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았던 비둘기 사건이 터졌을 때 조나단 노엘은 이미 나이 오십을 넘겼고, 지난 20여 년 동안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세월을 뒤돌아보며 이제는 죽음이 아니고는 그 어떤 심각한 일도 결코 일어날 수가 없으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었다. - P5
샤랭에서살았을 때, 1942년 7월쯤이었다고 생각되는 어느 여름날 오후 낚시를 갔다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 P6
낚시를 갔다가 그렇게 집으로 돌아와, 당연히 어머니가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고 있으리라는 기대를 안고 부엌으로곧장 갔으나, 어머니는 온데간데 없고, 의자의 등걸이에 덩그러니 걸려 있는 앞치마만 눈에 띌 뿐이었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났노라고 했다. - P6
조나단은 그 사건을 도대체 하나도 이해할 수가 없었으며, 그것은 그를 대단한 혼란 속에 빠뜨려 놓았다. 그리고며칠 후 이번에는 아버지마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 P6
50년대 초 조나단이 농사꾼으로 살아가는 것에어느 정도 재미를 붙일 무렵 ・아저씨는 그를 군대에 입대시켰고, 그는 3년 동안의 군복무 의무를 고분고분히 따랐다. 첫해에는 성가신 집단 생활과 병영 생활에 익숙해지는 것에만 온 신경을 집중하였다. 둘째 해에는 배를 타고 인도차이나에 파견되었다. 그리고셋째 해에는 발과 다리에 맞은 총상과 아메바 성 이질로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군 병원에서 보냈다. - P7
결혼 생활이 무엇인지 잘 상상이되지는 않았지만 마침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단조로운 평화를 맛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것이야말로 그가 늘 꿈꾸어 왔던 것이었다. 그렇지만 결혼 후 불과 4개월 만에 마리는 사내아이를 낳았고, 같은 해 가을에 튀니지 사람으로 마르세이유에서 온과일 장수와 눈이 맞아 줄행랑을 치고 말았다. - P8
파리에서 그는 큰 행운을 두 개나 잡았다. 세브르 가에 있는 어느 은행의 경비원으로 취직이 되었고, 플랑슈가에 있는 집 7층에 <코딱지만한〉 방 하나를 얻을수 있었다. - P8
복도에는 회색 페인트 칠을 한 문마다 번호가붙여져 있는 작은 방들이 20여 개 있었는데, 그 중에제일 끝에 있고 번호가 24번인방이 조나단의 방이었다. 방은 길이가 3.4미터이고, 폭은 2.2미터이며, 높이가 2.5미터였다. - P9
그는 다만 삶의 마땅찮은 불상사로부터 자기 자신을 보호할 수 있고, 어느 누구도 자기를 내쫒을 수 없는 그런 확실한 곳으로, 온전하게 자기 혼자만의 소유로 할 수 있는 것을 찾았다. - P10
조나단 노엘은 그 방을 옛날 돈으로 월세 5천 프랑씩 내기로 하고 들어가 그곳에서 날마다 아침이면 세브르 가에 있는 일터로 갔다가 저녁이면 빵과 소시지와 사과와 치즈를 사 갖고 돌아와서는 그것을 먹고, 자고 또 행복해 했다. - P10
물론 그동안 외부적인 변화가 있기는 하였다. 이를테면 방세가 변했고, 입주해 있는 사람들의 면면이 바뀌었다. - P10
많은 방들이 그냥 빈 채로 있거나, 아래층에서 살림집을 꾸미고 사는 다른 세대의 창고나 혹은 가끔씩 쓰는 손님용방으로 이용되곤 하였다. 조나단 노엘의 방인 24호실은 세월이 흐르면서 비교적 안락한 주거지로 변했다. - P11
침대 머리맡에는 선반을 하나 매달아서 17권도 넘는 책들을 꽂아놓았다. 포켓 의학 사전 세 권을 비롯하여 크로마뇽인과 청동기 시대의 주조 기술, 고대 이집트, 에트루리아인 그리고 프랑스 혁명을 다룬 몇 권의 아름다운 화보집, 범선에 관한 책 한 권, 여러 가지 깃발에 관한 책한권, 열대 지방에 사는 동물에 관한 책 한 권, 알렉상드르 뒤마 1세의 소설 책 두권, 생시몽의 회고록, 전골 요리책 한 권, 라루스 사전 한 권과 직무상의 권총사용 규정에 있어서 특히 주의해야 할 점을 다룬 경비원을 위한 요점 정리 책자 한 권 등이 있었다. - P12
그렇게 물건을 많이 들여놓다 보니 방은 마치 너무많은 진주알을 품은 조개처럼 안쪽으로 빠듯해져 갔다. 그리고 그렇게 다각도의 절묘한 공간 활용은 그 방을 그냥 단순히 <코딱지만한> 방이라기보다는 배의 선실이나 고급 기차의 침대칸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 P12
그 작은 방은 저녁에 그가 돌아오면 그의 체온을 따스하게 해주었고, 포근하게 감싸 주었으며, 그가 필요로 할 때는 영혼과 실체로서 항상 그의 곁에 있어 주었고, 결코 그를 버리지않았다. - P13
자기가 사랑하는 것에 그는 충실하려고 노력하였고, 오히려 그것에 밀착하여 그것과 좀더 가깝게 자신을 묶어 매고자 계획하였다. 그 방을 아예 자기 것으로 구입함으로써 그것과 자신과의 관계를 영원히 깰래야 깰 수 없는관계로 만들 생각이었다. 집 소유주인 라살 부인과의계약도 이미 마쳤다. 방값은 새로 나온 돈으로 5만 5천 프랑을 내기로 했다. - P13
여기까지가 비둘기 사건이 발생하기 전인 1984년 8뭘 어느 금요일 아침까지의 상황이었다. - P14
(전략). 그래서 그날 아침 그는 - 2ㅣ이미 불과 몇 초 전에 문에 귀를 대고 밖의 동정을 살폈기 때문에 - •복도에 아무도 없다는 것과 화장실이 비어있다는 것 그리고 아직 모두 잠자리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왼쪽 손으로는 안전 자물쇠의 꼭지를 돌리고, 오른쪽 손으로는 용수철 자물쇠의 손잡이를 돌린 다음, 빗장을 열고, 문을 가볍게 밀며 활짝 열었다. - P15
. 문지방에서 불과 20센티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창문을 통해 들여온 아침 햇살의 창백한 역광을 받으며있었다. 납회색의 매끄러운 깃털을 한 그것은 황소 피처럼 붉은 복도의 타일 위에 빨간색이며 갈퀴 발톱을한 다리를 보이며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비둘기였다. - P16
그는 죽을 만큼 놀랐다. 그때의 순간을 나중에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 말은 사실상 옳지 않았다. 정작 그를 더욱 놀라게 했던 순간은 좀더 나중에 있었다. 그때야말로 그는 까무러치게 놀라 죽을 뻔했다. - P17
비둘기의 눈이 미처 다시 뜰 수도 없을 정도로 빠르게 그는 후닥닥 방문을 닫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안전 자물쇠의 꼭지를 돌리고 부들부들 떨며 비틀비틀침대까지로 가, 마구 방망이질 쳐대는 가슴을 부여잡고 털썩 주저앉았다. - P18
나이 오십부터는 아주 사소한 계기만 생겨도 그런 험한 질병에 걸리게 된다는 생각과 자신이이미 그럴 만한 나이가 되었다는 자각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침대에 모로 누운 다음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어깻죽지 위까지 담요를 끌어올려 덮고 그가 언젠가 포켓용 의학 사전에서 전형적인 심장마비 증세라고 읽은 바 있는 경련을 일으킬 듯한 심한 통증과 가슴 부위 및 어깨 근처에 콕콕 찌르는 듯한 증세와 또는 의식이 서서히 꺼져 가는 현상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 P18
대신 그의 뇌리에는 완전히 뒤죽박죽이 된 공포의사념들이 무더기로 떠오르며 마치 한 무리의 까마귀떼들처럼 머리 속을 시끄럽게 소리치며 휘저었고, 또자기들끼리 엎치락뒤치락하기도 하였다. <너는 이제 끝장이야!>라고 소리를 빽 지르는 것 같았다. - P19
그런 따위의 사특한 생각들이 그의 머리 속에서 꽥꽥 소리치며 외쳐댔고, 조나단은 너무나 당혹스럽고절망적인 나머지 유년 시절 이후 한 번도 하지 않은 행동을 했다. 절박한 심정으로 두 손을 모아 기도를 올리는 자세를 취한 것이다. - P21
그는 간절히 기도했다. 「오, 하느님, 하느님. 왜 저를 버리시나이까? 왜 제게이다지도 큰 벌을 내리시나이까? 하늘에 계신 아버지시여, 제발 저를 저 비둘기로부터 구해 주소서! 아멘!」 - P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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