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험 없는 과학은 아무것도 아니다. 1965년 노벨상을 받은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Richard Feynman의 말을 들어보자. "대개 새로운 법칙을 찾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첫째, 법칙을 추론한다. 둘째, 추론한 법칙이 옳을 경우의 함의를 알아보기 위해 추론한 결과를 수학적으로 계산한다. 셋째, 실험이나 경험(세계의 관찰)을 통해 계산한 결과를 자연에 대입한다. 계산한 결과를 관찰 내용과 직접 비교함으로써 결과가 맞는지 살피는 일이다. 계산을 통한 법칙이 실험과 일치하지 않은 경우 그 법칙은 틀린 것이다. 이 간단한 언명 속에 과학의 열쇠가 들어 있다. 추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과학자의 실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추론을 한 사람이 누구인지, 그의 명성이 얼마나 큰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실험과 일치하지 않는 법칙은 틀린 것이다."¹ - P7
1. Richard Feynman, The Keyto Science, Lectureat Cornell University, 1964 (www.youtube.com/watch?v=b240PGCMwV0) - P390
고대 그리스인도 현대인 못지않은 지성의 소유자들이었고, 그 중 일부는 세계란 무엇인가에 관해 철학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호기심과 여유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극히 적은 예외를 제외하고 고대 그리스인이 할 수 있었던것은 대개 철학적 사유가 전부였다. 철학을 폄훼하려는 게 아니다. - P7
"여기 표명한 나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해도, 또 나의 역설 paradoxes (여기서는 어떤 주의나 주장에 반대되는 이론이나 말의 의미로 쓰였다_옮긴이)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해도 수많은 실험과 발견만큼은 주목하시라. 우리는 이 실험과 발견들을 캐냈고, 엄청난 노고와 큰돈을 들여 밤잠을 설쳐가며 이들을 입증했다. 여러분은 우리가 제공하는 실험과 발견을 즐겁게 이용하시라. - P8
길버트의 말을 바꿔보자면, 실험과 일치하지 않는 법칙은 틀린 것이다. ‘큰돈‘에 대한 언급 또한, 과학이 진보하려면 가장작은 물질 구조를 탐색하는 유럽입자물리연구소 CERN의 대형강입자 충돌기 Large Hadron Collider나 우주 탄생의 원인인 빅뱅의 세부사항을 밝혀주는 우주 망원경 등 값비싼 도구를 만들어야 하는 이 시대에 전혀 낯설지 않다. - P8
과학과 실험 간의 의존 관계를 보여주는 더 극적인 예는 19세기의 증기기관이다. 증기기관은 원래 여러 차례의 시행착오를 거쳐 개발됐다. 증기기관은 기관내의 작용에 대한 과학자들의 탐구심을 부추겼다. - P10
많은 사람들은 처음에 진공펌프가 왜 그토록 중요한 기술적 성과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진공펌프는 예로부터 여러 다른 형태로 존재해온 기구다. 효과적인 진공펌프가 없었다면, 19세기 진공 유리관 내부의 ‘음극선 cathode rays‘ 작용 연구나, 음극선이라는 ‘광선‘이 실제로 더 이상 쪼개지지 않는다고 알려져있던 원자에서 분리돼 나온 입자들, 즉 ‘전자electron‘의 연속체라는 발견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 P10
그러나 이제 우리는 원자뿐 아니라 원자보다 작은 입자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추론에 기댔던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보다 훨씬 더 근원적인 방식으로알고 있다. 추론을 검증하기 위해 실험을 실행할 수 있었고, 또한 실험을 실행할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 P10
과학자가 아닌 사람들은 때로 가설과 이론 사이의 구분을 혼동한다. 많은 과학자들이 용어를 잘못 쓰거나 엉성하게 쓰는 탓이다. 일상 언어의 용법에서 우리가 뭔가에 관한 ‘이론‘이 있는 경우, 예컨대 왜 어떤 사람들은 토스트에 땅콩버터를 발라 먹는 것을 좋아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아닌지에 관한 이론이 있다면 그것은 그저 추측이거나 가설일 뿐 과학에서 말하는 ‘이론‘이 아니다. 찰스다윈Charles Darwin의 진화론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과학을 모르기 때문에 다윈의 이론이 "단지 이론일 뿐"이라고 말한다. - P11
중력은 과학의 작동방식에 대한 또 하나의 사례다. 뉴턴의 이론은 처음에 모든 검증을 통과했지만, 관측이 발전하면서 그 이론이 태양에서 가장 가까운 행성이자 중력이 강하게 작용하는 지점(강력한 중력장이 존재하는 지점)에서 궤도순환을 하는 수성 궤도의 미묘한 세부 요소들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중략).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현재까지 가장 완벽한, 과학계 최고의 중력이론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뉴턴의 이론을 폐기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뉴턴의 이론은 여전히 특정 계에서 완벽하게 통하기 때문이다. - P12
우리가 배운 일반상식과 달리, 과학은 아주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는 혁명적으로 진보하지 않는다. 과학은 기존에 발전한 것 위에 새로운 것을 쌓아나가는 점증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 P13
이 모든 것들은 과학의 역사적 발전을 밝힐 목적으로 이 책에 선정해놓은 실험을 통해 분명해진다. 과학의 발전은 단순한 철학적 추론을 극복했던 1,600년 이전의 예외적인 실험 사례 두 가지 정도에서 출발해, 우주의 구성요소에대한 오늘날의 발견에 이른다. 이 책에서 선정한 실험과 발견들은 부득이하게개인적인 선택의 결과물이며, 100개를 선정해야 하는 지면상의 한계에 제약을받는다. - P14
대형 강입자 충돌기 속 진공의 기원은 17세기의 수학자이자 물리학자 에반젤리스타 토리첼리 Evangelista Torricelli의 실험이다(실험 8을 보라). 그러나 토리첼리는 힉스 입자 Higgs particle의 존재를 발견하기 위한 실험을해보기는커녕 상상조차 못했을 것이다. - P14
여기서 설명하는 개념 중 일부가 상식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길버트의 말을 떠올려보라. "우리가 만든 많은 추론과 가설은 필시 받아들이기 어려워 보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수용되는 견해들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추론과 가설은 "증명(실험)을 통해 권위"를 얻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명제, 실험과 일치하지 않는 법칙은 틀린 것이다. - P15
04. 강의를 위해 처형 시간을 맞추다. •인체를 해부한 베살리우스
16세기 중반에 시작된 과학의 르네상스 시대에서 중대한 분기점은 1543년이다. 코페르니쿠스Copernicus가 유명한 저서 《천구의회전에 관하여 Orbium Coelestium》를 출간함으로써 지구를 우주의 중심 위치에서 끌어내리고,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Andreas Vesalius가 《인체의 구조에 관하여 De Humani Corporis Fabrica》를 출간해 동물 세계에서 특별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던 인간이라는 종의 지위를 끌어내린 해다. - P33
당시의 이발사겸 외과의사는 논란의 여지는 있으나) 도살업자나 별반 다를 바 없었다. 해부학 교수들은 안전거리를 유지하고 서서 (말 그대로 손을 더럽히지 않고)실제 증거뿐 아니라 상상력을 이용한 해부를 통해 밝혀진 내용을 학생달에게 강의했다. - P33
베살리우스 전에 인체 해부에 대한 일반 지식은 고대 이후로 전승된 것이었고 이는 고대 로마의 의학자 클라우디오스 갈레노스Claudios Galenus (갈렌 Galen이라 알려져 있다)의 연구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중세 유럽인은 고대인이 자신들보다 훨씬 더 지혜로우며, 뛰어넘기는커녕 모방하기조차 불가능할 만큼 우월한 지식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은 틀린 생각이었다. - P35
베살리우스는 또한 고도로 숙련된 화가에게 자신의 강의에 쓸 커다란 그림을 그리게 했고, 그 중 여섯 점은 1538년 《여섯 점의 해부학 그림 TabulaeAnatomica Sex》이라는 책으로 발간됐다. 이 그림 중 세 점은 베살리우스가 직접 그렸고 나머지 세 점은 티치아노Titian의 제자였던 칼카르의 요한네스 스테파노 John Stephen of Kalkar가 그린 것이다. - P35
《인체의 구조에 관하여》는 동료 교수와 의사를 비롯한 전문가용서적이었다. 그는 자신의 연구를 학생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그리고 심지어 교육 수준이 떨어지는 평범한 사람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같은 해 《인체의 구조에 관한 요약집 De Humani Corporis Fabrica Librorum Epitome>이라는 공식 제목을 단 개괄서도 출간했다. 이 책은 줄여서 《요약집Epitome》으로 통한다. - P36
베살리우스가 직업을 바꿔야 했던 이유는 필시 그의 이론에 대한 일부 동료들의 반대 때문이었을 것이다. 파도바대학교도 예외가 아니었다. 파도바대학교로 오기 전 파리에서 베살리우스가 다니던 대학의 의사였던 자코부스 실비우스 Jacobus Sylvius는 베살리우스가 제정신이 아니라며 비난을 퍼부어댔고, 갈레노스를 넘어서는 해부학 지식의 진보는 아예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 P36
008 공기의 무게를 측정하다 ・토리첼리의 진공
1640년대 초반에 이탈리아의 에반젤리스타 토리첼리 EvangelistaTorricelli는 30피트(약 9미터) 이상을 판 우물에서는 물을 펌프로끌어올릴 수 없다는 문제를 파고들었다. 펌프의 작동방식은 자전거펌프의 한쪽 끝(열린 쪽)을 물속에 담그고 펌프 속으로 물을 끌어들이는 원리와 비슷하다. - P46
실험에서 유리대롱의 한쪽 끝을 막고 수은을 가득 채운 다음, 수은이 들어 있는 통 속에 대롱을 거꾸로 세웠더니 대롱 속에 꽉 차 있던 수은의 높이가 수은이 차 있는 통의수면에서 30인치 (76센티미터)까지 내려오면서 대롱 속 수은 위쪽에 틈새 공간이 생겼다. 그의 예상과 맞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 이 틈새 공간에는 아무것도없었기 때문에 ‘토리첼리의 진공Torricelli Vacuum‘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 P46
토리첼리는 1647년에 사망했지만 프랑스인인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은 그의 발견들을 넘겨받아 더욱 발전시켰다. 파스칼은 이런 종류의 초기 기압계로 측정한 기압이 날씨에 따라 어떻게달라지는지 연구했다. 또 다른 프랑스인인 르네 데카르트는 1647년 파스칼을 찾아가 산으로 기압계를 가지고 올라가 고도에 따라 기압이 어떻게 변하는지 알아보며 흥미로울 것이라고 제안했다. - P47
흥미롭게도 퓌드돔 산 가장 아래쪽에 있던 신부 또한 그날 내내 그곳에 설치한 기압계 수치가 변하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기압은 산 아래쪽보다 정상에서더 낮았던 것이다. 결국 이 실험은 고도가 높아질수록 대기가 희박해진다는 것을 입증했고, 이는 고도가 더욱 높아지면 대기가 완전히 없어진다는 것을 암시한다. - P48
009 진공에 매료된 과학자들
보일의 법칙
토리첼리 그리고 파스칼과 처남 페리에의 실험 이후 진공 관련 연구는 과학에서 가장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주제 중 하나가 됐다. 과학자들은 진공 현상을 연구하기 위해 유리병이나 다른 용기에서 공기를 뽑아낼 수있는 효율적인 펌프가 필요했다. 17세기의 시대적 한계로 볼 때 이러한 펌프는 상당한 기술을 요하는 첨단기술 장비였다. - P49
. 1660년대 과학자들이 손에 넣을수 있는 최고의 펌프는 영국의 과학자 로버트 훅이 만든 것이었다. - P49
그는 고도가 높은 곳의 저기압 현상의 원인을 공기의 밀도 저하로 추론했고, 훗날 ‘타우넬리의 가설 Towneley‘sHypothesis‘이라 알려지게 될 자신의 생각을보일에게 말했다. 보일은 이에 흥미를 느껴 조수였던 훅에게 그 가설을 시험해볼 실험의 임무를 줬다. - P50
위의 실험과 달리 보일과 훅이 실행했던 또 다른 실험들에는 공기 펌프가 쓰였다. 기압이 낮아지면 물이 더 낮은 온도에서 끓는다는 것을 보여준 실험이그 중 하나였다(이는 왜 산꼭대기에서 끓인 차가 맛이 없는지 설명해준다). - P50
실험 결과는 1660년 출간된 보일의 《공기의 탄성에 관한 물리역학적인 새로운 실험New Experiments Physico-Mechanical Touching the Spring of the Air》이라는 저서를 통해 세상에 처음 공표됐다. 그러나 당시 보일은 부피와 압력에 관한 반비례 법칙을 명시적으로 상술하지는 않았다. - P51
훅의 실험과 보일의 법칙은 과학적 사고에 매우 큰 함의를 띠고 있었다. 공기는 원자와 분자로 이뤄져 있으며 주변을 돌아다니며 서로 충돌한다는 생각을 뒷받침해줬기 때문이다. - P51
012 월식 주기의 차이는 왜 생기나 •광속을 계산한 올레 뢰머
실험뿐 아니라 ‘관찰‘에 대해 뉴턴이 한 말은 매우 중요하다. 때로 자연은 인간을 위해 직접 ‘실험‘을 시행해준다. 이때 과학자의 역할은 ‘그저‘ 진행 중인 사건을 관찰하고 왜 그 일이 발생했는지 알아내는 것뿐이다. 그러나 매우 총명한 과학자만이 그것을 알아낼 수 있다. 빛의 속도가 유한하다는것을 알아낸 올레 뢰머 Ole Romer가 좋은 사례다. - P59
그 후 여러 해에 걸쳐 뢰머는 목성의 위성들의 월식을 계속해서 점검했고, 월식 현상이 늘 예측한 시간대에 정확히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했다. 그는 이오라는 위성의 월식 현상에 특히 주목했다. - P61
(전략). 하지만 희한하게도 카시니는 이러한 생각을 더 발전시키지 않고 포기했다. 그러나 뢰머는 더 상세한 관측과 계산을 통해 이러한 가설을 발전시켰다. 1676년 8월 아직 그 생각을 버리지 않았던 카시니는 프랑스 과학아카데미 French Academy of Sciences에 경도를 추산할 때 쓰는 이오 월식의 공식 일정표를 수정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렸다. "빛이 이오에서 지구의 관측자에게 도달하는 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즉 빛이 지구 궤도의 절반 격인 거리를 오는데 약 10분에서 11분이 걸리는 듯 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 P61
불행히도 뢰머의 논문들은 대부분 1728년의 한 화재로 유실되는 바람에그의 발표에 관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설명은 다소 왜곡된 보도 기사 정도다. - P62
뢰머는 지구의 크기에 대해 당시 얻을 수 있었던 최상의 추정치를 통해 빛의 속도가 (현대의 단위로) 초속 22만 5,000킬로미터라고 추산했다. 우리가 뢰머의 관측을 이용해 동일한 계산을 할 경우, 그리고 현대 지구 궤도의 값을 끼워 넣을 경우 얻게 되는 빛의 속도는 초속 29만 8,000킬로미터다. - P62
021 지구의 무게를 재는 방법
・캐번디시의 중력 실험
지구의 무게를 재는 실험이 처음 시행된 것은 1790년대 말이었으며, 그결과는 1798년 왕립학회에 보고됐다. 사실 이 실험은 자연력 중에서 가장 약한 것으로 판명된 중력의 강도를 최초로 측정한 실험이었다. - P92
미첼은 1783년에 ‘블랙홀‘이라는 개념을 최초로 생각해낸 인물이다. 그 무렵 빛의 속도가 유한하다는 사실(실험 12를 보라)은 널리 알려져 있었고, 뉴턴의중력 법칙은 질량이 큰 물체일수록 그것을 벗어나려면 더 큰 속도가 필요하다는 것(질량이 클수록 움직이는 데 더 큰 힘의 작용이 필요하며, 속도를 변화시키기도 어렵다는 뉴턴의 운동 제2법칙인 가속도 법칙. 다시 말해 가속도는 질량과 반비례한다는 법칙_옮긴이)을 입증했다. - P92
미첼은 중력에 대한 추론뿐 아니라 중력 관련 실험에도 관심이 있어 중력을측정하는 실험을 고안해냈을 뿐 아니라, 실험에 필요한 대부분의 장치를 직접만들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는 1793년, 실험을 하기 전에 사망했다. - P92
중력 실험은 이해하기는 쉽지만 실제로 행하기는 매우 어렵다. 실험은 당시런던의 변두리 마을이었던 클래펌커먼에 있는 캐번디시 저택의 별채에서 이뤄졌다. 실험의 핵심 장치는 6피트(1.8미터 길이의 나무로 제작한 튼튼하고 가벼운 막대였다. 양끝에는 납으로 된 작은 공을 매단다. 각 공의 무게는 1.61파운드(730그램)였다. 막대는 정중앙에서 볼 때 두 공의 균형이 맞도록 금속 줄로공중에 매달아놓았다. - P93
사실 캐번디시가 제시한 값은 지구의 질량이 아니라 지구의 밀도 값, 즉부피를 질량으로 나눈 값이다. 1798년 6월 21일 캐번디시는 1797년 8월과 9월에 이뤄진 여덟 차례의 실험 결과, 그리고 1798년 4월과 5월에 실행한 아홉 차례의 실험 결과를 종합한 내용을 왕립학회에 보고했다. 그가 보고한 지구의 밀도 값은 물의 밀도의 5.48배였다. 그러나 캐번디시는 약간의 계산 실수를 저질렀다. 그의 실험을 바탕으로 한 지구의 실제 밀도는 물 밀도의 5.45배다. -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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