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웹스터 사전(Webster)』처럼 우리가 "말이란 마속(屬)에 속하는, 발굽을 지닌 네발짐승이다."라고 정의할 때, 이 정의는 실제로 서로 다른 세가지 의미를 지닐 수 있다. (1) 내가 ‘말‘이라고 말할 때, 마속에 속하는, 발굽을 지닌 네발짐승에 대해 내가 말하고 있음을 네가 이해하기를 바란다는 단순한 의미로 우리는 이 정의를 사용할 수 있다. 이는 자의적인 언어상의 정의(the arbitrary verbal definition)라고 말할 수 있다. - P51

내가 선이란 정의가 불가능하다고 말할 때 뜻하는 바는 바로 이러한 의미이다. 선이란 단어를 생각할 때, 마음속으로도 그것을 대체할 그 어떤 부분을 우리는 상상할 수조차 없다고 지금 나는 말하고 있다. - P52

9.
선이란 정의가 불가능하다는 명제를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중요 장애물을 과연 내가 완전히 제거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나는 지금 선한 것들(the good)이 정의될 수 없다는 의미의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나는 윤리학에 관해 글을쓰고 있다고 말할 수조차 없을 것이다. - P52

내가 생각하기에 ‘선한‘이라는 단어는 형용사로 여겨지고있다. 반면에 ‘선한 것들‘, 즉 선을 가진 것들은 ‘선한‘이라는 형용사가 적용되는 실질적인 명사를 가리킨다. 즉, 선한 것들이란 ‘선한‘이라는 형용사가술어로 적용될 수 있는 대상 전체를 지칭함에 틀림없고, 이 형용사는 ‘선한 것‘에 항상 참되게 적용되어야 한다. - P52

 예를 들어 그 선한 것은 ‘즐거움을 주는‘이라는 형용사를, 혹은 ‘지성적인‘이라는 형용사를 술어로 취할 수 있다. 이 두 형용사가 참으로 그 선한 것의 한 부분을 이룬다면, "쾌락과 지성도 선한 것이다."라는 명제도 확실히 참이 되게 된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쾌락과 지성은 선한 것이다."라고 혹은 쾌락과 지성만이 선한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지금 선을 정의 내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 P53

물론 "지성은 선이고, 그리고 지성만이 선이다."라는 명제와 그 형태가 동일한 몇몇 참인 명제들이 존재할 수있음을 나는 확실히 믿고 있다. 왜냐하면 만약 이러한 명제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면, ‘선한 것들‘에 대한 우리의 정의는 아예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이 이러하기 때문에 나는 ‘선한 것들‘은 정의가 가능하다고 믿지만, 선 자체는 정의될 수 없다고 여전히 주장하는 바이다. - P53

10.
우리가 어떤 대상에 대해 "그 대상이 선하다."라고 말할 때, 선이란 그대상에 속한다고 여겨지는 속성을 의미한다면, ‘선‘이란 이 단어의 가장 중요한 의미에서는, 그 어떤 정의도 불가능하다. 여기서 ‘정의‘의 가장 중요한 의미란 다음과 같다. - P54

11.
이러한 철학자들이 주장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고찰해보자. 먼저 주목할사실은 이들 철학자 사이에서도 의견 일치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즉, 이들은 선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이 옳다고 주장할 뿐만 아니라, 자신들과 다른 입장을 취하는 자들이 틀렸음을 입증하고자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철학자는 선은 쾌락이라고 주장하는 반면에, 또 다른 철학자는 선이란 욕구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 P55

(1) 그는 욕구의 대상은 쾌락이 아니라는 명제가 참임을 입증하려고 노력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라면 도대체 그의 윤리학은 어디에 있는가? 즉, 그가 주장하고자 하는 입장은 단지 심리학적인 견해일 따름이다. 욕구는 인간 마음에서 일어나는 그 무엇인 반면에, 쾌락 역시 인간 마음에서 일어나지만 욕구가 아닌 다른 무엇일 따름이다. - P56

(2) 자연주의 윤리설이 취할 수 있는 또 다른 대안은 이러한 논의는 결국 언어상의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는 입장인데, 이는 앞의 대안에 비해 더더욱 달갑지 않다. 예를 들어 A가 "선이란 쾌락이다."라고 말하고, B는 "선이란 욕구된 것이다."라고 말할 때, 이들은 단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선이란 용어를 쾌락적인 것을, 그리고 욕구된 것을 각각 지칭하는 것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입장을 주장하고 싶어 한다. 이는 아주 재미있는 논의 주제이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는 앞의 (1)의 접근법이 윤리학적이지 않듯이, 윤리학적이라고 전혀 말할 수 없다. - P57

 우리가 알고자 하는 바는 단지 "선이란 무엇인가?"이다.  - P58

12.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나는 즐거워한다."라고 말했다고 하자. 그리고 이 말은 거짓말이 아니라 참말이라고 하자. 그러면 이 말이 참이라면,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이는 그의 마음즉, 어떤 뚜렷한 표식에 의해 다른 모든 것과 구별되는 특정의 마음이 바로 그 순간에 쾌락이라고 불리는 독특한 느낌을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쾌락‘은 쾌락을 가짐 이외의 그 어떤 다른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 P59

 즉, 한 예로서 쾌락은 우리 마음속에 있다. 쾌락은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우리는쾌락을 의식하고 있다 등을 우리는 말할 수 있을 따름이다. 다시 말해 내가 지금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우리는 쾌락과 다른 것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지만 쾌락 자체를 정의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 P59

다시 말해 내가 지금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우리는 쾌락과 다른 것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지만 쾌락 자체를 정의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다른 어떤 자연적인 대상으로 쾌락을 정의하고자 시도한다면, 예를들어 쾌락은 붉은색 감각을 뜻한다고 정의를 내린 다음 이로부터 쾌락이란 색깔이라고 누군가가 추론해 나간다면, 그는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고,
후에 그가 말하는 쾌락에 관한 다른 진술은 전혀 신뢰할 수 없게 될 것이다. - P59

(전략). 하지만 동일한 의미로는 결코 자연적인 대상이 아닌 ‘선‘과그 어떤 다른 자연적 대상을 어떤 사람이 서로 혼동하고 있다면, 그는 자연주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말할 만한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선‘에 관해 범하는 이러한 혼동은 아주 특이한 특징을 지니고, 그리고 이러한 오류는 아주 공통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잘못에 대해 자연주의 오류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다. - P61

 반대로 선이 쾌락 외의 다른 무엇이 아니라면, 쾌락은 선이라는 말은 아예 의미조차 없어지게 된다. 선이 생명이나 쾌락 외의 다른 그 어떤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면, 윤리학에 관한 한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가시도한 것처럼, 쾌락의 증가는 생명의 증진과 일치한다는 점을 입증하려는시도는 전혀 쓸모없게 된다. 그는 단지 오렌지가 항상 종이에 싸여 있다는것을 보여줌으로써, 오렌지가 노랗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시도하는 것과같은 일을 하고 있는 꼴이다. - P62

13.
실제로 ‘선‘이 단순하여 정의 불가능한 어떤 것이 아니라면, 앞서 언급한 두 대안이 가능할 따름이다. 즉, 선은 복합체로 부분으로 구성된 전체이어서, 그 본성의 정확한 분석에 관해서 의견의 불일치가 있을 수밖에 없거나, 아니면 선은 전혀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것으로 아예 윤리학과 같은 학문은 애초에 성립조차 될 수 없을 것이다. - P63

(1) 선의 의미에 관한 불일치는 주어진 전체의 정확한 분석에 관한 불일치라는 가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고찰해보면 잘못이라는 점이 아주 명백하게 밝혀진다. 즉, 그 어떤 정의가 제시되어도, 그렇게 정의된 복합체에대해서 "그것이 선 자체인가?"라는 의문을 우리는 언제나 의미 있게 제기할 수 있다. - P63

(2) ‘선‘은 전혀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는 가설이 잘못되었음을 보여주는데도 앞서 논의한 동일한 고려 사항을 고찰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보편적으로 참인 것은 그 부정이 자기모순에 빠진다는 본성을 지닌다고가정하는 실수를 범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즉, 철학의 역사에서 분석 명제에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부여되었다는 사실은 이러한 실수가 얼마나 쉽게 일어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 P65

 이 질문이 구체적으로 어떤 면에서 그 의미가 다른지를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이 질문이 다른 질문과 구분되는 특이한 의미를 지닌다는 점을 알아차릴 것이다. ‘본래적 가치(intrinsic value)‘나 ‘본래적 값어치(intrinsicworth)‘에 대해 생각할 때, 혹은 어떤 대상은 ‘반드시 존재해야만 한다고말할 때, 우리는 마음속에 어떤 독특한 대상, 즉 그 말이 적용되는 것들의그 어떤 독특한 속성을 떠올리는데 이것이 바로 ‘선‘이 의미하는 바이다. - P66

14.
그러므로 ‘선‘은 정의 불가능하다. - P66

시지윅 교수는 자신의 근본 원칙을 벤담(Jeremy Bentham)이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고 말한다. 즉,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모든 당사자의 최대 행복이 인간 행위의 올바른 유일한 목적이다." 하지만 같은 장의 다른 곳에서 벤담이 사용한 언어가 함의하는 바에 따르면, ‘옳은(right)‘이라는 용어는 일반 행복(general happiness)을 산출하는‘을 의미한다. - P67

내가 생각하기에 벤담은 참으로 이러한 오류를 범한 철학자들 중 한사람임이 분명하다. 앞으로 논의하겠지만,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역시 이러한 오류를 범하고 있음에 확실하다. 아무튼 벤담이 이러한 오류를 범했든 범하지 않았든 상관없이. 앞의 인용 구절에 나타난 그의 입장은자연주의 오류가 무엇인지를, 그리고 선은 정의가 불가능하다는 반대 명제의 의미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의 구실을 할 것이다. - P66

이제부터 벤담의 이론을 고찰해보자. 시지윅 교수의 말에 따르면, 벤담은 ‘옳은‘이라는 단어를 ‘일반 행복을 산출하는 데 도움이 되는‘을 의미하는것으로 사용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정의 자체는 자연주의 오류를 필연적으로 함의하지 않는다. - P68

(전략). 왜냐하면 잘 알다시피 그는 근본 원칙을 관련된 모든 당사자의 최대 행복이 인간 행위의 올바른(right) 유일한 목적이라는 주장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그는 여기서 ‘옳은‘이라는 용어를 행복을 산출하는 수단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목적 자체에 적용하여 사용하고있기 때문이다. - P68

그런데 나는 자연주의 오류가 갖는 중요한 의의를 사람들이 오해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즉, 이러한 오류의 발견은 최대 행복이 인간 행위의 올바른 목적이라는 벤담의 주장을 결코 논박하지는 않는다. - P69

(전략). 이렇게 되었다면, 벤담의 윤리 체계는 그 핵심적인 주장에 아무런 변화 없이유지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었다 해도, 그가 범한 자연주의 오류는 윤리 철학자로서 그에게 치명적인 반대 논거가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단언적으로 주장하건대, 참된 결론을 얻는 것 못지않게 그 결론을지지하는 타당한 이유를 찾는 일 역시 윤리학의 주된 과제이기 때문이다. - P70

자연주의에 대한 나의 반대는 첫째, 그 윤리원칙의 내용이 무엇이든 간에, 자연주의는 그 원칙을 옹호하는 이유를 전혀 제공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타당한 이유를 결코 제공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 P70

 둘째로, 자연주의는 그 어떤 윤리 원칙에 대해서도 지지 이유를 제공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잘못된 윤리 원칙을 사람들로 하여금 받아들이도록 하는 원인 구실을 한다는 점을 나는 주장하고 싶다. 즉, 자연주의는 사람들의 마음을 현혹하여 잘못된 윤리 원칙을 받아들이도록 하고 있다. 이 점에서 자연주의 윤리학의 전반적인 목적에 반하는 이론이다. - P71

 선에 대한 정의가 발견될수 있다는 확신에서 출발하게 되면, 우리는 선은 사물의 어떤 하나의 속성외의 다른 것을 결코 의미할 수 없다는 확신에서 논의를 출발하는 셈이 된다. 이렇게 되면 그 속성이 무엇인지를 발견하는 일이 곧 우리의 과제가 되어버린다. 하지만 선의 의미가 적용되는 한 무엇이든 간에 선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하게 되면, 우리는 훨씬 더 열린 마음에서 논의를 시작하는 셈이 된다. - P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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