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우리는 서로의 집에 가지 않는다. 가족의 얼굴을 보거나 친구를 소개하지도 않는다. 요컨대 누구에게도 이 세상 어떤사람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은 것이다. - P27
친어머니는 내장 쪽에 생긴 암으로 네가 세 살 때 세상을 떴다. 거의 기억이 없다. 얼굴도 생각나지 않는다. 네가 다섯 살 때 아버지가 재혼했고, 이듬해여동생이 태어났다. 즉 지금의 어머니는 새어머니인 셈인데, 아버지보다는 그 어머니에게 그나마 친밀감이 생기는 것 같다‘는 요지의 말을 네가 한 번 한 적이 있다. - P28
또하나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는 것-너는 가족 이야기를 할 때면 어째서인지 항상 자기 손바닥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마치 줄거리를 따라가려면 그 위에 새겨진 손금(인지 무언지)을 꼼꼼히 해독하는 일이 필수불가결하다는 듯이. - P29
너를 처음 만났던 때는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장소는 ‘고등학생 에세이 대회 시상식장이었다. 5등까지 입상한 학생들이 그곳에 불려왔다. 나와 너는 3등과 4등으로 옆자리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 P29
나는 특별히 글을 잘 쓰는 편이 아니다. 책 읽는 건 어릴 적부터 무척 좋아해서 틈날 때마다 손에 잡고 살았지만, 직접 글을 쓰는 재능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국어 시간에 우리 반모두가 대회에 낼 에세이를 의무적으로 써야 했고, 그중 내가쓴 글이 뽑혀서 심사위원회에 보내졌으며, 최종심사에 남더니 생각도 못한 높은 등수로 입상까지 했다. - P30
너는 외할머니 이야기를 썼다. 한 고독한 노년 여성과 한고독한 소녀 사이에 오간 마음의 교류에 대해서. 그렇게 만들어진 소소하고 진실된 가치관에 대해서, 차밍한, 사람의 마음을끄는 에세이다. 내가 쓴 글 따위보다 몇 배는 훌륭하다. 어째서 내 글이 3등이고 네가 4등인지 이해할 수 없다. - P31
다섯 명의 입상자가 차례로 단상에 올라 표창장과 기념 메달을 공손하게 받아든다. 1등상을 받은 키 큰 여자아이가 짧게수상소감을 말한다. 상품은 만년필이었다(만년필 회사가 대회후원사였다. 나는 그 뒤로 그 만년필을 오랫동안 애용했다). 길고 따분한 시상식이 끝나갈 즈음, 수첩 메모난에 내 주소와 이름을 볼펜으로 적고 그 장을 찢어내 너에게 살짝 건넨다. - P32
네 편지는 일주일 후 나에게 도착한다. 멋진 편지다. 나는적어도 스무 번쯤 그 편지를 읽는다. 그리고 책상 앞에 앉아그날 부상으로 받은 새 만년필로 긴 답장을 쓴다. 그렇게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우리는 둘만의 교제를 시작한다. 우리는 연인 사이였을까? 간단하게 그런 이름을 붙여도 될까? 나는 알 수 없다. - P33
5
그 건물의 문을 민 것은 도시에 들어오고 사흘째 되는 날 저녁이었다. 이렇다 할 특징 없는 오래된 석조 건물이다. 강을 따라 한동안 동쪽으로 걷다가 옛 다리를 마주보는 중앙 광장을 지나면 나온다. - P34
무거운 나무문이 낮게 삐걱이며 안쪽으로 열리자 어둑한 정사각형 방이 보였다. 사람은 없다. - P34
마주보는 정면에 문이 있었다. 간소한 나무문으로, 얼굴 높이쯤에 작은 불투명 창이 있고 거기에도 ‘16‘이라는 숫자가 고풍스러운 장식체로 적혀 있다. 불투명 유리 너머로 희미한 불빛이 보였다. - P35
카운터 안쪽에는 서고로 통하는 걸로 보이는 짙은 색 문이있었다. 그렇다면 이곳은 역시 ‘도서관‘일 것이다. 책은 한 권도 보이지 않지만 어디를 보나 도서관다운 분위기가 남아 있었다. 크건 작건, 오래됐건 새롭건, 전 세계 도서관이 공통적으로 지닌 특별한 분위기다. - P36
너는 장부에서 눈길을 들고 왼손에 연필을 쥔 채 잠시 내 얼굴을 바라보고는 (그렇다. 너는 왼손잡이다. 이 도시에서도, 이곳이 아닌 도시에서도) 고개를 가로젓는다. "아뇨, 뵌 적 없는 것 같습니다." 너는 대답한다. 말투가 깍듯한 건 아마 너는 아직 열여섯 살 그대로인데 나는 열일곱 살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너에게 나는 이제 훨씬 나이 많은어른 남자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지만 시간의 흐름이 가슴을 찌른다. - P38
나는 천천히 그 약초차를 마신다. 걸쭉한데다 특유의 쓴맛이 나서 결코 편하게 마실 수 있는 차는 아니다. 그러나 그 양분이 아직 완전히 아물지 않은 내 눈을 치유하고 마음을 진정시킨다. 그렇게 특별한 용도를 지닌 차다. - P39
방은 따뜻하고 조용하다. 시계가 없어도 무음 속에서 시간은 흘러간다. 발소리를 죽이고 담장 위를 걸어가는 야윈 고양이처럼. - P39
6
우리가 그리 자주 편지를 주고받은 건 아니다. 대략 이 주일에 한 번꼴이었다. 그러나 편지의 내용은 매번 꽤 길었다. - P4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