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3년, 인천 제물포항이 개항장이 되면서 서양의 외교관, 선교사, 상인 등 많은 사람들이 조선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당시 인천에서 한성까지 가는 방법은 걷거나 우마차를 타는 것뿐이었다. 못해도 열두 시간이 소요되는 길이었기에 사람들은 인천에서 하루 머물고 다음날 이동하곤 했다. 이에 눈치 빠른 무역상 호리 히사타로가 제물포항 근처에 이층짜리 목조건물을 세우고 숙박영업을 시작했다. - P59
"네가 말하는 니꼴라 유치원은 대불호텔과 좀 비슷해.‘ 말을 마친 진이 얼음이 가득 든 아메리카노를 쭉 들이켰다. 날씨가 꽤 쌀쌀한데 춥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뜨거운 라테를 시켜놓고 입에도 대지 않았다. 대신 그 자리에서 바로 핸드폰으로대불호텔을 검색했다. 이상했다. 대불호텔은 1978년에 철거되어 터만 남아 있었던 것이다. 나와 동갑내기인 그가 호텔을 봤을 리없었다. 나는 살짝 짜증을 냈다. - P60
인연이란 참 이상하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그렇다. 그때 우리는 친구였고, 아마 그런 관계로 계속 남을 수도 있었다. 아니,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보면 애초에 우리는 어떤 인연도 맺지 않을 수있었다. 하지만 우연은 언제나 어떤 계기를 만들고, 계기는 사람들의 관계를 어떤 시작점 혹은 마침표로 훌쩍 데려다놓는다. - P60
우리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터미널로 가는 길에 짧게 대화를 나누었는데 어쩐지 죽이 좀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별 내용은 없었다. 연예인 이야기 하는 일, 취미, 가본 여행지. 이후 우리는 종종 따로 만나기 시작했다. 역시 별다른 의미는없었다. 비슷한 대화가 반복됐다. 연예인, 취미, 여행지. 아, 우리만의 주제가 있긴 했다. 그러니까 엄마들. 다소 유난스럽고 소녀같은 우리 엄마들에 대해서. - P62
그래서 나는 최선을 다해 내 마음을 그에게 드러내지 않았다. 그가 은연중에 표현하는 마음을 노골적으로 모른 척했다. 그래서우리는 우리에 대해 이야기해본 적이 없었다. 늘 다른 사람들에대해 이야기했다. 엄마, 옹주, 황녀, 박지운・・・・・・ 그리고 내 소설에 등장하는 사람들. 음험한 비밀을 알게 된 여인. - P63
. 정확히 말하면, 내가 묘사하는 니꼴라 유치원의 풍경과 분위기가 대불호텔의 빈터와 주변풍경을 떠올리게 한다고 했다. 인천우체국, 일본우선주식회사, 일본제1은행, 답동성당 같은 근대 건축물로 이루어진 인천 중구의풍경을 말이다. 그는 덧붙였다. 아마 내가 그 동네에 직접 가보면 자신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그러더니 물었다. "어때? 한번 가볼래?" 나는 조금 당황했다. 물론 나는 가보고 싶었다. 굉장히 흥미가 생겼으니까. - P64
걱정할 게 뭐가 있단 말인가. 어차피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만 주고받을 텐데. 아무 일도 없을텐데. 나는 머릿속으로 중얼거렸다. 중요한 건 나의 원한이다. 이걸 돌려주는 일이다. 그게 가능하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지. 해볼게. 어디 한번 해보자. 나는 진에게 대답했다. "그래, 가보자. 직접 한번 보지 뭐."
그래서 그 주 목요일 아침, 인천으로 향하는 1호선 전철을 탔다. 그렇게 나는 대불호텔에 가게 되었던 것이다. - P65
그러나 나를 반긴 건 옛 시절의 분위기가 아니라 회색 쇠창살과 그 안의 황량한 빈터였다. 날씨가 추워서 그런지 더 을씨년스러워보였다. 심지어 쇠창살 울타리 입구에는 단단해 보이는 커다란 자물쇠가 채워진 채 안내판이 붙어 있었다. ‘전시관을 목표로 한 건물 재건 공사에 들어가니 완공시까지 출입을 불허합니다. - P65
"아, 이 정도인 줄은 몰랐네. 좀 찾아보고 올 걸 그랬다." 진이 옆에서 눈치를 보며 말했다. 미안해하는 게 느껴졌다. 나는 짜증조차 나지 않았다. 그는 근처 생활사 박물관에 한번 가보자며 나를 격려했다. 어쩌면 거기에는 도움이 될 만한 자료가 있을지도 모른다면서 말이다. 하지만 나는 계속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쇠창살 사이를 노려보았다. 봐, 네가 하는 일은 다 이 모양 이 꼴이야. 결국 이렇게 됐잖아? 뭐가? 대체 뭐가? - P66
"저 사람 저기서 뭐하는 거지?" 내가 중얼거리자 진이 옆에서 대꾸했다. "뭐라고?" "저기 봐. 사람이 있어. 어떻게 들어간거지?" 그가 쇠창살 가까이 다가왔다. "어디에?" "저기 있잖아." 나는 손가락을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 자리에 아무도 없다는 걸 알아챘다. 나는 홀린 기분으로 멍하니 서 있었다. - P67
나는 그를 쳐다봤다. 보애 이모를 꼭 닮은 옆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웃지 않아도 늘 미소가 걸려 있는 다정한 표정. 그러나 그날그 순간 그의 표정은 어두웠다. 무슨 일이냐고 묻자, 그는 별일 아니라는 듯 가볍게 숨을 들이마시며 말을 이었다. "갑자기 외할머니가 요즘 부쩍 그 이야기를 많이 하거든." "외할머니?"
아, 박지운. - P68
나는 그를 재촉했다. 그가 난처한 얼굴로 나를 보다가 불안한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고연주는 녹색 재킷이 잘 어울렸대." 나는 방금 목격한 여자를 떠올렸다. 녹색 재킷을 입은 호리호리한 여자. 그녀가 분명 내 앞에 있었다. 어쩌면 이건 꿈이 아닐지도. 그래. 이건 꿈이 아니다. 결코 꿈이 아니야. 그가 심호흡을 하더니 말을 이었다. "1955년에 대불호텔에서 여자 한 명이 죽었대." 아아, 세상에. - P69
물론 그가 내게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다 털어놓아야 할 이유는 없었다. 나 역시 내 마음을 그에게 드러내지 않으려 매우 노력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가 곤란해하는 표정으로 나를 피하며 망설이는 순간, 나는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정말로 친구에 불과하구나. 아니, 어쩌면 그보다도 훨씬 더 먼 사이일지도 모르겠구나. - P70
"다 거짓말일 수도 있어. 우리 외할머니는 네가 아는 것보다 훨씬 별난 사람이거든."
나도 모르게 대답했다.
"상관없어." - P71
그리하여 우선, 1918년으로 거슬러올라가는 것이 좋겠다. 그해호리 가문은 대불호텔을 중국인 라이더위안?徳?에게 매각했다. 오랜 경영난 때문이었다. 1899년 경인선이 개통되면서 사람들이 인천에서 굳이 하루를 머물 필요가 없어졌던 것이다. - P71
자, 드디어 고연주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다. 녹색 재킷이 잘 어울리던 여자. - P72
아버지가 죽고 가세가 기울면서 고연주는 식구들과 헤어졌다. 어머니와 막냇동생은 큰오빠 내외가 사는 서울로 떠났다. 고연주는 따라가지 않았다. 큰오빠에게 짐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결정을 하는 데는 선교사들의 배려가 큰 도움이 되었다. 그들은 고연주가 그들의 숙소에 기거하면서 공부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때 그녀는 겨우 열두 살이었다. - P73
소문이 돌았다. 선교사들이 귀국할 때 ‘가장 뛰어난 학생을 데리고 갈 거라고, 그녀는 누군가의 호의가 사라지면 그와 함께 내동댕이쳐질지 모르는 자신의 처지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그러기위해서는 이 나라를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선교사들을 통해 알게 된 나라 미국. 하나님의 나라 미국, 평등하고 풍요로운 나라 미국, 미국, 미국, 아, 아메리칸드림. 거기에 도착하면 누구에게도신세지지 않고 살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것이다. 아, 아름다운아메리칸드림. 그녀는 오직 이 나라를 떠나기 위해 공부했고, 선교사들의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했다. - P74
뢰이한.
그는 라이 가문의 일원이자 중화루의 관리인이었다. 그는 가문사람들이 이민을 갈 때 함께 가지 않았다. 1955년에도 중화루에 남아 있었다. 그러니까 박지운은 전남편이었던 뢰이한에게 들은이야기를 자기 방식대로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때문에 나는 어디까지가 박지운이 직접 목격한 일이고, 어디서부터가 뢰이한에게 들은 이야기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 P78
나는 여전히 그들을 모른다. 어쩌면 모르기 때문에 이 이야기를 정리하는 일에 더더욱 매달린 건지도 모르겠다. 조금이라도이해하기 위해서, 어떻게든 실체를 느껴보기 위해서 이야기의 또다른 등장인물, 지영현을 화자로 내세우면서까지 말이다.
그것이 나의 최선이었음을 우선 말해두고 싶다. - P79
2부
go away, Eleanor, we don‘t want you any more, not in our Hill House, go away, Eleanor, you can‘t stay here
- Shirley Jackson, The Haunting of Hill House
1
그들은 목적지가 분명해 보였다. 특히 남자 쪽이 그랬다. 그는툭 불거진 매부리코에 덥수룩한 수염이 눈에 띄는 백인이었는데, 배에서 내릴 때부터 손에 종이 한 장을 들고 있었다. 아마 약도인모양이었다. 꽤 믿음직스러운 정보인 듯했다. 확신에 찬 눈길로종이와 항구 주변을 몇 번 번갈아 바라보더니, 망설이지 않고 곧장 앞으로 걸어나갔으니까. 나는 조금 놀랐다. - P83
나는 여전히 어디서든 겉돌았다. 시장에서, 거리에서, 항구에서, 그리고 당숙모의 집에서 모든 것이 낯설고 어색했다. 때문에 나는 저 남자의 위풍당당한 걸음걸이와 여유 있는 표정이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그의 뒤를 쫓았다. 그리고 이내 큰길을 사이에 두고 그를따라 천천히 걸었다. - P84
그럴 때 연주는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했다. 그러니까, 무언가에 매혹된 것 같았다. 그래. ‘매혹‘. 어릴 적, 옆집 친구에게서 배운단어이다. 그 아이는 말했다. ‘매혹되었기 때문에 어찌할 수 없는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행동하게 되는 것이라고. 나는 아주 오랫동안 그 단어를 기억했다. - P84
그 순간, 남자가 내 쪽으로 고개를 불쑥 돌렸다. 나는 흠칫 놀라 그 자리에 섰다. 다행히 그가 바라본 건 내가 아니었다. 그는내 뒤쪽의 항구를 가리키며 옆에 선 일행에게 뭐라 뭐라 큰 소리로 떠들었다. 일행 역시 백인이었다. 나는 자연스레 그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여자는 남자의 말에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는데, 웃는 것 같기도 하고 무표정해보이기도 했다. 어쨌든 남자와는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 P85
아주 잠시 나는 그녀와 똑같은 머리를 한 나를 상상해보았다. 뻣뻣한 단발 대신 길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지닌 나. 머릿결이 반짝반짝 빛나는나. 화려하게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이 돋보이는 나.... 어색하기짝이 없었다. 그러다 불현듯, 그 머리가 잘 어울리는 사람이 생각났다. 연주. - P86
"손님이 없으니까 아주 별짓을 다 하는구나.‘ 정말로 며칠째 손님을 한 명도 못 찾았다. 그리고 벌써 오후 세시가 넘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텅 빈 거리를 혼자 걸었다. 그러다문득, 자리에 멈춰 섰다. 저 두 사람, 어디로 가는 거지? - P88
"아유 루킹 포호텔? 아이 우드 라이크 투 인트로듀스 유.. 여자가 남자에게 뭐라고 말을 건넸다. 남자가 대답했다. 나는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아쉽게도 이게 내 영어 실력의 한계였다. 아니다. 이건 실력도 아니었다. 혹시 모를 순간을 위해 연주가알려준 문장을 대충 외워두었을 뿐이다. 나는 늘 한국인들만 상대했다. 어수룩한 부두 노동자들, 가난한 여행자들. 쉴 곳이 필요한 정체 모를 사람들. - P87
와. 이게 웬일이야? 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거리를 가로질러 골목으로 뛰어들어갔다. 두 사람보다 내가 먼저 대불호텔에 도착해야 했다. 내가 그들을 데려왔다고 말해야 했다. 그들의 생각이나 판단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고연주,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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