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원칙적으로는 전(前)산업화(préindustriel, preindustrial) 시기의 유럽 경제사에 관한 저작들을 단순히 재손질하여 내놓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종종 원사료를 다시 보아야 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연구하는 중에 15-18세기의 이른바 경제적 현실들을 직접 관찰하면서 당황하게 되었다는 점을 고백해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경제적 현실들이 전통적이고 고전적인 여러 도식들과 잘 맞지 않거나 때로는 전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 P15
경제학자들의 경우 경제를 하나의 동질적인 실체로 보기 때문에 주변 배경으로부터 경제만을 따로 추출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며, 또 수로 표현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으므로, 그렇게 추출한 경제현상을 측정할 수 있고 또 측정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들이 사용하는 도식들 역시 구체적 현실과 맞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 P16
(전략). 즉 경제학은 처음부터 다른 것들을 사상한 채 이런 특별한 분야만 골라서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는 불투명한 영역, 다시 말해서 흔히 기록이 불충분하여 관찰하기 힘든 영역이 시장 밑에 펼쳐져 있다. 그것은 어느 곳에서나 볼수 있고 어마어마한 규모로 존재하는 기본활동의 영역이다. - P16
다른 한편으로, 시장이라는 광범한 층의 밑이 아니라 그 위로 활발한 사회적 위계가 높이 발달해 있다. 이런 위계조직은 자신에게 유리하게 교환과정을 왜곡시키며 기존질서를 교란시킨다. 원하든 아니면 의식적으로는 원하지않든 간에, 그것은 비정상과 "소란스러움"을 만들어내며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자신의 일을 수행한다. 18세기의 암스테르담 상인이나 16세기의 제노바 상인은 이 위계의 상층에 자리 잡고서 원거리에서 유럽 경제나 세계경제의 전 분야를 뒤흔들 수 있었다. - P17
다른 한편으로, 시장이라는 광범한 층의 밑이 아니라 그 위로 활발한 사회적 위계가 높이 발달해 있다. 이런 위계조직은 자신에게 유리하게 교환과정을 왜곡시키며 기존질서를 교란시킨다. 원하든 아니면 의식적으로는 원하지않든 간에, 그것은 비정상과 "소란스러움을 만들어내며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자신의 일을 수행한다. 18세기의 암스테르담 상인이나 16세기의 제노바 상인은 이 위계의 상층에 자리 잡고서 원거리에서 유럽 경제나 세계경제의 전 분야를 뒤흔들 수 있었다. - P17
나의 이런 시각을 든든하게 뒷받침해준 것은 똑같은 틀을 통해서 현재의사회가 돌아가는 모습을 상당히 빨리, 그리고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는점이다. 시장경제는 오늘날에도 언제나처럼 광범위한 교환을 좌우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통계에 잡히는 만큼에서만 그렇다. 시장경제의 가장 뚜렷한 표시인 경쟁이 현재의 모든 경제를 지배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누가 그것을 부인하겠는가?). - P18
그리하여 이 삼분법적 도식은 내가 의도적으로 모든 이론을 배제하고 단지 구체적인 관찰과 비교사의 방법으로만 이 책을 써갈 때 참조표가 되었다. 여기에서의 비교란 우선 시간을 통한 비교로서, 장기 지속(la longue durée)과 현재 과거의 변증법이라는 언어를 통한 것이었으며, 그것은 결코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또한 공간을 통한 첨언하자면 가능한 대로 가장 넓은 공간을 통한 비교였다. - P18
그리하여 이 삼분법적 도식은 내가 의도적으로 모든 이론을 배제하고 단지 구체적인 관찰과 비교사의 방법으로만 이 책을 써갈 때 참조표가 되었다. 여기에서의 비교란 우선 시간을 통한 비교로서, 장기 지속(la longue durée)과현재 과거의 변증법이라는 언어를 통한 것이었으며, 그것은 결코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또한 공간을 통한, 첨언하자면 가능한 대로 가장 넓은 공간을 통한 비교였다. 왜냐하면 나의 연구는 내가 접근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전 세계의 차원으로 확대되었으며, 다시 말하면 "세계화했기 때문이다. - P19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를 구성하는 세 권의 제목은 "일상생활의 구조", "교환의 세계" 그리고 "세계의 시간"이다. 제3권은 국제경제의 형태와 그 주도권의 연속적인 이동에 관한 연대기적인 연구이다. - P19
내가 모든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 물론 불가능하다. (중략). 그리하여 나는 한 권 대신 세 권의 책을 썼다. 이 책을 "세계화하려는" 결심을 했기 때문에 나는 서유럽의 역사가로서 준비하기 힘든 일을 해야 했다. 이슬람 국가에서 체류하면서(알제리에서 10년 동안), 그리고 아메리카에서 체류하면서(브라질에서 4년 동안) 오랫동안 경험을 쌓은 것이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 P20
아르망 콜랭 출판사의 로셀리네 데 아얄라는 편집과 조판작업을 효과적이고 정확하게 해주었다. 내 바로곁에서 일을 도와준 이 여성 협력자들에게 여기에서 단순한 감사 이상의 우정을 표시하는 바이다. 마지막으로 나의 연구의 동반자인 폴 브로델이 없었다면, 제1권을 다시 쓰고 다음 권들을 완성시키거나 또 사실을 설명하고 초점을 맞추는 데에 필요한 논리와 명료성을 검토할 용기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다시 한번 오랫동안 함께 일했다.
1979년 3월 16일 - P21
물질문명, 그것은 인간과 사물이요, 사물과 인간이다. 사물 음식, 주거, 의상, 사치, 도구, 화폐, 마을과 도시의 틀 등 인간이 사용하는 모든 것을 연구하는 것만이 인간의 일상적인 존재를 측정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그러한 대지의 산물을 나누어가지는 사람들의 숫자 역시 의미가 있다. 오늘날의 세계와 1800년 이전의 세계를 놓고 볼 때 곧바로 차이가 나는 외적 표지는 최근의 비상한 인구 증가이다. - P31
인구는 훌륭한 지표가 된다. 인구는 성공과 실패의 대차대조표를 보여준다. 그것만으로도 지구상의 지리적인 차별성이 드러난다. - P31
세계의 인구 : 만들어낸 수들
오늘날에도 우리는 세계 인구의 약 10퍼센트 정도에 대해서만 자세히 알 수있을 뿐이다. 하물며 과거의 인구에 대해서는 불행히도 그야말로 대단히 불완전한 지식밖에 없다. 그렇지만 단기적으로나 장기적으로나, 또 지방적인차원에서나 거대한 규모의 세계적인 차원에서나 모든 것이 인구수, 그리고 그것의 변화에 연관되어 있다. - P32
밀물과 썰물
15세기에서부터 18세기까지 인구는 늘기도 했고 줄기도 했다. 그리고 그에따라 모든 것이 바뀌었다. 만일 인구가 늘어나면 우선 생산과 교환이 늘어난다. 늪지 또는 산지 등의 변두리 황무지 땅으로 경작지가 확대되고 수공업 생산도 발달한다. 마을이 커지고 더 빈번하게는 도시가 커진다. 정착지를 떠나 이동하는 사람들 역시 늘게 마련이다. 그 외에도 인구 증가의 압력은 많은 건설적인 대응들을 불러일으킨다. - P32
그 과정에서 해당 인구는 "문턱점(seuils critiques, criticalthreshold)"¹을 넘어서게 되고 그때마다 그 구조 전체가 새로이 문제가 된다. 간단히 말해서 이 게임은 단순하지도, 단선적이지도 않다. 오늘날에도 인구의 과중한 부담은 사회가 부양할 수 있는 가능성의 범위를 종종 넘어서는데, 과거에는 말할 필요조차 없다. - P33
제1장
1. Selon Ernst Wagemann, Economía mundial, 1952, 1, pp. 59 08. - P759
서유럽의 경우에 다소간 정확한 시점을 잡으면, 1100-1350년에 걸친 장기적인 인구 증가, 1450-1650년의 또다른 증가, 그리고 다시 1750년 이후의 새로운 증가를 들 수 있다. 특히 이 마지막 경우는 앞의 경우들과 달리, 더 이상 인구 증가 이후에 인구 감소가 뒤따르지 않았다. - P33
(전략). 오늘날(적어도 1945년 이후) 후진국의 인구 증가는 생활수준의 급격한 하락을가져오기는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인구 자체가 잔인할 정도로 감소하는 인구의 디플레이션 현상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인구 감소는 매번 몇몇 문제들을 해결해주고, 긴장을 없애주며, 살아남은 자에게 유리한 특권을 부여한다. 말하자면 극약처방이지만 어쨌든 처방은 처방이다. 14세기 중반의 흑사병과 그것을 이은, 그리고 더 큰 피해를 가져다준 질병들이 지나가고 난 뒤, 남은 유산들은 소수의 사람들에 집중되었다. - P34
그런데 이 장기적인 변동은 유럽 이외 지역에서도 일어났으며, 그것도 같은 때에 그러했던 것 같다. 중국과 인도 역시 유럽과 같은 리듬으로 상승하고 후퇴했던 것으로 보인다. (중략). 나아가서 13세기에 대해서도 성왕(聖王) 루이가 다스리는 프랑스로부터 저 멀리몽골 치하의 중국에 이르기까지 그러한 동시성을 상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단번에 문제들의 성격을 다르게 만드는 동시에 단순화시킨다. 인구 동향은 경제, 기술, 의료의 진보와는 사뭇 다른 원인에서 기인할 수도 있으리라는 것이 에른스트 바게만의 결론이다.⁴ - P35
4. Emmanuel Le Roy Ladurie, Les Paysans de Languedoc, 1966, I, p. 51 - P759
부족한 통계수치
15세기와 18세기 사이의 세계 인구가 어떠한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역사학자들이 제공하는 근거가 취약하고 서로 상치되는 일부 숫자를 가지고는 통계학자들 간에 견해의 일치를 볼 수 없다. - P35
우선 통계수치가 거의 없고 그나마도 그렇게 확실하지는 않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통계수치를 찾아볼 수 있는 곳으로는 우선 유럽이 있고, 또 몇몇 훌륭한 연구가 수행된 중국이 있을 뿐이다. (중략). 그러나 그 외의 세계는 어떠한가? 인도에 대해서 우리는 거의 아무것도모른다. 인도는 일반적으로 자체의 역사에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고, 그것을 밝혀줄 수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중국 이외의 아시아 역시 일본을 제외하고는 사정이 비슷하다. 물론 오세아니아에 대해서도 확실한것은 아무것도 없다. - P36
그런데 이렇게 인구수가 많지 않은 지역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을까? 통계학자들은 오세아니아 전체 인구를 어느 시기이든 상관없이 약 200만 명 정도로 추산한다. - P36
앙헬 로센블라트가 생각하기에 최상의 방법은 소급법이다. 즉, 오늘날의수치에서 출발하여 과거로 거슬러올라가는 것이다. 이 방법에 따르면, 유럽인의 정복 직후 아메리카 전체의 인구가 1,000만~1,500만 명이라는 매우 낮은 수치로 귀결되며, 이 빈약한 인구는 더욱 감소해서 17세기에는 800만명이 된다. 이 인구가 완만하게나마 다시 증가하는 것은 18세기부터의 일이다. - P37
(전략). 이 엄청난 수치들을 보면 1500년경 아메리카에 8,000만에서 1억 명의 인구가 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고고학적인 증거와 바르톨로메 데라스 카사스 신부를 비롯한 아메리카 정복 시대의 많은 연대기 작가들의증언을 가져다 댄다고 해도 이것을 곧이곧대로 믿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만 절대적으로 확실한 사실은 유럽인의 아메리카 대륙 정복과 함께 거대한 인구 괴멸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 비율이 아마 10 대 1까지는 아닐지라도, 14세기 유럽 대륙에서 기승을 부린 흑사병이나 그것에 뒤이어 발생한 질병의 재앙들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거대한 수준이었다는 점은 확실하다.
**Bartolomé de Las Casas(1484-1566) : 스페인의 가톨릭 신부, 아메리카에서 백인이 인디오를무참하게 살상하는 모습을 보고 이를 고발하는 책 인디오 파괴에 대한 짧은 보고시(Brevisimarelación de la destruccion de las Indias)」를 써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 책에는 심할 경우한 번에 몇만 명에서 몇십만 명의 인디오가 죽임을 당했다고 기록되어 있다(이를 인디오 인구에대한 흑색 전설[Black Legend]‘이라고 한다). 이것이 과장이라는 비판이 늘 제기되었으나, 현재까지의 연구-비록 그 내용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더라도는 이것이 오히려 사실에 가깝다고 보고 있다. - P38
유럽과 아프리카에서 들어온 바이러스, 박테리아, 기생충들이 일으키는질병은 마찬가지로 대서양을 넘어온 동물, 식물, 사람보다도 더 빠르게 퍼져나갔다. 자신들의 병원체에만 적응해 있던 인디오들은 이 새로운 위험 앞에 무방비 상태였다. 유럽인들이 신대륙에 도착하자마자 천연두가 발병했다. 이 병은 1493년부터 이미 산토 도밍고에서 퍼지기 시작했다. 1519년에는 포위된 멕시코에 에르난 코르테스*가 침입해 들어가기도 전에 천연두부터 발병했고, 1530년대의 페루에서도 스페인군들이 도착하기 전에 병부터 퍼졌다.
* Hernán Cortés(1485-1547) : 스페인의 신대륙 정복자. 가난한 귀족 출신으로 1504년에 신대륙으로 건너가 산토 도밍고와 쿠바에서 근무했다. 1518년 쿠바 총독의 명으로 아즈텍 원정대를 지휘하여, 1521년 아즈텍 제국의 수도 멕시코를 파괴했다. - P39
이들의 수치들은 유럽인의 정복 이후이냐 이전이냐에 따라 어느 것이나 사실일 수 있고 개연성이 있다. 우리는 우선 보이틴스키와 엠브리의 견해를 포기하게 된다. 엠브리는 일전에 "콜럼버스 발견 이전 시대에 알래스카로부터 혼 곳에 이르는 지역 전체에서 1,000만 명이상의 사람이 살았던 적은 결코 없었다"고 이야기했다.¹³ - P41
13. W. S. et E. S. Woytinski, World Population and Production, Trends and Outlook, 1953; E. R. Embree, Indians of the Americas, 1939. 두ㅏ으ㅏ 책은 다은에ㅜ인용되어었더워. P. A. Ladame, Le Rôle des migrations dans le monde libre, 1958, p. 14. - P760
어떻게 계산할 것인가?
아메리카 대륙의 예는 상대적으로 확실한 몇몇 수치로부터 출발해서 다른것을 추정하고 상상하는 매우 단순한 방법의 실상이 어떠한지를 보여준다. 이 불안정한 방법은 의심할 여지없는 문서로 증명된 사실에만 만족하는 역사가를 불안하게 할 텐데, 그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 P41
모두가 들리기도 하고 모두가 옳기도 한 이 논쟁에서 우리는 실제 계산을 수행한 사람 편에 서려고 한다. 그들은 지구상의 다양한 인구집단 사이에 고정된 것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매우 느린 변화만이 일어나는 어떤 비율이있다고 가정한다. 이것이 모리스 알박스의 견해이다.¹⁵ - P41
15. Morphologie sociale, 1938, p. 70. - P7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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