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둘러싼 이야기들

당신은 스탈린이나 마오쩌둥이나 폴 포트에 관해 이성적으로 토론할 수있다. 하지만 히틀러를 입에 올리는 순간, 이성을 잃고 감정적이고 방어적인 자세로 편협한 생각을 고집하게 된다. 「타임」지가 ‘세기의 인물‘로누구를 선정할지 고민하던 2000년, 히틀러가 물망에 오르고 있다는 소문이 떠돌면서 작은 소동이 일었다. - P9

히틀러의 성취는, 그가 가져온 파괴와 불행에도 역시 하나의 현상이라 할 만하다. - P9

. CBS가 히틀러의 젊은 시절에 관한 영화제작 계획을 발표했을 때, 한 저명한 유대인 지도자는 이렇게 항의했다.
"우리는 그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안다. 뭘 더 알아야하나?" 아돌프 히틀러라는 괴물에게 인격을 부여하거나 그의 끔찍한 계획의 동기를 알아보려는 행위는 분명 도덕적 반발을 부르는 일이 될 것이다. 아무도 "어쩌면 우리 안에는 작은 히틀러가 들어있을 수 있다."라는 토마스 만Tomas Mann의 말을 진지하게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 P10

역사상 그 누구보다 히틀러를 주제로 한 책이 많음에도 그의 캐릭터화된 모습 아래 숨은 또 다른 히틀러 예술가로서 히틀러에 관해 파고든 사람은 별로 없었다. 요아힘 페스트Joachim Fest와 알베르트 슈페어Albert Speer가 예외적인 작가들이다. - P10

따라서 이 책은 히틀러에게서 그동안 간과되었던 모습을 발견하는 데 집중한 첫 번째 책이 될 것이다. 실제로 이 책은 출간 뒤 ‘철저하게 새로운 해석‘, ‘근본적인 재평가‘, ‘지금까지 정치나 인물 전기 분야에서 찾아보기 어려웠던 참신한 시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 P11

가장 주목할 것은 한결 복잡해진 히틀러의 모습을 독자들이 "불편하다"
라고 느낀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이 책이 내세운 요점들은 전반적으로설득력이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완전히 서로 다른 이유이기는했지만 유대인 저널과 무려 백인 민족주의 커뮤니티 스톰프런트storm-front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는 점도 고무적이다. 기독교인들은 도덕적 문제에 흥미를 보였다. 이 책에 관한 한층 더 지적인 토론 중 하나가「크리스천투데이 Christianity Today」에 실렸다. - P11

놀랍게도 부정적인 평가는 찾아볼 수 없었다. 「뉴욕타임스」의 평론가는 대체로 호의적이기는 하지만 무뚝뚝한 어조로 이 책을 읽고 나면 울적한 기분이 든다."라고 하면서도 이 책은 "나치즘에 관한 주요 연구들 가운데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며 "아득할 정도로 수많은 디테일"을 동원해 "혼을 빼앗을 정도로 크게 한 방을 먹인다"라고 했다. - P12

이 책은 이후에 나온 많은 책의 토론 주제가 되기도 했다. 그중하나가 존 캐리의 논쟁적인 책 『예술이 뭐가 좋은가 What Good are theArts?」이다. 캐리는 문화의 도덕적, 사회적 가치에 의문을 제기하면서예술을 사랑하는 마음과 인간성에 관한 감각 사이에 직접적인 관련이 없으며, 고급문화가 그것을 향유하는 이들을 반드시 고결하게 만드는것은 아님을 증명하는 근거로서 이 책을 인용했다. - P13

머리말

이 책은 아돌프 히틀러의 삶을 다룬 책이다. 정치적 노력의 궁극적 목표는 예술적 성취여야 한다는 신념과 예술가적 기질에 관한 책이며, 고대 이후로 또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위대한 문화국가를 만들어내겠다는 꿈에 관한 책이다. - P15

그는 진심이었을까? 그가 일으킨 형언할 수 없는 죽음과 파괴에 비추어 볼 때 그의 말을 과연 믿을 수 있을까? 1939년 전쟁 개시 직후,
알베르트 슈페어의 비서는 그가 "우리는 이 전쟁을 빨리 끝내야만 하네. 우리는 전쟁을 원하지 않아. 건설하기를 원하지."라고 말하는 걸 엿들었다. 몇 년 후 비서는 자신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 말이 거짓이었다고 생각해야 할까?" 앞으로 이 책에서 살펴보겠지만, 그 말은 거짓이 아니다.
하지만 그 말은 절반의 진실만을 담고 있다.  - P17

이 책에 묘사된 히틀러는 문화를 권력이 추구하는 목적이자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게 만드는 수단이라고 보는 사람이다. 에른스트 곰브리치Ernst Gombrich의 『서양미술사The Story of Art』는 표현주의의 출현 배경이 ‘철저한 고독‘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했다. - P17

예술적 재능은 독일인들을 장악한 히틀러의 수수께끼 같은 힘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스탈린이 테러를 통해 성취한 것을 히틀러는 유혹을 통해 성취했다. 그는 상징, 신화, 의례, 스펙터클, 사적인 드라마를 매개로 한 새로운 스타일의 정치를 활용하여 대중에게 다가갔다. 당대의 어떤 다른 지도자도 하지 못한 방식이었다.  - P17

하지만 지난 50년간 히틀러에 관한 책들은 그의 삶과 경력에서 예술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음을 무시해 왔다. 지난 50년간 제3제국에서있었던 문화적 삶의 다양한 측면을 다룬 연구들은 있었지만, 히틀러를 다루지는 않았다. 왜일까? - P18

이 책은 전기도 아니고, 제3제국 예술사도 아니다. 다만 히틀러의 예술적 성향을 이해하는 데 직접 도움이 되는 한에서 전기적인 자료나 문화적인 사건들을 다룰 것이다. 그리고 그런 성향이 히틀러의 사적인 삶과 정치적인 삶에 어떻게 작용했는지 알아볼 것이다. 히틀러는 영화를 즐겨 봤지만 예술로서 영화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영화를 괴벨스의 손에 맡겨 프로파간다 목적으로 활용하게 했다. - P19

참고문헌에 관하여

세상의 절반은 다른 절반이 지어낸 것을 믿는다. 전기 작가와 역사가들도 히틀러에 관한 2차 자료를 다룰 때 반드시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지만은 않는다. 그의 사생활, 특히 젊은 시절의 사생활에 관한 기록이 거의 없기에 작가들은 증언자들의 실제 경험인지 의심스러운 사건들에 관해, 그것도 사건 발생 이후 여러 해가 지나 쓰인 책들에 기대왔다. - P20

가장 악명 높은 사례가 아우구스트 쿠비체크August Kubizek의 나의 어릴 적 친구,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Mein Jugendfreund」이다.
이 책은 여러 작가가 젊은 시절 히틀러에 관한 가장 중요한 1차 자료로활용했다. 1905년과 1908년 사이에 쿠비체크는 린츠와 빈에서 히틀러와 알고 지냈다. - P20

1938년 또는 1939년에 원고를 작성했다는 주장과 달리, 쿠비체크는 몇 년 동안 아무것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그는 책의 서문과 본문에 털어놓았듯이, 마르틴 보어만Martin Bormann 같은 당 관계자들로부터 작업에 착수하라는 독촉을 여러 번 받았다. 1943년 7월이 되면 히틀러조차 그가 글을 쓰게 하려면 일시불 지급과 함께 매월 수당 지급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 P21

히틀러와의 친분 때문에 구금되었던 쿠비체크는 린츠의 지역 기록물보관소 사서인 프란츠 예칭어Franz Jetzinger와 연락이 닿았다.
1948년 당시 예칭어는 히틀러의 젊은 시절에 관한 글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직접적인 정보를 제공해 줄 사람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 P21

1953년에 출간된 『나의 어릴 적 친구,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Mein Jugendfreund』는 히틀러의 젊은 시절에 관한 유일한 직접적인 증언으로 알려졌다. 영국에서는 『젊은 히틀러: 우리들의 우정 이야기Young Hitler: The Story of Our Friendship』, 미국에서는 내가 본 젊은 히틀러The young Hitler I knew』라는 제목으로도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이 책은 거의 반세기 전의 일을 서술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주의해야 할 이유가 충분했다. 그러나 히틀러의 생애 초기를 설명하려고 필사적이었던 역사가들에게는 달리 믿을 만한 정보가 없었고, 그들에게 이 책은 마치 금광처럼 여겨졌다. 휴 트레버-로퍼Hugh Trevor-Roper는 쿠비체크책의 영국판에 지나치게 감상적인, 하지만 오류가 많은 서문을 썼다. - P22

이에 예칭어는 1956년 자신의 책 『히틀러 유겐트Hitlers jugend』*로 응답했다. - P22

사실 그는 예칭어에게 "글을 좀 더돋보이게 하기 위해서는 진짜 작가에게 맡겨서 구체화할 필요가 있다."
라고 말했다. 게다가 출판된 책은 쿠비체크의 ‘회고‘와 상당히 대조적이다. ‘회고‘는 분명 히틀러와 나치당의 환심을 사려는 목적을 가졌던 데반해, 책은 고인이 된 독재자에 대한 애도를 전후 대중들로부터 감추려는 의도를 가졌다. - P23

 오스트리아 작가 브리지트 하만Brigitte Hamann은 출판사 슈토커로 넘어간 그의 초기 원고를 상상력이 풍부한한 편집자가 수정, 발췌했다고 주장했으나, 출판사는 그런 주장을 부인했다. 출판사의 책임자는 ‘쿠비체크가 제공한 완성된 원고를 "기록물로서의 가치 유지를 위해 현재까지) 전혀 수정하지 않았다."라고 주장했다. - P24

빈에서 보낸 히틀러의 생활을 밝히는 데에도 비슷한 문제가 발생한다. 이와 관련해서도 확실한 정보를 구할 수 없는 일부 역사가는 라인홀트 하니슈Reinhold Hanisch와 요제프 그라이너Josef Greiner라는 두불한당이 몇십 년 후 출판한 이야기에 의지해야 했다. - P24

정치 입문 후의 히틀러에 관한 다양한 인물들헤르만 라우쉬닝,
한스 프랑크, 에른스트 한프슈탱글, 요하네스 폰 뮐런쇤하우젠, 헨리에 테 폰 시라흐, 하인츠 하인츠, 아르노 브레커, 프리델린트 바그너의 묘사는 사실이라면 흥미로운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의 묘사에서는 명백한 날조와 사실을 구분해 내기가 매우 어렵다. (중략).
알베르트 슈페어의 두 권짜리 회고록 『기억: 제3제국의 중심에서 Inside the Third Reich』와 『슈판다우: 비밀일기 Spandau: The Secret Diaries』도 나름의 문제가있다.  - P25

하지만 전후 회고록이라는 또 다른 범주가 있다. 이는 히틀러의 수행원이나 정부 관료들이 썼다. - P25

문화와 예술에 관한 히틀러 자신의 전방위적인 발언은 『나의 투쟁MeinKampf』, 그의 연설, 당대회의 문화 세션에서 했던 장황한 말들 그리고 이른바 식탁에서의 잡담, 독백에서 발견된다. 이 책에서는 랄프 만하임Ralph Manheim이 번역한 표준영어본 『나의 투쟁』을 이용했다. - P26

이 글은 다음과 같은 기관에 보관된 기록물들을 참고했다. 린츠의 오버외스터라이히 국가기록보관소(아우구스트 쿠비체크의 ‘회고‘와 그가 프란츠 예칭어와 서신 교환한 내용), 뮌헨의 현대사 연구소와 바이에른중앙기록보관소, 베를린의 연방기록보관소, 워싱턴의 국립기록보관소(통합 심문 보고서 번호4-린츠: 히틀러 미술관 및 도서관, 1945년 12월 15일 OSS 보고서, 정밀 심문 보고서 번호 12-「헤르만 보스」, 1945년 9월 12일OSS 보고서, 통합 심문 보고서 번호 4에 관한 1946년 1월 15일 보충자료「린츠」, 정밀 심문 보고서 번호 1-「하인리히 호프만」, 1945년 7월 OSS 보고서, 1946년 6월 5일 파울라 볼프 심문 보고서), 뉘른베르크의 독일 국립박물관(한스 포세의 일기), 워싱턴의 미군 군사박물관(히틀러 수채화 네 점)그리고 가르미슈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기록보관소(슈트라우스와 비니프레트 바그너 사이의 서신 교환 내용). 나치당 중앙기록보관소에서 수집한 기록물들은 1945년 미군에게 압수되어 1964년 후버 연구소에서 마이크로필름으로 기록된 뒤 베를린 도큐먼트 센터에 보관되었다가 현재는 베를린의 연방기록보관소에 보관되어 있다. 이 책은 마이크로필름을 참고했다. - P27

1장

마지못한
독재자

나를 대신해 줄 사람을 찾을 수만 있었다면난 절대 정치에 입문하지 않았을 것이네.
나는 예술가나 철학자가 되었을 거야.

-정치에 입문하고 몇 년 뒤 참모들에게 - P30

보헤미안 예술 애호가

작가 토마스 만Thomas Mann은 아돌프 히틀러가 본질적으로 예술가이며, 예술가적 본성으로 독일과 유럽을 꼼짝 못하게 마법의 주문을 걸 수 있었다는 사실을 최초로 지적했다. 이 사실은 만이 예술가였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 P31

체임벌린이 보기에 히틀러는 "광적인 사람이기는커녕 ・・・ 광적인 사람"²과 가장 거리가 먼 사람이었고,
정치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정치인과 가장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는 머리가 아닌 가슴에 호소하며, 사람들을 지배하는 그의 힘은 눈과 손동작으로 표현된다고 했다. - P31

1장 보헤미안 예술 애호가


2‘not a fanatic...‘ Letter of 7 October 1923 in Hartmut Zelinsky, Richard Wag-ner: Ein deutsches Thema, 169. - P614

 ‘과연 히틀러는 정치를 미사여구나 과장된 행렬, 가두행진과 정당 집회, 전쟁의 스펙터클보다 중요하게 여긴 적이 있을까? 알베르트 슈페어Albert Speer라면 강하게 부인했을 것이다. 그는 제3제국을 겪은 누구보다 히틀러에 관해 잘 알았다. 슈페어는 나치 전범 수용소인 슈판다우 Spandau 감옥에서 이 문제에 관해 20년간 생각한 뒤 히틀러가 평생토록 진심 어린 천생 예술가였다는 결론을 내렸다. - P32

 어떤 이들은 이를 본능적으로 알아차리기도 했는데 독일의 덕망 있는 대통령, ‘그러나 경직되고 둔감한 정신의 소유자인‘⁵ 파울 폰 힌덴부르크 Paulvon Hindenburg조차 히틀러를 가리켜 곧잘 ‘보헤미안 상등병‘⁶이라 했다. 비록 이는 히틀러가 오스트리아가 아닌 보헤미아 출신이라는 오해에서 비롯된 말이었지만, 힌덴부르크가 히틀러에게서 낭만적인 예술가기질을 감지했음을 보여준다. - P32

5 ‘of rigid mind...‘ John W. Wheeler-Bennett, The Nemesis of Power, 449.

6 ‘‘that bohemian corporal‘ Fest, Hitler, 781. - P614

이러한 예술적 취향이 어디에서 기원했는지는 미스터리다. 그 원인은 확실히 유전도, 환경도 아니었다. 그는 교양 있는 집안 출신이 아니었다. 아버지 알로이스 히틀러Alois Hitler는 세련되지 못한 세관원이고 어머니 클라라 히틀러Klara Hitler는 교육받지 못한 가정주부였다. - P32

1903년 아버지의 급작스러운 사망 이후 어머니는 그를 다른 학교로 전학시켰지만 역시나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예술가적 기질이라 여겨지는 어떤 것, 그러니까 그리기를 좋아하고 곧잘 공상에 빠지며 규율을 싫어하고 독립적인 정신을 추구하는 성향이 이미 그의 마음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의 누이 파울라 히틀러Paula Hitler에 따르면 그는 ‘건축과 회화, 음악‘에 관한 ‘비상한 관심‘을 키워 나갔다.⁷ - P33

7 According to his sister Paula... Interview with Paula Wolf, 5 June 1946, 2. - P614

16세가 되던 해인 1905년 가을, 히틀러가 학교에서 낙제하자 어머니는 고민 끝에 그를 자퇴시켰다. 예술가의 자유로운 삶을 살고자 했던 그의 꿈은 현실이 되었다. - P33

 그는 20여 년이 지난 후 쓴 『나의 투쟁Mein Kampf』에서도빈에 도착하던 순간의 감동에 관해 열변을 토했다. 유명한 회화보다 그를 압도했던 것은 바로 공공건축물들이었다. - P33

그는 자신이 본 것들에 너무나 매혹된 나머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간단한 건축 스케치도 했다. 언젠가 쿠비체크를 위해 지어주겠다고 약속하며 빌라의 외관과 평면도를 그리기까지 했다.⁹ 신축 빌라를 그린드로잉 한 점과 푀스틀링베르크의 레스토랑을 그린 수채화 한 점, 린츠 오페라하우스 실내 스케치 두 점이 남아있다.¹⁰ - P34

9the exterior and floor plan... August Kubizek, Adolf Hitler, Mein Jugendfreund,
45-6; Billy F. Price, Adolf Hitler: The Unknown Artist, figs 28, 29, 100.

10 an ink drawing... Kubizek, after 176; Price, fig. 59, 107; restaurant in Price,
fig.27, 100; opera house in Kubizek, after 176 and 192; Price figs 57, 58, 107. - P614

하지만 그가 결국 자신의 운명이라 느낀 것은 화가의 길이었다.
1907년 그는 마침내 집을 떠나 빈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입학을 거절당해 심한 충격을 받았다. - P34

그 후 몇 년 동안은 그의 삶에 관하여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의 거주지 등록 서류에 근거한 빈 경찰의 기록이 조금 남아있을 뿐이다.
이 기록을 살펴보면 카페나 공원, 싸구려 숙소, 노숙자 보호소에서 잠을자는 사회 밑바닥까지 내려간 젊은이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그는 나의 투쟁에서 "이때가 나의 가장 슬픈 시절이었다."¹¹라고 했다.  - P35

11
"This was the saddest period... Mein Kampf, 21. - P614

예술적인 훈련을 받지 못했고 재능도 없는 그로서는 빈의 풍경화를 그려 파는 것으로 겨우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한 끼 식사에 작품 한점을 교환해야 할 때도 있었다.¹³ "하지만 점차 형편이 나아졌고 거래에도 능숙해졌다. 일주일에 대여섯 점 정도를 완성해서 괜찮은 수입을 올리기도 했다. 그보다 중요한 변화는 남는 시간에 독서를 할 수 있었다는것이다. 그는 예술사, 문화사, 건축사에 관한 책들을 읽었다.¹⁴ - P35

13 At times he had to barter... Price, figs. 276, 152, 364, 172(examples).

14 ‘art history, cultural history...‘ Letter of 29 November 1921 in Jäckel/Kuhn, eds,
Hitler: Sämtliche Aufzeichnungen, 1905-1924, 525. - P615

역사가들은 그가 실제로 얼마나 많은 책을 읽었는지, 또 제대로 이해는 했는지 의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히틀러는 이 시기에 ‘내 행동의 화강암 같은 반석‘¹⁷을 형성할 수있었다고 주장했다. - P36

17
‘the granite foundation... Mein Kampf, 22. - P615

어쨌거나 나의 투쟁을 쓰게 되었을 때,
그는 병역 의무를 기피했다는 의혹으로 생길 정치적인 위험을 피하고자 많은 변명을 해야 했다. 독일에 입국한 시기를 1년 앞당기는 식으로 조작함으로써, 오스트리아 경찰의 추적을 피하려고 무국적자로 등록했던사실을 은폐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를 떠난 것은 순전히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었다고 주장했다. ‘합스부르크 국가에 대한 혐오감‘¹⁹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 P36

19
‘inner revulsion for the Habsburg state‘ Franz Jetzinger, Hitler‘s Youth, 157. - P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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