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네가 나에게 그 도시를 알려주었다. - P11
너는 걷다 지친 듯 여름풀 위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본다. 작은 새 두 마리가 나란히 상공을 가로지르며 날카롭게 울었다. 침묵 속에서 푸른 땅거미의 전조가 둘을 감싸기 시작한다 - P12
"도시는 높은 벽으로 사방이 둘러싸여 있어." 너는 이야기를 시작한다. 침묵의 밑바닥을 뒤져 말을 찾아 온다. 맨몸으로심해에 내려가 진주를 캐는 사람처럼. "그다지 큰 도시는 아니야. 하지만 한눈에 다 들어올 만큼 작지도 않아." 네가 그 도시를 입에 올린 건 이번이 두번째다. 그렇게 도시에는 사방을 둘러싼 높은 벽이 생겼다. - P12
"진짜 내가 사는 곳은 높은 벽에 둘러싸인 그 도시 안이야." 너는 말한다. "그럼, 지금 내 앞에 있는 너는 진짜 네가 아니구나." 당연히 나는 그렇게 묻는다. "그래. 지금 여기 있는 나는 진짜 내가 아니야. 대역에 지나지 않아, 흘러가는 그림자 같은 거야." - P13
"아니. 아무나 자유롭게 들어가진 못해. 그곳에 들어가려면 특별한 자격이 필요해. 하지만 너는 들어갈 수 있어. 네게는그 자격이 있으니까." "특별한 자격이라는 게 뭘까?" 너는 가만히 미소 짓는다. 하지만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래도 그곳에 가기만 한다면, 나는 진짜 너를 만날 수 있는 거지?" - P14
그 도시에 가고 싶다고, 나는 얼마나 간절히 바랐던가. 그곳에서 진짜 너를 만나고 싶다고. - P15
나는 그 도시에서 진짜 너와 만나는 상상을 한다. 도시 외곽에 아름답게 우거진 드넓은 사과나무 숲과 강에 놓인 세 개의돌다리와, 보이지 않는 밤꾀꼬리의 지저귐을 마음속에 그린다. 그리고 상상한다. 진짜 네가 일하고 있는 작고 오래된 도서관을 "너를 위한 장소는 늘 그곳에 마련되어 있어." 네가 말한다. - P15
"꿈 읽는 이‘가 될 거야"라고 너는 소리 낮춰 말한다. 중요한 비밀을 털어놓는 것처럼. 그 말에 나는 무심코 웃고 만다. "저기, 나는 내가 꾼 꿈도제대로 기억 못해. 그런 인간이 ‘꿈 읽는 이‘가 되기란 상당히 어려울 텐데." - P16
"어째서인지, 너는 모르겠어?" 나는 안다. 그렇다, 내가 지금 가만히 어깨를 안고 있는 것은 너의 대역일 뿐이다. 진짜 너는 그 도시에 살고 있다. 높은 벽에 둘러싸인, 아득히 먼 수수께끼의 도시에. - P17
2
이 실제 세계에서, 나와 너는 조금 떨어진 곳에 살고 있다. 아주 멀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충동적으로 곧장 만나러 갈수 있을 정도로 가깝지도 않다. 전철을 두 번 갈아타고 한 시간 반쯤 걸려야 네가 사는 도시에 다다를 수 있다. - P18
나는 바다 근처 조용한 교외 주택가에 살고, 너는 훨씬 크고번화한 도시 중심부에 살고 있다. 그 여름, 나는 고등학교 3학년, 너는 2학년이다. - P18
네가 우리 동네에 올 때면 주로 단둘이 강가나 바닷가를 산책한다. 도심 한가운데 있는 너희 집 근처에는 강이 흐르지 않고 물론 바다도 없기 때문에, 너는 우리 동네에 오면 제일 먼저 강이나 바다를 보고 싶어한다. 그곳을 가득 채운 자연의 물-너는 그것에 마음이 끌린다. "물을 보고 있으면 왠지 마음이 차분해져"라고 너는 말한다. "물이 내는 소리를 듣는 게 좋아." - P19
물론 내가 신체적 욕구를 품지 않았던 건 아니다. 열일곱 살의 건강한 소년이 아름답게 가슴이 부푼 열여섯 살 소녀를 앞에 두고, 하물며 그 부드러운 몸에 팔을 두르면서 성적 욕구에 휩싸이지 않을 리 없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좀더 나중으로 미뤄도 되리라고, 나는 본능적으로 느낀다. - P20
그런데 그렇게 이마를 맞대고서 우리는 대체 무슨 이야기를나눴을까? 지금 와서는 기억나지 않는다.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화제를 하나하나 가려내기가 불가능해진 것이라. - P21
주로 네가 도시의 큰 틀을 말해주면 내가 그에 대해 실제적인 질문을 하고 네가 대답해서 보충하는 식으로 도시의 구체적인 세부가 결정되고 기록되어갔다. 그 도시는 원래 네가 만들어낸 것이다. 혹은 네 안에 예전부터 존재했던 것이다. - P21
3
가을, 짐승들의 몸은 다가올 추운 계절에 대비해 눈부신 황금색 털로 뒤덮인다. 이마에 돋은 외뿔은 희고 날카롭다. 그들은 차가운 강물에 발굽을 씻고, 가만히 고개를 뻗어 붉은 나무열매를 탐하고 금작화 이파리를 씹는다. 아름다운 계절이었다. - P22
한순간 모든 것이 조각상처럼 고정된다. 움직이는 건 바람에 부드럽게 나부끼는 황금색 털뿐이다. 그런데 대체 무엇을 보는걸까? 짐승들은 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 허공을 응시하고 미동도 하지 않는다. 그렇게 뿔피리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뿔피리의 마지막 울림이 허공으로 빨려들어가 사라지면, 그들은 앞발을 가지런히 모아 몸을 일으키고, 혹은 기지개를 켜서 자세를 가다듬고는 일제히 걷기 시작한다. - P23
도시를 둘러싼 벽에는 문이 하나뿐이다. 그 문을 여닫는 일이 문지기의 소임이다. 두꺼운 철판이 가로세로로 박힌, 육중하고 튼튼해 보이는 문이다. - P24
문지기는 매우 억세고 우람한, 그러나 자기 일에는 지극히충실한 사내다. 정수리가 뾰족한 머리를 말끔히 깎았고 얼굴도 매끈하다. 매일 아침 커다란 냄비에 물을 끓여서 크고 날카로운 면도칼로 공들여 머리카락과 수염을 깎는다. - P24
문 양쪽 벽에는 여섯 개의 망루가 있다. 오래된 나선형 나무계단이 있어 누구든 올라갈 수 있다. 망루에서는 짐승들의 서식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보통 때는 아무도 그런 곳에 오르지 않는다. 도시 주민들은 짐승들의 생활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듯하다. - P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