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운명의 만남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열흘이 지났다. 유일한 피붙이인 할머니가 돌아가셨지만 건이는 눈물도 나지 않았다. 할머니는 거의 일 년 동안이나 자리에 누워 지냈다. 말도 못 하고, 건이를 알아보지도 못한 채로. - P9
그런데 오늘은 뭔가 이상하다. ‘누가 집에 들어왔어!‘ 건이는 거의 동물적인 감각으로 그 사실을 알아챘다. 녹슨 철제 대문도, 이 층의 먼지 낀 창문도 그대로였지만 뭔가 달랐다. 그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예감 같은 것이었다. - P10
말 그대로 개나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좁았는데, 초등학교 2학년생치고 몸집이 작은 건이에게는 별 무리가 없었다. 건이는 부스러진 벽돌 틈을 헤치고 담장 안으로기어 들어갔다. 구멍 바로 안쪽은 화단이었다. - P10
집 뒤편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건이는 깜짝 놀라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뭔가를 내리치는 소리 같았다. ‘도둑이라도 든 걸까? 훔쳐 갈 것도 없을 텐데‘ 건이는 침을 꼴깍 삼키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건이가 앉아있는 쪽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움직임에는 타오르는 불꽃의 기세를…………… 연결은 흐르는 물과 같아…………" 이번에는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 - P11
건이는 부쩍 호기심이 당겼다. 노인 앞에는 큼직한 바위가 놓여 있었다. 분명 대문 근처에서 본 정원석인데 어떻게 저기로옮겼는지 모를 일이었다. 노인은 계속해서 주문을 외우듯 읊조렸다. ·나무가 뿌리를 뻗듯 하체에 중심을 실을 것이며 주먹은무쇠처럼…………." - P12
‘으윽, 저 영감탱이 지금 제정신이야? 주먹이 완전 으스러는걸?‘ 하지만 건이 눈앞에서 믿지 못할 광경이 펼쳐졌다. 수북하게 쌓인 자갈 무더기, 그리고 연기처럼 푸시시 날리는돌가루와 벚꽃 잎 사이로 우뚝 선 노인. 놀랍게도 노인의 손은 말짱했다. - P12
조심조심 왔던 길로 다시 기어서 나가려는데 갑자기 코가 근질거렸다. 꽃가루가 날리는 꽃밭에 너무 오래 있었던 게 화근이었다. ‘안 돼! 참아야 돼!‘ 입과 코를 꽉 틀어막았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에취잇!" 건이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요란한 재채기가 터져 나왔다. "웬 놈이냐!" - P16
"안 돼 돌아가신 스승님께 맹세했다. 제자가 아닌 사람에게 오방구결이 누설되면 살려 두지 않겠다고" 눈앞이 캄캄했지만 건이는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그 순간어떤 생각이 ‘번쩍‘ 머릿속을 스쳤다. "그, 그럼 제잔가 뭔가 내가 해 주면 되잖아요!" - P17
노인이 어디선가 시멘트 벽돌 하나를 가져와 건이 앞에 툭 던졌다. "깨봐" "네에?" 노인은 짜증난다는 얼굴로 재촉했다. "깨라고 주먹으로" 건이는 너무 황당해서 입만 쩍 벌렸다. 그 흔한 태권도장 한번 안 다녀 봤는데 무슨 수로 시멘트 벽돌을 깨? - P18
건이는 이를 악물고 벽돌을 향해 주먹을 내리쳤다. 뚜둑! "으아아아악!" 손가락뼈가 몽땅 부러진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엄청난 통증이 팔을 타고 올라왔다. 이는 주먹을 감싸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생생하게 아팠다. "홍! 이제 네 주제를 알겠느냐?" 건이가 아파 죽거나 말거나 관심 없다는 투였다. - P19
건이는 다시 벽돌 앞에 앉았다. 주먹이 벌겋게 달아올라 두배쯤 부풀어 있었다. 건이는 눈을 감고 아까 보았던 광경을 떠올렸다. ‘저 영감탱이도 깼는데 나라고 못할 리가 없어. 나도 할 수 있다!‘ - P19
건이는 눈을 질끈 감고 벽돌을 향해 주먹을 내리쳤다. 퍼억! 그리고 또다시 휘몰아치는 통증은・・・・・・ 없었다. 놀랍게도 건이는 천천히 눈을 떴다. 벽돌은 두 토막으로 갈라져 있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잘려 있었다. 칼로 두부를 자른 것처럼 아주 깨끗하고 매끈하게놀란 것은 건이뿐이 아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태평하던 노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물들었다. "이놈! 감히 누굴 속이려 들어? 네놈은 이미 무술을 익힌 녀석이 분명해! 나를 찾아온 목적이 뭐냐?" - P20
"엉엉...... 맘대로 해! 죽이든지 말든지! 어차피... 나 죽어도………… 아무도 몰라.... 흑흑. 할머니도 죽었고...... 엉엉...... 그냥 보육원에 가기 싫어서도망친 줄 알겠지, 뭐. 엉엉엉......." 한번 울음이 터지자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이는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채로 끅끅대며 통곡했다. 노인은 당황한 얼굴이 되어 흠흠, 헛기침을 했다. - P21
"남의 집에 허락도 없이 들어와서 제멋대로 엿봐 놓고는 뭘잘했다고 그렇게 우느냐?" 여전히 타박이었지만 아까보다는 한결 부드러워진 말투였다. 너무 울었던 탓인지 딸꾹질이 났다. 건이는 그제야 조금 민망해져서 딸꾹질을 참아 보려고 애썼다. "일단 수습 제자로 받아 주마. 수습 제자는 제자가 될 준비를하는 예비 제자다. 지켜보다가 자질이 없는 것 같으면 그때 죽여도 늦지 않겠지." - P22
건이가 코를 훌쩍이며 끼어들었다. "수・・・・・・ 뭐 제자가 그런 것도 해야 돼요?" 노인은 뭘 당연한 걸 묻느냐는 표정이었다. "본래 진정한 수련은 잡일부터 시작되는 법이야!" "......" "아, 그렇지! 수습 제자가 해야 할 제일 중요한 일은 밥을 하는 것이니라. 그러고 보니 갑자기 시장하구나.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 밥은 할 줄 알겠지?" - P23
2. 건방이의 탄생
"속았어 완전히 속았다고!" 건이는 저녁 설거지를 하면서 열 번째 똑같은 말을 반복하고있었다. 노인의 수습 제자가 된 지 벌써 일 년이 훌쩍 지났건만 권법 수련은커녕 온갖 집 안 잡일에만 도가 더 버렸다. - P25
오방도사는 옷도 오방색으로만 입었다. 오방색은 다섯 방위에 해당하는 색깔로 청, 백, 적, 흑, 황색이다. 오방색은 순수하고 섞음이 없는 색으로 모든 색의 기본이며 아무튼 좋은 색이라고 했다. 물론 이것도 귀에 딱지 앉을 정도로 오방도사에게 자주듣는 이야기였다. 문제는 그놈의 오방권법을 코딱지만큼도 못 배우고 있다는것이었다. - P26
일 년 전, 그러니까 둘이 처음 만났을 때 오방도시는 거지매우 가까운 상태였다. 평생을 혈혈단신 밖으로만 나돌았던 오방도사가 건이를 제자로 맞은 후에야 집에 정착했기 때문이다. 유산으로 물려받았다는 비밀의 집도 너무 낡아 폐가나 다름 없었다. - P27
"지필묵을 가져오너라." 오방구결을 쓰게 시키려는 모양이다. 이는 화선지 한 장과연필을 챙겨 들고 안방으로 갔다. 원래는 붓으로 써야 하지만 요즘에는 그냥 연필로 썼다. 건이의 엉망진창 붓글씨를 보다 못한 오방도사가 마지못해 연필을 허락했기 때문이다. 어스름한 안방에는 촛불 하나 켜져 있었다. - P27
오방구결은 오방권법을 사사받은 제자에게 구전으로만 내려오는 일종의 권법 이론이다. 오방도사도 돌아가신 스승님에게서 입으로 전해 들어 외우게 되었다고 했다. 암기 실력이 좋지 않은 건이도 똑같은 내용을 수백 장 쓰다 보니 이제는 오방구결을 달달 외우게 되었다. - P28
오방도사를 처음 만났을 때 일어났던 기적은 말 그대로 기적인 게 확실했다. 오방도사 역시 ‘저놈은 무술을 배운 놈이 아니야. 더구나 권법에 재능이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고 하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건이가 오방구결을 모두 쓰자 오방도사는 읽어 보지도 않고종이를 촛불에 갖다 댔다. - P29
어차피 오늘도 안 하고 넘어가긴 글렀다는 생각이 들자 건이는 얼굴을 찌푸리며 오방도사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웃기시네. 과로는 무슨 놈의 과로, 과로는 내가 하지. 날마다 설거지하라, 청소하라. 빨래하랴......." "이놈, 대체 뭐라고 구시렁대느냐?" "어휴, 어깨가 심하게 뭉치셨네요?" 건이는 서둘러 오방도사의 어깨를 팡팡팡 두들겼다. - P30
"왜요? 시간을 채우려면 아직 멀었는데." 오방도사는 건이의 말을 무시하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휘적휘적 밖으로 나갔다. "따라오너라." 건이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오방도사를 따라 현관문을 나섰다. - P31
건이는 무슨 소린가 싶어서 멀뚱멀뚱 서 있기만 했다. 그러자 오방도사가 짜증난다는 얼굴로 다시 말했다. "깨라고 주먹으로" 그 말을 듣자 건이는 갑자기 오방도사를 처음 만난 날이 기억났다.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장소도 똑같았다. 이는 자다가무슨 봉창 두들기는 소리냐고 항의를 하려다가 오방도사의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 P31
"씨이...... 뭘 제대로 가르쳐 주지도 않고....." 건이는 오방도사의 귀에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그맣게 중얼거리며 벽돌을 받았다. 일 년 전 그날과 똑같은 시멘트 벽돌 ‘도대체 이놈의 벽돌은 어디서 자꾸 나오는 건지.‘ - P32
‘나는 할 수 있다!‘ 건이는 정신을 가다듬고 돌 위에 주먹을 올려놓았다. "이얍!" 건이는 불끈 쥔 주먹을 벽돌 위로 내리쳤다. 그러자 눈으로보고도 믿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파삭! 벽돌에서 과자 부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건이가 놀라 내려다보니 벽돌이 형체를 알 수 없도록 완전히 부서져 있었다. 벽돌이 그 지경인데도 손에 통증은커녕 느낌조차 거의 없었다. - P33
"쯧쯧, 권법을 배우는 게 이론만으로 될 줄 알았더냐? 네 녀석이 매일 했던 안마가 주먹을 단련하는 수련이었느니라. 안마를 할 때 나의 기가 너에게 전달되어서 자연스럽게 내공(內무술을 할 때 쓰이는 몸 안의 힘)이 쌓이게 된 것이지." "오올, 그렇게 깊은 뜻이!" 건이는 뒤늦게야 존경의 눈길로 오방도사를 바라보았다. 오방도사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거만하게 헛기침을 했다. - P35
3. 이 년 후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는 시각 학원가 상점에서 두 명의 아이가 군것질을 하고 있었다. "야, 그 소문 들었냐?" "뭔 소문?" 초등학교 3학년쯤으로 보이는 아이가 핫도그를 한입 베어 먹으며 물었다. "머니맨 말아야" - P37
"그게 말이지, 머니맨은 나쁜 놈을 다 물리쳐 주고 나서………… "그러고 나서?" 핫도그가 침을 꼴깍 삼켰다. "돈을 달라고 한대" "뭐?" 회오리 감자가 킬킬 웃었다. "진짜야. 그래서 머니맨이래" - P38
골목길 모퉁이를 막 돌아선 순간이었다. 저쪽 가로등 아래에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형 서너 명이 모여 있는 게 보였다. 가로등 불빛 아래로 뿌연 담배 연기도 보였다. 핫도그의 머릿속으로 ‘담배 = 불량 청소년‘ 공식이 스치고 지나갔다. ‘침착하자. 별일 없을 거야‘ 핫도그는 먹다 만 핫도그를 손에 꼭 쥔 채로 걸음을 재촉했다. - P39
핫도그는 간이 콩알만 해져서 도망가기를 포기하고 쭈뼛쭈뼛 가로등 쪽으로 다가갔다. "크크...... 바짝 얼었네? 우리 나쁜 형아들 아니니까 걱정마. 물론 니가 잘 협조했을 때 얘기지만." - P40
핫도그는 자기도 모르게 거짓말을 했다. 산 지 일주일밖에 안 된 최신형 스마트폰, 그걸 사느라 일 년 넘게 모은 용돈을 모조리 쏟아부었는데・・・・・・분위기가 갑자기 험악하게 변했다. "아, 이거 착하게 살아 보려고 했는데 영 협조를 안 해 주네. 가방 털어 봐서 나오면 그땐 죽는다" "형들... 제가 잘못했어요. 한번만 봐주세요……………" - P41
핫도그는 죽을힘을 다해 마지막으로 소리쳤다. "도와주세요!" 핫도그는 이제 죽었다고 생각하며 눈을꼭 감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순간 어디선가 스산한 바람이 휘익, 불어왔다. 퍽! 윽! 퍽! 악! 털썩! 바로 앞에서 치고받는 소리가 몇 번 들리는가 싶더니 사방이 고요해졌다. 핫도그는 질끈 감았던 눈을 슬그머니 떴다. - P42
아직도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핫도그 앞으로 머니맨이 자박자박 걸어왔다. "초딩은 500원, 중딩은 600원, 고딩은 700원인데 고딩 세 놈이니까 2,100원 7시가 지났으니까 야간 할증료 100원씩 추가해서 합이 2,400원이야." 머니맨은 기계처럼 억양 없는 목소리로 요금을 좔좔 읊으며한 손을 불쑥 내밀었다. - P44
머니맨은 투덜거리면서도 식어 빠진 핫도그를 깨끗이 먹어치웠다. 그리고 빈 막대기를 휙 집어 던진 후 지붕 사이를 붕붕날아 어디론가 향했다. 머니맨이 도착한 곳은 비밀의 집이었다. 비밀의 집 일 층 거실에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어? 사부가 왔나?" 건방이는 야구 모자를 벗은 후 서둘러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 P45
4. 스승과 제자가 사는 법
(전략). "어디를 싸돌아다니다 이제야 들어오느냐? 스승님 배곯는 것도 모르고!" 고개를 들어 보니 오방도사가 알록달록한 효자손을 들고 서있었다. 오방색 줄무늬로 칠해진 효자손은 오방도사가 늘 허리춤에 차고 다니며 애지중지하는 물건이다. - P46
요런 건방진 녀석! 으이구, 내가 이름을 잘못 지었어. 그러니까 네놈이 점점 더 건방져지지!" "흥, 내가 건방져서 건방이면 사부는 오두방정이라 오방도사Al?" "뭐야?" 오방도사는 약이 올라서 펄펄 뛰었다. 건방이는 그런 오방도사를 내버려 두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어차피 오방도사의 노여움은 배를 채우기 전까지 계속될 것이 분명했다. - P47
"열흘 만에 집에 오신 스승님한테 겨우 라면이냐?" 오방도사는 투덜거리면서도 서둘러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 뒤로는 말이 필요 없었다. 건방이와 오방도사는 사이좋게 머리를 맞대고 후루룩후루룩 라면을 나눠 먹었다. 큼지막한 냄비안에 가득했던 라면이 순식간에 바닥을 드러냈다. "찬밥은 없느냐?" - P48
오방도사가 이렇게 일찍 돌아올 줄 몰랐던 것이 실수였다. 건방이는 할 수 없이 자기가 먹으려고 사 놓은 캔 콜라를 집어 들었다. "엥? 이게 무엇인고?" "식혜가 다 떨어졌어요. 그냥 콜라 마셔요." "그러니까 자고로 제자란 스승님이 언제 어느 때 오시더라도불편함이 없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춰 놓아야 하는 법이라고 내가 누차 말하지 않았느냐! 네놈은 정신 상태가...……." - P49
"아, 뜸들이지 말고요. 설마 빈손으로 온 건 아니죠?" 건방이가 안달복달하자 오방도사는 눈짓으로 거실 한구석에 처박힌 괴나리봇짐을 가리켰다. 건방이는 잽싸게 괴나리봇짐을 풀어 헤쳤다. 봇짐 속에는 시들시들한 약초 서너 뿌리가 들어있었다. "에계계 "에게...... 이게 다야? 열흘 동안 대체 뭘 한 거예요?" - P50
건방이는 오방도사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서 신통풀을 살펴보았다. "이십 년 근 눈밝이풀, 오 년 근 동물말통역풀...... 오, 이건돈이 좀 되겠는데? 사십 년 근 천하장사." 그 모습을 지켜보던 오방도사가 끌끌 혀를 찼다. "어린놈이 어쩌다가 저리 속세의 때가 묻었는지………… 쯧쯧" - P51
‘군것질할 용돈은 못 줄 망정 준비물 하나 제대로 못 사 주다니, 내가 정말 못난 스승이구나‘ 오방도사는 잠깐 망설이다가 뒤돌아서서 바지 속에 손을 넣었다. 한참 부스럭대며 뭔가 뒤져 대던 오방도사가 꼬깃꼬깃 접은 지폐 한 장을 꺼내 들었다. 하도 때가 타서 좀 피곤해 보이는 신사임당의 얼굴이 그려진 오만 원짜리였다. - P52
"제자야, 예전에 나 따라서 금강산에 가 보고 싶다고 했지? 다음번엔 꼭 데려가마. 내 약속하지." 건방이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사실 오방도사가 가끔씩 가져오는 목돈은 적금 통장에 차곡차곡 쌓여 가는 중이다. 오방도사는 돈 관념이 유치원생보다 못해서 건방이의 그럴싸한 거짓말에도 속수무책이었다. - P53
5. 전학생 백초아
새 학년이 시작된 지 벌써 한 달이 다 되어 가지만 교실은 여전히 들떠 있었다. 이제는 5학년, 명실상부한 고학년이 된 탓인지 교실은 작년보다 한층 꽉 찬 분위기였다. "따끈따끈한 속보가 왔습니다! 오늘 우리 반에 전학생이 온다고 합니다!" - P55
"오늘 전학 온 친구다. 자기소개를 들어 볼까?" 여자애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가지런히 빗어 뒤로 질끈 묶어 넘긴 머리채가 허리까지 닿아 있었다. "백초아야" 여자애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자기소개를 마쳤다. 그 흔한 ‘반가워라든가 ‘잘 부탁해‘라는 말도 없었다. - P56
"반갑다. 나는 5학년 2반 회장 김면상이야. 우리 반을 대표해서 환영할게. 궁금한 게 있거나 어려운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말해" 자기한테 얘기한 것도 아닌데 몇몇 여자애들이 얼굴을 붉히며 면상이를 훔쳐보았다. ‘어휴, 재는 저 오글거리는 말을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하냐‘ 건방이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 P57
"그, 그럼, 앞으로 친하게 지내라" 담임은 상투적인 말로 어색한 상황을 마무리했다. 건방이는 어쩐지 고소한 생각이 들어 면상이의 얼굴을 슬쩍돌아보았다. 면상이는 무안하지도 않은지 여전히 싱글싱글 웃는 얼굴이었다. 김새서 다시 고개를 돌리려던 건방이의 눈에 순간적으로 이상한 것이 보였다. - P58
건방이는 조용히 교실 문을 빠져나왔다. 건방이는 반 애들누구와도 친하지 않았다. 언제나 한발 물러서서 조용히 지켜보는 쪽이었다. 머니맨이 된 후로는 더욱더 그랬다. 벌써 3시 반이 넘어가고 있었다. 건방이는 마음이 급해졌다. 큰길로 가면 마트까지 삼십 분도 더 걸릴 테고, 그럼 물 좋은 ‘1+1 고등어‘나 ‘반값 삼겹살‘ 같은 건 다 팔려 버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 P59
건방이가 다른 집 지붕으로 점프하려던 찰나, 발소리가 들렸다. 건방이는 재빨리 지붕 위에 납작 엎드렸다. "어? 쟤는?" 오늘 아침에 전학 온 백초아였다. 초아는 아침에 본 그 무표정한 얼굴로 따박따박 발소리를 내며 골목길로 걸어 들어왔다. "윽, 여긴 변태들이 자주 출몰하는 지역인데. 하긴 이제 막 전학을 왔으니 잘 모르겠지." - P60
지붕 위에서 막 뛰어내리려던 건방이는 자기 눈을 의심했다. 초아가 들고 있는 건 번쩍이는 검이었다. 그것도 두 자는 족히되어 보이는 긴 검. 놀란 건 건방이만이 아니었다. 초아 뒤를 바짝 쫓던 바바리맨도 너무 놀라 그 자리에 얼음처럼 굳어 버렸다. "저게 대체 어디서 나온거야?" 건방이의 궁금증은 곧 풀렸다. 초아가 검을 한번 휘두르자칼끝이 낭창거리며 흔들렸기 때문이다. "아하, 연검이었구나!" -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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