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전략).
시선을 멀리 옮기자 작은 섬을 성큼 건너는 것처럼 느껴지는 거대한 다리의 실루엣이 보였다. 거인의 다리 같은 교각은 섬의 한복판 언저리를 짓밟듯이 우뚝 서 있었다. 그 교각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묘하게 각진 건조물이 달빛을 받아 은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 P7

한밤에 세토내해를 나아가는 작은 배에서 그런 불상사가 발생하는 것만큼은 진심으로 피하고 싶었으므로, 사기누마는 선배의 착각을 점잖게 정정했다.
"그게 아니라, 저기 은색으로 빛나는 건물 말이에요."
"엥, 은색? 어디 어디?"
기타자키는 자신의 자랑거리인 리젠트 머리 아래에 오른손을 펴서 붙이고는 어두운 바다에 시선을 모았다. 큰 도시의 중학교에서는 이미 멸종됐다는 소문이 도는, 리젠트 머리의 불량 학생. - P8

그러자 기타자키 뒤쪽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요코시마섬에 있는 은색 저택이라. 그럼 주몬지 저택이겠지. 주몬지건설 사장이지은 희한한 저택 말이야." - P9

 지금은 세기말에 가까워진 1995년 3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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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거품경제가 꺼지고 몇 년이 지난 올해 한신 · 아와지 대지진이 발생해 몇천 명이 목숨을 잃는가 싶더니, 얼마 전에는 도쿄 지하철에 사린이라는 맹독이 살포돼 세상을 벌벌 떨게 했다. 그렇듯시대가 격동하는 가운데, 오카야마현 가사오카시에 사는 중학생 3인조-그중 두 명은 다음 달에 고등학생이 되지만—는 무슨 이유로 한밤중에 몰래 배를 타고 바다를 나아가고 있는 걸까. - P9

"그런데 지금 저희가 향하는 섬은 그 희한한 저택이 있는 섬이 아니죠?"
"응, 거기는 아니야. 우리 목적지는 더 작은 섬. 오카야마에서도 손꼽히는 부자가 소유한 그야말로 아득히 먼 바다의 외딴 섬이지." - P10

‘그랑께‘는 오카야마 지역에서 애매한 긍정을 의미하는 사투리다. 사기누마도 이쪽 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이 말의 올바른 사용법을 익혔다. - P10

"아냐, 아냐, 문제없어. 섬은 개인 소유라도 바다는 우리 모두의것이니까."
과연, 하고 한순간 수긍할 법한 논리지만 어디까지나 궤변 아닐까. ‘한밤중에 남의 섬에서 낚시하는 행위‘는 역시 도의적으로 인정받지 못할 것이다. 사기누마가 불안을 감추지 못하자 이번에는 기타자키가 입을 열었다. "그럼, 그럼, 걱정 붙들어 매. 그 섬에 건물이라고는 아무개 씨라는 부자가 지은 별장 한 채밖에 없으니까. 왜,
그 아무개 씨 있잖아. 오카야마에서 유명한 출판사를 경영하는." - P11

"걱정할 것 없다니까. 사이다이지 가문 사람에게 들킬 염려는 없어. 애당초 그 가문의 별장은 섬 남쪽에 있는걸. 우리는 섬 북쪽에서 낚시할 거고. 그쪽은 깎아지른 듯한 벼랑이라 낮이든 밤이든 아무도 가까이 안 와. 내가 보장할게."
참으로 용기가 넘치는 말이다. 하지만 오가와라 선배의 보장에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 P12

그런 어처구니없는 상상을 하며 사기누마는 작은 섬을 가리켰다. "오가와라 선배, 혹시 저 섬이 저희 목적지인가요?"
"응, 혹시라는 말을 붙일 것 없이, 저 섬이야. 틀림없어. 저게 비탈섬이야."
"흠, 비탈섬이라. 그냥 평범하네요."
그건 그럴 것이다. 세토내해의 외딴 섬이라고 해서 하나같이 ‘옥문도‘니 ‘악령도‘ 같은 불길한 이름이 붙어 있을 리 없다(*옥문도와 악령도는 일본의 추리작가 요코미조 세이시가 쓴 장편소설 제목이자, 소설에 등장하는 섬이다) - P13

이리하여 남자 중학생 세 명이 경쟁하는 심야 낚시 대회의 막이 올랐다. - P15

첨벙!
뒤쪽에서 느닷없이 커다란 물소리가 들렸다. 물론 바다 위에 있으니까 파도 소리는 끊임없이 들린다. 하지만 단순한 파도 소리가 아니었다. 아무래도 벼랑 쪽에서 들린 듯했다. 배와 벼랑 사이에 펼쳐진 아무것도 없는 해수면에서 갑자기 요란한 물소리가 난 것이다.
그 순간, 사기누마는 재빨리 뒤를 돌아보았다. 혹시나 누가 있는것은 아닐까 걱정됐다. 사기누마 일행은 허가 없이 어획 행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섬사람에게 그 장면을 적발당하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그것이 사기누마의 꾸밈없는 진심이었다. - P16

사기누마는 물속에서 홀연히 나타난 그것을 보고 한순간 돌고래인 줄 알았다. (중략) 그렇게 생각한 순간, 허여멀건한 생물은 어두운 밤하늘을 배경 삼아 두 손과 두 발을 격렬하게 버둥거렸다. 아무것도 없는 공중에서 그래도 필사적으로 뭔가를 붙잡으려는 듯한 동작, 사기누마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부릅떴다. 돌고래가 아니다! - P17

"으아아, 피해, 피해!"
세 사람은 양쪽으로 갈라지듯 일제히 펄쩍 물러났다. 선수 쪽에 오가와라, 선미 쪽에는 사기누마와 기타자키. 이로써 배 한복판에 텅 빈 공간이 생겼다. 공중에서 떨어진 수수께끼의 생물이 배 한복판에 세게 충돌했다. 쿠웅, 중량감 있는 소리가 울려 퍼졌고, 배가바닷속에 가라앉을 것처럼 아래로 쑥 꺼졌다. - P17

 둘 다 목숨에 지장은 없는 모양이었다.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린 사기누마는 "저도・・・・・・ 어푸푸...... 괜찮아요" 하고 어둠에 대고 힘껏 대답했다. 그때,
몇 미터 앞쪽에서 떠내려오는 물체가 보였다. 어두컴컴한 바다에서 몹시 선명하게 보이는 흰색 물체, 사기누마는 깜짝 놀라 개구리헤엄으로 열심히 그 물체에 다가갔다. 하얘 보인 것은 인간의 등이었다. 흰옷을 입은 사람이 달빛을 받으며 어두운 해수면을 떠다니고 있었다. - P18

"이. 이봐요. 정신차려요."
사기누마는 상대의 등에 팔을 두르고 얼굴을 해수면에서 꺼냈다. 그제야 그가 남자임을 깨달았다. 등 뒤에서 끌어안은 자세라 얼굴은 잘 보이지 않지만, 체격에서 어쩐지 남자라는 감이 왔다. 남자는 힘없이 축 늘어진 상태였다. 자기 힘으로 헤엄칠 수는 없을 듯했다. 그냥 기절한 걸까, 아니면 설마. - P19

"응? 뭐지, 저건?
사기누마는 바닷속을 유영하는 거대한 뭔가를 시야 가장자리로 포착하고 깜짝 놀랐다. 놀란 나머지 숨을 내뱉는 바람에 일단 해수면 위로 얼굴을 내밀었다. 거칠게 숨을 쉬고 있자니 어디선가 오카야마사투리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용이다. 용...... 용이 있어!"
오가와라일까, 아니면 기타자키일까. 설마 흰옷을 입은 남자는아니겠지만, 그나저나 ‘용‘이라니 무슨 소리일까? - P20

1장
저택이 있는 섬

(전략).
"어디 보자, 벤텐마루호, 벤텐마루호. 아, 혹시 이건가."
(중략)
"실례합니다. 벤텐마루호의 선장님 계세요? 야노 법률 사무소에서 나왔는데요."
그러자 조타실에서 한 명이 갑판으로 나왔다. 힘깨나 쓸 것처럼 생긴 상고머리 남자다. 기름 얼룩이 두드러지는 바지에 크루넥 셔츠를 입었다. 나이는 40대 초반일까. - P24

선장은 아하하, 하고 호쾌하게 웃었다. 그 옆에서 경칭이고 뭐고없이 그냥 ‘이 중‘이라고 불린 승려가 다시 합장하고 허리를 숙였다. "저는 도라쿠라고 합니다. 도를 즐긴다고 써서 도라쿠(道楽)."
"어, 도라쿠요?!" 도락 스님이라 그건가. 어쩐지 노는 데 정신이팔렸을 것 같은 이름이다.
"고묘지라고, 고지마에 있는 오래된 절의 주지입니다. 오늘은 비탈섬에서 거행될 사십구재 법사 때문에 섬에 가려고요. 잘 부탁드립니다." - P26

사야카는 어선 갑판에서 멀어지는 고양이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때 고양이와 교대하듯 두 사람이 잔교에 나타났다. 둘 다 남자지만 겉모습은 몹시 대조적이었다.
한명은 몸집이 아담하다. 커다란 여행 가방을 어깨에 멨고, 적갈색 치노 팬츠에 노란색 셔츠, 그리고 녹색 블루종을 입었다. 차림새가 너무 다채로워 한낮의 잔교에 나타난 걸어 다니는 신호등‘ 같았다. 작은 몸을 최대한 크게 보이려고 어깨를 흔들며 걷는 모습이 약소한 야쿠자를 연상시켜서 오히려 우스꽝스럽기까지 했다. - P27

잔교 가장자리에 다다른 젊은 남자는 속도를 줄이지 않고 콘크리트 지면을 구둣발로 박찼다. 다음 순간"으랏차!" 하는 엄청난 기합과 함께 남자는 출항한 어선을 향해 힘껏 점프했다. 그야말로 홀딱반할 듯한 점프였다. 검은색 정장을 입은 호리호리한 몸이 한순간허공을 날았고, 두 다리가 잔교와 어선 사이에 검은색 아치를 그렸다. 절망적으로 느껴졌던 거리도 그의 점프력 앞에서는 아무것도아니었다. 남자는 벤텐마루호의 뱃전을 가뿐히 뛰어넘어 구두 뒷굽이 닿는 소리와 함께 갑판에 착지했다. - P29

수수께끼의 오버런 남자는 선장이 던져 준 구명 튜브를 잡고 무사히 배 위로 올라왔다. 흐트러진 긴 머리가 이마에 들러붙었고, 정장도 구두도 흠뻑 젖었다. 선글라스는 남자의 코 위에 간신히 삐딱하게 걸려 있었다. 솜씨 좋은 킬러 같았던 겉모습은 이제 양동이의 물을 뒤집어쓴 옛날 옛적 희극 배우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 P30

"이봐요. 선장님. 이상하다 싶었으면 기다려야죠. 저를 내버려두고 출항하다니 너무하지 않습니까. 어. 약속 시간에 10분 늦었다고요?! 아. 그건 그러니까, 실은 제가 탄 마린 라이너가 브레이크고장으로-"
(중략).
"어, 그게 뭐였더라.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어쨌든 제가 탈 배가눈앞에서 떠나는 걸 보고 얼마나 마음이 조마조마했는지 아세요!"
(중락).
 "하지만 선장님,
말씀드리는데 배에 더 타기로 한 사람은 ‘한 명‘이 아닙니다. 정확하게는 ‘두 명‘이에요. 저랑 저기 저 사람이요." - P32

남자는 입꼬리를 끌어 올려 씩 웃으며 설명했다. "그의 이름은 쓰루오카 가즈야. 사이다이지 가문의 사십구재 법사에 참석하기로 한 사람 중 한명이지.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배를 타야해."
그가 예상 밖의 이름을 꺼내서 사야카는 저도 모르게 놀라움에찬 목소리를 흘렸다.
"어, 쓰루오카 가즈야라니, 저 사람이?!"
"그래. 그러고 보니 당신은 변호사랬지. 그럼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군." - P33

"보다시피 사립탐정이야. 오카야마의 ‘고바야카와 탐정 사무소라고 들어 봤지?"
"......."미안, 처음 들어봤어!
사야카는 입을 다문 채 거북한 심정으로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 P34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어요!" 고함을 빽 지른 사야카는 상대방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뒤쪽 갑판을 가리켰다. "그건 그렇고,
쓰루오카 씨와 같이 안 있어도 돼요? 저 사람을 무사히 섬까지 데려가는 게 당신 임무죠?"
"맞아. 하지만 이런 조그만 어선에서 잃어버릴 리도 없잖아. 여기까지 왔으니 이제는 바캉스나 마찬가지야. 의뢰인에게 노고를 위로하는 말과 보수만 잘 받으면 돼." - P36

다카오는 그렇게 말하고 10엔의 가치도 없는 윙크를 날렸다. 그리고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더니 "그런데 나도 당신한테 물어보고싶은 게 있어" 하며 사야카에게 얼굴을 가까이 댔다. "사이다이지 고로 씨의 유언장은 지금 당신이 가지고 있지? 당신이 그걸 사람들앞에서 낭독하는 건가?"
진지한 얼굴로 묻는 다카오에게 샤아카는 ‘부르는 게 값이라면100만 달러‘의 윙크로 답했다.
"미안해요. 변호사에게도 비밀을 엄수할 의무가 있거든요." - P37

그렇게 얼버무리고 넘어가기는 했지만, 탐정이 짐작한 대로다.
이번에 사야카가 비탈섬으로 가는 이유는 두 가지. 먼저 사이다이지 가문의 고문변호사인 아버지를 대신하여 사망한 사이다이지 고로 씨의 유언장을 섬의 별장에서 전달하는 것, 그리고 유족 앞에서유언장을 낭독하는 것이다.
(중략).
그 증거로, 고로 씨의 장례식은 오카야마현에 연고가 있는 수많은 경제인, 문화인, 정치인 및 본격 미스터리 작가 등이 한자리에 모이는 대규모 이벤트로 성대하게 거행됐다. 그리고 참석한 유족은 예외 없이 슬픔에 잠겨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장례식이 끝나면 유족의 관심은 반드시 상속 문제로 옮겨 간다.
그리고 이 문제의 핵심을 쥐고 있는 것이 바로 고로 씨가 남긴 유언장이었다. - P38

그리고 오늘 모인 유족들 앞에서 유언장을 개봉하는 중대한 역할을 맡은 사람이 다름 아닌 사야카의 아버지 야노 고조 변호사다.
고조는 기합을 넣듯이 가슴을 세게 한 번 친 후에 사야카를 데리고 거실 한복판으로 나아갔다. 유족들 앞에 꿇어앉아 일단 영정사진에 예를 갖추었다. 그리고 천천히 갈색 봉투를 꺼냈다. 이때 고조는 전에 없이 긴장한 표정이었다. 실은 고조 본인조차 유언장의 내용을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 P39

고조는 바싹 마른 입술을 열심히 움직여 편지지에 적힌 내용을유족들 앞에서 읽었다.

나, 사이다이지 고로는 신뢰하는 고문변호사 야노 고조 씨에게이 유언장을 맡긴다.
(중략).
둘째, 유언장을 개봉하는 자리에는 내 여동생 마사에, 3남매 에이코, 게이스케, 유코, 그리고 조카 쓰루오카 가즈야가 참석할 것.
(후략). - P40

그런 와중에 일동을 대표하듯 첫째 에이코가 의문을 제기했다.
"이게 무슨 소리죠, 야노 선생님? 그럼 ‘쓰루오카 가즈야가 발견될 때까지는 유언장을 개봉하지 마라‘는 건가요? 여기에 유족들이이렇게 모여 있는데도요?"
"그, 그런 것 같습니다. 이, 이건 고인의 유지이니 어쩔 수 없지않나 싶은데요." - P41

"선생님한테 말하는 거 아니에요. 더구나 쓰루오카 가즈야가 지금 어디서 뭘 하은지 모르잖아요. 연락이 끊긴 지 20년도 넘었다고요."
(중략).
"그런데 야노 선생님, 아버지의 진짜 유언장은 그 갈색 봉투에 들어 있는 거죠?"
그 말을 듣고서야 고조는 흠칫 놀라 편지지와 함께 있었던 또 다른 갈색 봉투를 허둥지둥 집어 들었다.
사야카도 아버지 옆에서 봉투 겉면에 적힌 글씨를 들여다보았다. 봉투에는 남성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붓글씨로 이렇게 적혀있었다. ‘유언장 PART 2.‘ - P42

아버지도 참 못 미더운 구석이 있다. 그로부터 약 한 달 보름이지났는데도 끝내 몸 상태가 돌아오지 않아서 중요한 업무를 딸에게떠맡기다니.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사야카는 재킷 가슴께를오른손으로 살짝 눌렀다. 안주머니에 ‘유언장 PART 2‘라고 적힌 갈색 봉투를 핀으로 단단히 고정해 두었다. - P43

다카오는 그중에서 평평한 섬 하나를 가리키며 물었다. "저 섬 가장자리에 은색 저택이 있었던 것 같은데, 어디로 갔지?"
"뭐야, 그거였어요?" 사야카는 어깨를 으쓱하고 경위를 설명했다. "은색 저택이라면 주몬지 가문의 저택이잖아요. 1980년대에 거기서 살인사건이 발생한 후로 사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폐허 비슷하게 변했고, 결국 최근에 철거된 모양이에요. 폐허 마니아들과일부 미스터리 팬에게는 그런대로 인기 있는 건물이었지만요."
"엇, 부숴 버렸어? 그거 아쉽게 됐군." - P45

"그러고 보니 당신은 야노 고조 변호사의 딸이라면서? 그럼 우리둘 다 2대로군."
탐정은 두 사람의 유일한 공통점을 강조하며 넉살 좋게 오른손을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아무래도 당신과는 친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아. 안 그래, 야노사야카 씨?" - P46

3

(전략)
"이거 굉장한걸. 떨어지면 저승길 직행이겠어. 이 벼랑, 이름이 따로 있습니까?"
그 질문에는 도라쿠 스님이 대답했다. "지역 어민들은 ‘도깨비 뒤집기 벼랑이라고 부르는 것 같더군요. 왜, 성의 석벽 중에 위로 갈수록 경사가 급해지는 걸 ‘무사 뒤집기‘라고 하잖습니까. 이 벼랑은
‘무사 뒤집기‘보다 더 경사가 급해서 도깨비섬의 도깨비조차 기어오르다가 뒤집힐 정도라는 뜻에서 그런 이름이 붙은 거죠." - P48

그러자 선장은 머리를 긁적이며 "아니, 늘 근처를 지나다니지만 선착장에 배를 댄 건 처음이야"라고 의외의 사실을 밝혔다. "그것도 그렇고 이 부근 바다에는 숨겨진 암초가 많아서 물결이 잔잔할 때도 안심은 금물이지. 이러다 조금만 바다가 거칠어지면 배로는 접근을 못 해. 날씨가 오늘만 같다면야 별문제 없지만." - P49

"망할 놈의 섬에 드디어 도착했네." 쓰루오카는 여행 가방을 어깨에 메며 선착장 주변에 따분해 보이는 시선을 던졌다. "흥, 정말이지 바뀐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섬이라니까."
도라쿠 스님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어라, 이 섬에 처음 오신게 아니군요."
"응. 옛날에는 가끔 놀러 왔지. 일단 친척이니까. 마지막으로 온지 20년도 넘었지만, 그러는 스님은 오늘처럼 법사 같은 일로 가끔오나?" - P50

실제로 검은 턱시도 차림의 남자는 사람들 앞에서 공손하게 고개숙이더니 이렇게 말했다.
"잘 오셨습니다. 여러분. 저는 사이다이지 가문을 모시고 있는 고이케 기요시라고 합니다. 이쪽은 제 아내인 고이케 시노부고요. 잘부탁드립니다. 그럼 여러분, 저택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짐은 들어드릴 테니 저한테 주십시오." - P51

"23년 만입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쓰루오카 님.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고이케 기요시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더니 쓰루오카의짐을 받아들었다. 한편 도라쿠 스님은 "이것도 수행이니까요" 하며짐 맡기길 거부했다. - P52

사실 척 보기에도 기묘한 건물이다.
사야카는 건물과 정면으로 마주섰다.
철근 콘크리트 구조일까. 정면에서 보이는 부분은 옆으로 길쭉한 2층짜리 건축물이다. 건축물의 좌우 양쪽 끝부분에서 길쭉한 건물 두 동이 사야카 일행을 향해 평행으로 쭉 뻗어 나왔다. 이 부분은 단층이다. 위에서 보면 건물 전체는 가타가나의 ‘코(コ)‘ 모양일것이다. コ의 세로획에 해당하는 부분이 2층, 가로획 두 개가 단층인 셈이다. 그 단순한 형태만 보면 멋대가리 없는 학교 건물 같기도하지만, 실제로는 조금 다르다. - P53

"옥상에 있는 저 동그란 물체는 뭔가요?"
이 질문에는 고이케 기요시가 대답했다. "아아, 저거요? 뭐랄까,
전망실이기도 하고, 휴게실이기도 하고, 도서실이기도 하죠. 요컨대원형 방입니다. 네."
"원형 방이라." 다카오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저는 러브호텔옥상에 간판 대신 장식한 오브제 같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렇지, 사야카 씨?"
"그, 그렇기는요! 제. 제가 그렇게 생각할 리 없잖아요." - P54

(전략).
"네. 예나 지금이나 비탈섬에 건물은 이 ‘화장‘ 한채뿐입니다."
그 이름을 듣고 도라쿠 스님이 입을 열었다. "오, 이름이 ‘화장‘
입니까. 화강하면 화강석이죠. 듣고 보니 건물 표면을 덮은 광택 있는 돌은 분명 화강석 같군요. 어허, 이런 외딴 섬에 이렇게 훌륭한건물이 있을줄이야." - P55

하늘을 올려다보자 헬리콥터 한 대가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섬에 착륙하려는 모양이었다. 사야카는 허둥지둥 고이케 부부에게 물었다.
"이 섬에 헬기가 착륙할 수 있나요?"
그러자 고이케 시노부가 저택 부지 한복판, 그 모양의 건물에 둘러싸인 중정 부분을 가리켰다.
"중정을 헬기 착륙장으로 사용해요. 섬에 헬기를 댈 수 있는 평지는 여기밖에 없거든요."
듣고 보니 분명 고이케 시노부의 말대로였다. 잔디밭과 화단도있기는 했지만, 중정 한가운데의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건 콘크리트로 포장한 헬기 착륙장이었다. - P56

폭음이 멀어지는 가운데, 고바야카와 다카오는 휠체어에 앉은 노부인에게 똑바로 다가가서 깊이 고개 숙였다. 하지만 어째선지 가나에 부인과는 일절 말을 나누지 않고, 대신에 마사에한테 친근감깃든 시선을 던졌다.
"이야, 타이밍 끝내주는군요. 저희도 방금 도착했거든요. 설마헬기로 오실 줄은 몰랐지만."
"그래? 올케한테는 헬기가 제일 부담이 덜할 것 같아서. 다카자와 선생님도 찬성했어. 참, 여러분은 다카자와 선생님과 초면이지?
이쪽은 올케의 주치의인 다카자와 나오토 씨. 다카자와 선생님, 이쪽은 사립탐정 고바야카와 다카오 씨, 변호사 야노 사야카 씨, 고묘지의 도라쿠 스님, 그리고・・・・・・ 어머나, 진짜 오랜만이다!" - P58

휠체어에 앉은 가나에 부인은 일방적으로 떠드는 마사에와 달리아무 말도 없다. 오늘은 고문 변호사의 대리인 자격으로 왔으니 마사보다 가나에 부인에게 먼저 인사해야 하리라. 그렇게 생각한사야카는 노부인 앞에 서서 허리를 가볍게 구부렸다.
"저어,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야노 사야카라고 합니.."
다음 순간, 사야카는 흠칫 놀라서 말을 집어삼켰다. 가나에 부인의 두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 P59

4

(전략).
고이케 부부가 중후한 두짝문을 열자 눈앞에 호사스러운 현관홀이 펼쳐졌다. 빨간 카펫을 죽 깔아 호텔의 프런트 로비가 연상되는공간이었다. 리셉션 데스크와 제복을 입은 직원이 있었다면 망설임 없이 체크인부터 해야지 생각했으리라.
"굉장하다." 감탄한 사야카는 안경을 손끝으로 밀어 올리며 소리쳤다. "호텔 같네요." - P60

딴생각하는 사야카 옆에서 마사에가 또 목소리를 높였다.
"자자,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일단 올케부터 방으로 데려가야겠어.
올케 방은 평소 사용하던 1층 방이면 되지? 알았어. 가지, 선생님." - P62

 세 사람이 시야에서 사라진 후, 에이코는 그제야 사촌오빠에게 얼굴을 돌렸다.
"오랜만이네. 가즈야 오빠. 지금까지 어디서 뭘 한거야?"
(중략). "그런 이야기는 나중에 해도 되잖아. 낮잠을 자고 싶으니까 얼른 방으로 안내나 해."
"어머, 안내는 필요 없잖아. 오빠 방은 옛날부터 사용하던 그 방이야." - P63

"어머, 그쪽은 그러니까, 법률 사무소에서 나오신 분?"
"그렇습니다."
남자가 2초 만에 들통날 거짓말을 하길래 사야카는 옆에서 정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닌데요. 이 사람은 법률 사무소가 아니라 탐정 사무소 사람이에요."
"아아, 그럼 당신이 고바야카와 다카오 씨로군요." 에이코는 손뼉을 짝 치며 말했다. "괜찮아요. 당신 평판은 마사에 고모한테 들었어요. 어머님이 명탐정이라면서요?" - P64

그리고 방금 올라온 계단에 두 손을 모았다. 뭐든 고마운 대상에 인사를 올리는 버릇이 있는 모양이다. 유코는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마음에 드셨어요?"
그사이 마지막으로 계단을 올라온 다카오가 두 무릎에 손을 짚은채 대답했다.
"헉, 헉, 네....... 그, 그야・・・・・・ 이렇게 멋진, 계단은・・・・・・ 찾아보기, 힘들죠....... 후우."
"이봐요. 숨을 너무 헐떡이는 거 아니에요?! 아까는 바다에 뛰어들 만큼 엄청난 점프를 했으면서."
"미안하게 됐군. 난 순발력은 치타지만, 지구력은 토끼야." - P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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