라든가 여타 등장인물이 누구인지는 알아내려 해도 알 수가 없었다. - P7
내가 엄청난 비밀을 알고 있는 건지 아니면 나 자신이 미쳐버린 건지 현재로서는 확신이 서지 않아 이 글을 쓴다. (중략).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여기 등장하는 이름과 장소를 구체적으로 거론하면 좋겠지만 나도 의사 생활을 계속해야 하는 형편이라 아무리 특이한 경우라 해도 환자의 비밀을 누설하고 다니는 인물로 블랙리스트에 오를 순 없다. (후략). - P13
물론 선배와 교수님들은 내 진로에 관해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잘 알려지지 않고 재정도 열악한 병원 자리는 나처럼 명망 있는 의대를 졸업해 혹독한 레지던트 수련까지 마친 유망한 의사가 아닌, 변변치 않은 지방 출신이나 가는곳이었다. 하지만 의사로서 내게 병원의 규모나 재정은 아무 상관이 없었다. - P17
하지만 아무리 형편없는 병원이라도 일자리를 얻으려면추천서를 써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건 교수들의 편견이 내의사 결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고심 끝에 나는 소위 잘나가는 교수님들 대신 꽤나 괴팍한성격으로 학생들과는 거리가 먼 교수님께 추천서를 부탁했다. - P18
단순히 추천서가 필요하기도 했거니와 교수가 소개해 준 병원이 코네티컷 주 의료계에서 가장 재정이 부족하고 비참한 상황이라 내 마음에 쏙 들었기 때문이다(소송을 피하고자 이 음산하고 조그만 병원을 코네티컷 주립 정신병원이라고 부르겠다). - P18
만약 내가 철저한 이성주의자가 아니었다면, 면접을 보러 병원까지 가는 길의 분위기를 일종의 경고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 P19
나는 표지판을 따라 도로를 벗어나 박무가 뒤덮인 복잡하고 음산한 샛길 중 첫 번째 길을 향해 차를 몰았다. 그나마 미리 지도를 출력해 오지 않았더라면, 구불구불한 산길을 헤매며 병원이 위치한 구릉 지대를 찾는 데 몇 시간은 허비했을 것이다. - P19
그러나 여기까지는 병원 단지를 처음 마주했을 때 느낀불안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병원 단지는 자금난에 허덕이는 곳 치고 의외로 규모가 굉장히 컸다. 한때 위풍당당했을 시설들은 오랫동안 방치되어 흉물스럽게 변해가는 중이었다. - P20
단지 중앙에는 여전히 운영을 하고 있는 유일한 건물이주변에 버림받은 형제들을 왜소해 보이게 만든 채 서 있었다. 바로 병원 본관이었다. - P20
역설적으로 건물 내부는 간소해 보여도 놀랄 만큼 깨끗한 데다 관리가 잘 되어 있었다. 면접을 보러 왔다고 하니따분한 표정의 접수창구 직원이 내게 꼭대기 층에 있는 병원장 사무실로 가라고 일러 주었다. - P21
나이 든 간호사의 말투에서 아일랜드 억양이 어렴풋이 배어났다. "이번 달만 세 번째에요. 우리가 그 방에 가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요?" 나는 이들의 대화를 지켜보며 순진하게도 이 병원이야말로 내 지식과 보살핌이 진정으로 절실한 곳이라고 생각했다. - P22
Part 2
다들 알다시피 인력난에 시달리는 정신병원에서 일한다는 것은 흥미로우면서도 따분한 일이다. 주립 시설로서 우리는 병원에 오는 사람들을 모두 도와야했는데, 대부분은 가벼운 증상을 호소하는 단기 치료 환자나 외래 환자였다. - P27
장기 치료가 필요한 환자들은 보험회사 측에서 거부하는 경우가 많아 개인이 비용을 부담해야 하므로 상대적으로 저렴한 주립 병원을 찾기 마련이다. - P27
당시 나이가 지긋한 신사 세 분도 계셨는데 각자 자신이예수라고 믿는 분들이라 한 방에 모이기만 하면 서로에게고함을 질러댔다. 그중 한 분은 신학에 조예가 깊은 신학대학 교수였다. 그는 나머지 두 사람에게 토마스 아퀴나스의 말을 닥치는 대로 인용하며 소리를 지르곤 했는데 그러면 본인의 주장이 더욱 그럴싸하게 들린다고 믿는 것 같았다. - P28
이렇듯 정신 병동에는 이상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모든 병원에는 꼭 반드시 그 환자가 있기 마련이다. 정신병원임을 감안하더라도 유독 이상한 환자. 아무리 경험이 풍부한 의사라도 두 손 두 발 다 들고 꺼리게 되는 인물말이다. 그런 환자는 누가 봐도 제정신이 아니지만, 어쩌다그렇게 됐는지 아무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 P29
우리 병원에 있던 그 환자는 유독 특이했다. 먼저 어린아이일 때 병원에 보내진 데다 아무도 그의 병을 진단하지 못했는데도 어찌 된 영문인지 30년 넘게 병원에 수용돼 있었다. 그에게 이름이 있었지만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고 했다. - P29
나는 새로 부임한 정신과 의사로서조의 진료 기록부와 처방전을 열람해 보았지만 환자 정보가 거의 없었다. 서류철은 눈에 띄게 얇았고 지난해 자료만 포함되어 있었다. 심각한 환자라더니, 처방 역시 약효가 순한 항우울제와 진정제가 전부였다. - P31
네시에 관한 몇 가지 사실과 함께 어째서 내 계획을 유독 그녀에게 털어놓았는지 밝혀야겠다. 네시는 아일랜드출신으로 70년대부터 이 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했다. - P31
나를 비롯한 의사와 간호사는 네시 덕분에 굉장히 편안했다. 그건 그녀가 간호사뿐 아니라 조무사와 관리인 지완벽하게 컨트롤했기 때문이었다. (중략). 만약 병원 전체가 불에 탄다면 건축가에게 원래대로 짓는 방법을알려줄 사람도 틀림없이 네시였을 것이다. - P32
"어서 와요, 파커, 그래, 우리 천재 의사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지내나요?" 그녀의 목소리는 어렴풋이 아일랜드 억양이 배어 있어 훨씬 편안하게 들렸다. 나는 미소로 답했다. "죽고 싶죠, 뭐." "오 저런." 그녀가 걱정하는 투로 말했다. "그럼, 항우울제라도 좀 처방해 드릴까요?" "아, 그런 거 아니에요." 나는 웃었다. - P33
그녀가 침착하라는 몸짓으로 말했다. "그래, 무슨 사고를 치려고 하나요?" 나는 음모라도 꾸미듯 몸을 앞으로 기울인 다음, 잠시뜸을 들였다 말했다. "조를 치료해보고 싶어요." 내 말을 들으려고 같이 몸을 기울인 네시가 뭔가에 쏘이기라도 한 듯 몸을 뒤로 확 젖혔다. 커피가 든 종이컵이 바닥에 떨어지면서 철벅하는 소리가 났다. - P34
"농담하는 거 아니에요. 네시, 전 정말로..." "아니, 그건 미친 농담이었어야 해요. 정신이 나가지 않고서야 그딴 말을 진심이라고 뱉을 수는 없어요." 네시의 초록빛 눈이 노여움에 불타고 있었지만 나를 향한 분노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 P35
"왜죠? 조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건가요?" 그녀가 대답하지 않을 것 같아 나는 말을 이었다. "네시, 제가 과하게 똑똑하다는 거 아시잖아요. 제게 풀지 못할 수수께끼는 없어요." 그녀의 눈빛이 다시 굳어졌다. - P36
여기까지 듣고 보면 내가 놰 환자 문제를 병원장에게 직접 이야기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진료 기록을 찾으려 했는지 궁금할 것이다. 이 병원은 일개 신입 의사가 병원장을 직접 만나기 어려운 구조였다. 면접 때 엄청난 질문 공세를 퍼붓던 병원장 로즈는 그날 이후로 좀처럼 만날 수 없었다. - P37
브루스는 첫 만남부터 자신이 상급자임을 강조하며 사사건건 시비를 걸었다. 처음에는 그래도 상사이니 존중해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얼마 지나지않아 그가 심하게 게으른 데다 환자가 무감각해질 때까지약을 주는 것이 유일한 치료 방법이라는 걸 알고 무시하는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 P37
그럼, 다시 조의 진료 기록을 찾아다닌 얘기로 돌아가보자. 2000년 이전에 입원한 환자의 기록을 열람하려면 환자의 정확한 이름과 입원일을 알아야 했다. 그때만 해도환자의 이름과 입원일 외에는 전산 처리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P38
결국 나는 우연한 기회를 통해 해결책을 찾았다. 어쩌다한 번 네시가 투약 근무자 명단을 두고 자리를 비운 사이에 슬쩍 자료를 훔쳐본 것이다. 운 좋게도 그 명단은 조의전체 이름인 ‘조셉 E. M‘이 유일하게 기재된 자료인 듯했다. - P38
조셉 E. M은 1973년 여섯 살일때 이 병원에 처음 입원해 지금까지 수용 중인 것으로 표기돼 있었다. 서류철은 꽤 오랫동안 아무도 열어보지 않았던것처럼 먼지로 뒤덮여 있었고, 너무 두툼해서 터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막상 서류를 열어 보자 겉보기와 다르게 보존 상태가 양호했다. - P39
지금까지 조의 병은 진단조차 되지 않았다고 알고 있었는데, 문서를 읽다 보니 소문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진단이 없었던 게 아니었다. - P39
서류에는 당시 의사가 기록한 메모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중략).
하마터면 나는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그런 가벼운 증상으로 입원한 어린 환자가 이 병원의 골칫거리라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 병원 수준이 대체 어느 정도인거지? - P41
한 장 더 넘기자 조의 재입원 기록이 눈에 띄었다. 퇴원한 지 하루 만에 조가 다시 병원을 찾았고 이번에는 훨씬 더 심각한 증상을 보인 듯했다. - P41
조의 치료에 관한 내용은 그걸로 끝이었다. 보아하니 조를 면담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넌더리를 내며 그만 뒀던 모양이다. 확실히 조의 증상이 처음 생각했던 것처럼 단순하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아무리 인원이 부족한 병원이라할지라도 조금 더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 P45
조에 관한 기록은 1977년에 다시 시작된다. 이번에는 항목마다 삭제된 부분이 있었는데, 원문을 확인하려면 로즈를 찾아가라는 글이 앞에 적혀 있었다. - P46
(전략). 토머스의 편지 뒤에는 앞으로 조에 대한 모든 치료가 중단될 거라는 공문만 남아 있었다. 문서에 따르면 조는병실을 혼자 쓰게 됐지만 그 대가로 하루 24시간, 일주일에 7일을 방안에 갇혀 있어야 했다. 선별된 소수 조무사만침대보를 갈거나 식사를 갖다 주러 병실 출입이 허용됐고, 가장 노련한 간호사가 조의 투약 업무를 맡게 됐다. - P55
이 기록을 보기 전까지 조에 대한 관심이 호기심 수준이었다면, 이제는 완전히 집착하게 되어버렸다. 정신의학 역사상 진단된 적 없는, DSM에도 기재된적 없는 완벽히 새로운 질병을 내가 발견하게 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 P56
나는 즉시 기록물 관리인에게 돌아가 파일에서 베낀 관리 번호를 제시하며 관련 기록 열람을 요청했다. (중략). "이 번호로 된 자료는 없수다, 선생, 제대로 받아 적은거 맞소?" - P56
"누가 저한테 장난을 쳤나보네요. 시간 낭비하게 해서죄송합니다." 나는 기록실에서 나와 조용히 병원을 빠져나왔다. 이 주제에 대해서 누군가와 논의하기 전에 조금 전에 읽은 내용을 곰곰이 생각해 볼 시간이 필요했다. - P57
기록을 정리하며 차근차근 되짚어보니, 초반에 조의 병은 일종의 공감 문제에 근거한 정신병에서 비롯된 게 분명해 보였다. 조가 단순히 마구잡이식으로 상대를 열 받게하는 못된 꼬마였다면 반사회적 인격 장애의 전형적인 환자로 진단하기 쉬웠을 것이다. - P57
. 조가 사람들로 하여금 자살을 유도했거나 강간의의미도 모르면서 소년을 강간하려 했다면, 확실히 정서적공감 능력타인의 감정을 공유하는 능력은 거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반대로 상대의 감정을 인식하는 능력인 인지적 공감 능력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뛰어났다. - P58
더욱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첫 번째 룸메이트와의 참사직후 일어난 전술적 변화였다. 수많은 진료 기록에 따르면그전까지 조가 선호하던 방식은 상대에게 분노나 자기혐오를 유발하는 것이었다. - P58
조의 서류를 본 이후 이 수수께끼 같은 환자를 직접 만나보는 것 외에는 결코 답을 찾을 길이 없다는 생각이 확고해졌다. 브루스는 내 얘기를 듣지 않을 테니 어떻게 상사를 건너뛰고 일을 처리할지부터 곰곰이 생각해야 했다. - P59
"누구든 지가 치료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보지?" 그런 그에게 협조를 구하는 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브루스를 건너뛰고 병원장을 만날 수 있다면 어떨까? 아니, 그 전에 병원장은 어떤 사람일까? - P59
Part 3
다음 날 병원에 도착하자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본관 입구주변에 모여 있었는데, 그중에는 경찰과 기자도 섞여 있었다. 무슨 일인지 알아보고자 곧바로 사람들을 헤집고 앞으로 나아갔지만, 사체주머니를 들것에 실어 호송차에 옮기는 모습밖에 볼 수 없었다. - P63
"어젯밤 병실 순회를 마치고 옥상에서 뛰어내렸대요. 이유야 아무도 모르지만, 어떤 환자 말로는 네시가....그러니까, 그 환자의 병실에서 나온 직후에 그랬대요." - P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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