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유언장과 빨간도깨비
정신을 차리니 침대 위였다. 눈을 뜨자 안경 너머로 낯선 천장이 보였다. 잠시 후에야 사야카는 여기가 ‘화장‘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로 몸을 던진 기억이 났다. 그렇다기보다 거기까지밖에 기억이 없었다. 옷도 갈아입지 않고그대로 잠든 모양이다. - P74
"으엑, 3시 1분!" 법사는 오후 3시부터라고 유코가 그랬다. 탐정 말마따나 사야카는 사이다이지 가문의 혈연이 아니니까 참가 의무는 없지만, 불참할 생각은 아니었다. "죄송해요. 당장 갈게요!" 사야카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허둥지둥 방을 뛰쳐나왔다. - P75
사야카는 사람들에게 "늦어서 죄송합니다" 하고 고개 숙여 사과한 후에 탐정 옆자리에 앉았다. 그는 짓궂은 시선을 던지며 "이야. 좋은 아침이야"라면서 어째선지 아침 인사를 했다. "어?!" 사야카는 한순간 어리둥절했다. 그러고 나서야 놀라서 작게 소리쳤다. "어, 어떻게? 내가 잔걸 알았어요?" (중략). "이제 다 모인 것 같군요." 도라쿠 스님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방정면에 위치한 작지만 훌륭한 제단에서 고인의 영정사진이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 P76
"승려로서 한 말씀을 드리자면, ‘돈과 지위에 너무 탐욕을 부리다간 신세를 망칩니다. 물론 여기에는 그런 분이 한 분도 안 계시리라 생각합니다만, 아무쪼록 조심 또 조심하십시오." 스님은 중얼거리듯이 말하면서 합장했다. (중략). 이로써 사십구재 법사는 대충 끝난 모양이다. 이제 사람들의 관심사는 딱 하나다. 사야카는 뜨거운 시선이 자신에게 쿡쿡 박히는 느낌을 받았다. - P78
"다행히 이 자리에 관계자 여러분이 모두 모여 계시네요. 기왕 모인 김에 아직 처리하지 못한 사안을 마무리하고 싶은데 어떠신가요. 여러분?" 에이코가 말하는 ‘아직 처리하지 못한 사안은 물론 유언장 개봉이다. 사람들이 한순간 술렁였지만 결국은 또 이의 없소!‘라는 분위기로 수렴됐다. - P79
"그럼 개봉에 앞서 한 가지만 말씀드릴게요. 사이다이지 가문의 친인척이 아니신 분은 방에서 나가주시기 바랍니다. 그게 좋겠죠, 마사에 씨?" "그러게. 미안하지만 나가들 줬으면 해." 마사에의 말에 다카자와 나오토, 도라쿠 스님, 고이케 부부는 얌전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큰 방에서 나갔다. 사람 수가 줄어들자 큰방은 더 조용해졌다. - P80
이리하여 큰 방에는 사이다이지 가문의 친인척만 남았다. 사야키는 문제의 갈색 봉투를 보란 듯이 새삼스레 높이 쳐들었다. 그리고 중대한 한마디를 더 꺼냈다. "누가 가위 좀 주세요! 가위가 없으면 개봉을 못해요!" 방에 있던 사람들 대부분이 "어, 가위, 가위?" 하며 허둥지둥 호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가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었지만, 대신에 칼 한자루가 사야카 눈앞에 쑥 디밀어졌다. 칼을 내민 사람은 쓰루오카 가즈야였다. "정 없으면 이걸 사용해." - P81
‘유언장 PART 3‘라고 적힌 갈색 봉투가 나오지않아서 사야카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 P82
나, 사이다이지 고로가 남긴 유산은 아래와 같이 분배할 것.
구체적인 내용은 여기서부터다. 사야카는 한 구절, 한 글자도 틀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읽어 나갔다.
첫째, 사이다이지 출판의 주식은 전부 첫째 딸 에이코에게 물려준다.
그 순간 에이코의 얼굴에 안도하는 표정이 번졌다. 고로 씨가 소 - P83
사야카는 표정 변화 없이 계속 낭독했다.
둘째, 오카야마시에 있는 사이다이지 가문의 토지, 건물 및 거기 딸린 비품은 여동생 마사에에게 물려준다. 마사에는 그것들을 적절히 관리하고 활용할 것.
이건 사이다이지 가문의 본가를 가리키는 거라고 사야카는 이해했다. - P83
마사에는 미동도 없이 무표정을 유지했다. 사야카는 다음 항목을 읽었다.
셋째, 내가 소유한 그림, 골동품, 미술 공예품은 전부 셋째 딸 유코에게 물려준다. 유코는 그것들을 적절히 관리하고 활용할 것.
(중략). 객관적으로 보자면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오카야마의 문학관에서 학예사로 일하는 유코는 문학은 물론 예술 전반에 정통한 재원이라고 들었다. - P84
사야카는 수긍하고서 유언장을 읽어 나갔다.
넷째, 내가 오랜 세월 수집한 모든 장서는 둘째 아들 게이스케에게 물려준다. 게이스케는 그것들을 적절하게 관리하고 활용할 것.
자기 이름이 나오자 게이스케는 막내 유코와 비슷하게 숙이고있던 고개를 들고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 P84
현재까지 유언장의 내용에 특별히 부자연스러운 부분은 없었다. "좋아, 이 기세로 마지막까지 가자!‘ 사야카는 그렇게 기원하며 다음 부분을 읽었다.
다섯째, 비탈섬의 토지, 건물 및 그에 딸린 비품은 아내가나에게 물려준다.
(중략). 사야카는 한층 큰 목소리로 "다만!" 하고 말을 이었다.
다만 몸 상태가 좋지 못한 가나에를 대신하여 죽은 여동생 시즈에의 아들인 쓰루오카 가즈야에게 관리를 맡긴다. 그것들을 적절하게 관리하고 활용해 주는 대가로 쓰루오카 가즈야에게 현금 3천만엔을 증여한다. - P85
사야카는 환희에 젖은 쓰루오카의 얼굴을 매섭게 노려본 후 다시유언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고인의 유언은 이제 얼마 안 남았다.
여섯째, 오랜 세월 사이다지 이 가문을 위해 일해 준 고이케 기요시, 고이케 시노부에게는 현금 1천만 엔씩 증여한다. 마찬가지로오랜 세월 주치의로서 헌신적인 모습을 보여 준 다카자와 다다나오의 아들 나오토에게 현금 1천만 엔을 증여한다. - P86
사야카는 유언장에 시선을 되돌렸다. 그리고 항목별로 작성된유언의 마지막 항목을 낭독했다.
일곱째, 이미 명기한 것 이외의 현금, 예적금, 유가증권, 부동산 등은 3등분하여 에이코, 게이스케, 유코에게 물려준다.
거액의 유산을 물려받은 3남매는 일제히 영정사진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유산 분배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은 이로써 전부 끝났다. - P87
‘아아, 아빠, 아주 안타까운 사실을 보고해야겠어. 우리 법률사무소에 떨어질 국물은 한 방울도 없나봐. 주치의와 고용인에게는 1천만 엔이나 증여했으면서, 왜 고문 변호사에게는 한 푼도 남겨 주지않는건데? 아빠, 혹시 고로 씨한테 미움받았어?‘ "뭐, 이제 와서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사야카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유언장을 봉투에 넣었다. - P88
2
유언장 개봉이라는 커다란 이벤트가 끝나자 사이다이지 가문의 친인척들은 제각각 자리에서 일어나 큰 방을 나섰다. 어떤 사람은 심각한 표정, 어떤 사람은 상쾌한 표정으로. 쓰루오카 가즈야는 콧노래라도 부를 것처럼 기분 좋은 표정으로 방을 나섰다. 한편 사야카는 막중한 임무를 무사히 마쳤다는 안도감이 가슴에 가득했다. - P88
돔 모양의 천장이 원형 플로어를 뒤덮고 있다. 과연, 전망실이 틀림없다. 주위를 둘러보자 커다란 창문 여러 장이 띠 모양으로 줄지어 있었다. 동시에 여기는 휴게실이기도 하리라. 여기저기에 세련된 디자인의 의자와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또한 도서실이기도 한모양이다. 플로어의 절반쯤 되는 공간에 키가 큰 서가가 여러 개 늘어서 있었다. 서가는 고인이 남긴 수많은 장서로 가득했다. "우와, 굉장하네." 사야카는 무심코 감탄에 찬 목소리를 내뱉었다. - P89
다카오는 사야카를 원망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만에 하나 유언장에 ‘전 재산을 탐정 고바야카와에게 물려준다‘는 내용이 있었으면 어쩔 건데? 당신 때문에 인생 최고의 순간을 맛볼 기회를 놓치는 거잖아." "아하. 그거라면 안심해요, 고바야카와 씨. 당신은 아무것도, 맛볼 기회를 놓치지 않았으니까." - P90
"응. 확실히. 원래 건물 자체가 비탈섬의 높직한 곳에 있는 데다, 돔 모양의 이 공간은 건물 옥상에 있잖아. 경치가 좋을만도 하지." 다카오의 설명을 들으며 사야카는 다양한 각도에서 경치를 바라보았다. 서가가 놓인 방향-그쪽이 북쪽인 듯하다ㅡ을 제외하고, 띠 모양으로 줄지은 창문을 통해 동쪽, 서쪽, 남쪽을 한눈에 바라볼수 있다. 특히 지금 시각은 서쪽 창문으로 비쳐드는 세토내해의 석양이 예뻤다. - P92
"흠, 고바야카와 씨. 혼자 이 경치를 바라보며 지질한 생각에 잠겨 있었던 거로군요." "지질한 생각 안 했어. 그냥 고독을 곱씹고 있었을 뿐이야." - P92
"그러게. 하지만 쓰루오카 가즈야의 이야기로는, 그가 이 섬에 마지막으로 왔던 23년 전에는 이 구체가 없었대." - P92
정확하게는 책이라기보다 책 모양의 오브제라고 해야 할까. 만져서 확인할 수는 없지만 재질은 분명 종이가 아니다. 일종의 금속이다. 녹청이 쓴 듯한 독특한 색깔과 질감으로 보건대 청동이리라. 다시 말해 청동으로 만든 책인 셈이다. 크기는 보통 단행본보다 훨씬 크고, 형태도 정육면체에 가깝다. 두께도 백과사전이나 국어사전 못지않게 두껍다. -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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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조금 더 흘렀다. 해가 세토내해의 서쪽으로 가라앉자, 비탈섬에도 밤이 찾아왔다. 시곗바늘이 가리키는 시간은 오후 7시. ‘화강장‘을 방문한 사람들이 1층 식당에 다시 모여 앉았다. - P94
하지만 기적 같은 일품도, 식탁의 싸늘한 분위기를 깨부수지는 못했다. 이유는 분명했다. 식탁을 둘러싼 사람들 대부분이 중요 인물에 대한 중요한 화제를 피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중요 인물은 쓰루오카 가즈야다. - P95
"그건 그렇고 말이야, 쓰루오카 군." 갑자기 멀리 떨어진 자리에서 아쓰히코가 말을 꺼냈다. "장인어른의 아들도 아닌 처남이 설령현금만이라도 유산을 상속받다니 의외였어." 약간 커지고 높아진 목소리로 추측건대, 술에 좀 취했으리라. 그래서 무심코 본심이 튀어나온 것이다. - P95
"야, 유코! 뭐야, 이 녀석. 뭐가 그렇게 불만인데? 아까부터 다들렸어!" 쓰루오카는 의자를 박차듯이 일어섰다. 한편 유코도 겉보기와달리 겁 없는 성격인 듯했다. "불만이 있을 리가요. 전부 아빠의 유언인데요. 뭘!" - 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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