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중에 올레크가 밝힌 회상에 따르면, 그들은 〈둘 다 깊은 생각이나 자기 성찰 없이> 약혼한 뒤, 몇 달 만에 화려하지 않은 결혼식을올렸다. 결혼을 빨리 한 이유는 로맨스와는 별로 상관없었다. 엘레나는 결혼으로 그의 승진 가능성을 높여 주고, 그는 그녀에게 모스크바를 빠져나가는 수단이 되어 줄 터였다. 비록 두 사람 모두 상대에게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이것은 KGB식의 정략결혼이었다. - P47

덴마크에서 비밀 간첩들의 네트워크를 관리하는 이 자리에 가겠느냐는 제안이 오자 올레크는 주저 없이 기쁘게 받아들였다. 킴 필비가 1933년 KGB에 포섭된 뒤에 밝힌 심정과 비슷했다. - P47

2
고름손 삼촌

나중에 한 MI6 요원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소련의 공산주의제보다 서구 민주주의가 우월하다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 도시 하나를 고른다면, 코펜하겐보다 더 나은 곳은 별로 없을 것이다.> - P49

소련 대사관은 코펜하겐 북쪽 크리스티아니아 거리에 있는 치장벽토 주택 세 채로 구성되어 있었다. 깨끗한 정원이 넓게 뻗어 있고 스포츠 센터와 사교 클럽이 갖춰져 있어서 소련 대사관이라기보다는 웅장한 정문이 있는 호텔처럼 보였다.
(중략)
완전히 세뇌된 KGB요원이 아니고서야 그 누가 이런 자유를 맛보고 나서 여기에 남고싶다는 충동에 저항할 수 있겠는가? - P50

소련 대사관에서 근무하는 스무 명의 관리 중 진짜 외교관은 고작 여섯 명이고, 나머지는 KGB나 소련군 첩보 기관인 GRU 소속이었다. 이곳의 레지덴트인 레오니드 자이체프는 매력적이고 양심적인 요원이었으며, 자기 부하들이 대부분 무능하거나 게으르거나 부정직하다는 사실, 아니 대개 이 세 가지 특징을 모두 갖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 - P50

 요원 대부분은 덴마크인과 만난 이야기를 거짓으로 만들어냈다. 가짜 영수증을 만들고 거짓 보고서를 쓰는 방법으로 자신에게 지급된 돈을 자기 주머니에 넣었다. 중앙은 코펜하겐에 파견된 직원 중 덴마크어를 유창하게 하는 사람이 거의 없고 심지어 덴마크어를 아예 한 마디도 못 하는 사람도 몇 명이나 되는 이 비정상적인 상황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 - P51

어느 날 올레크는 신호 장소인 공중화장실 창턱에 구부러진 옷을 놓아두었다.
어떤 불법 스파이에게 미리 지정된 버려진 편지함에서 현금을 가져가라고 알리기 위해서였다. 그 불법 스파이가 이 메시지를 잘 받았다고 답하려면, 같은 장소에 맥주병 뚜껑을 놓아두어야 했다. - P51

스파이들 사이의 신호 체계에서 진저비어도 평범한 맥주와 같은가? 아니면 여기에 또 다른 의미가 있는건가? 레지멘투라로 돌아와 동료들과 밤새 열띤 토론을 벌인 끝에 그는 문제의 그 스파이가 두 종류의 병뚜껑을 똑같은 것으로 보았다는 결론을 내렸다. - P52

올레크는 어머니의 결혼 전 성(姓)인 <고르노프>라는 가명으로 활동하며 몇 달 동안 덴마크인들과 친분을 다진 끝에, 어느 교사 부부를 설득해 <살아 있는 편지함> 역할을맡기는 데 성공했다. 불법 스파이들과 메시지를 주고받는 것이 그들의 임무였다. 올레크는 덴마크 경찰관 한 명과도 친구가 되었으나 몇 번 그를 만나고 난 뒤 자신이 그를 포섭하는 건지 아니면 그반대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 P52

1957년에는 모스크바에서 열린 세계 청년 축전에서 KGB의 지시로 어떤 미국 여성을 유혹했다. 4년 뒤 소련 대사관의 공보 담당관으로 영국에 배치된 그는 노조 학생 단체, 여러 주류 단체에서 정보원을 포섭했다. 그는 낭랑한 상류층 말씨의 영어를 구사했으며, 여기에 영국식 옛 표현들을 곁들였다. - P53

1965년에 그가 영국의 암호 담당자를 포섭하려다 실패하자, 영국 보안국은 즉시 그를 포섭하려고 시도했다. 영국의 첩자가 되라는 제의를 거절한 뒤 그는 외교상 기피 인물로 판정되어 모스크바로 송환되었다. 그러나 이런 일을 겪고도 그의 열렬한 영국 사랑에는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 P53

 어느 날 올레크는 코펜하겐 홍등가를 찾았다가 포르노 잡지와 성적인 장난감 등을 파는 상점에 순간적인 충동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그리고 거기서 동성애 포르노 잡지 세 권을사서 집에 가져와 옐레나에게 보여 주었다. <난 그저 흥미를 느꼈을뿐이다. 동성애자들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 전혀 몰랐다. 그는 이잡지들을 벽난로 위에 두었다. 소련에서는 누릴 수 없는 자유가 거기 드러나 있었다.
그는 이렇게 썼다. <나는 인간으로서 꽃을 피웠다. 아름다움, 무척 활기찬 음악, 훌륭한 학교, 평범한 사람들이 보여 주는 개방적인태도와 유쾌함에 비하면, 소련이라는 광대하고 황량한 강제 수용소는 일종의 지옥처럼 보일 수밖에 없었다.> - P54

감시당한다는 느낌이 사라진 것은 평생 처음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감시당하고 있었다.
덴마크 안보 정보국Politiets Efterretningstjeneste (PET)은 아주 작지만 대단히 유능한 기관이었다. 이 기관의 임무는 <덴마크를 자유롭고 민주적이고 안전한 나라로 유지하는 데 위협이 되는 작전과 활동의예방, 조사, 격퇴>로 명시되어 있었다. PET는 올레크 고르디옙스키가 바로 그런 위협 중 하나라고 강력히 의심했으므로,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 이 소련의 젊은 외교관이 코펜하겐에 발을 딛는 순간부터 그를 감시하고 있었다. - P55

덴마크 정보국은 (고르노프, 구아르디예체프, 고름손 삼촌 등의 이름을 지닌) 고르디옙스키가 외교관 신분으로 위장한 KGB 스파이라고 거의 확신했다.
어느 날 올레크와 옐레나는 경찰관 친구 부부의 저녁 식사 초대를 받았다. 두 사람이 집을 비운 동안, PET 직원들이 그들의 아파트에 들어와 도청 장치를 심었다. - P56

. 유부남인 소련의 정보관계자가 동성애 포르노에 관심이 있다면, 그것을 약점으로 협박하는 것이 가능했다. 덴마크 정보국은 이 사실을 꼼꼼히 기록해서 일부 동맹국에게 전달했다. 서구 정보 파일에 포함된 올레크 고르디옙스키의 옆에 처음으로 물음표가 찍히는 순간이었다. - P56

그의 결혼 생활에 이처럼 금이 가고 있을 때, 소련 블록 내에서는땅이 뒤흔들리는 격변이 일어나고 있었다.
1968년 1월,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의 제1서기이자 개혁주의자인 알렉산드르 둡체크가 소련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화를 지향하기 위해 여행과 언론에 대한 제한과 검열을 완화했다. 둡체크는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내세워, 비밀경찰의 권한을 제한하고서구와의 관계를 개선하며 궁극적으로는 자유선거를 실시하겠다고약속했다. - P58

모스크바의 KGB 본부는 체코의 개혁 실험을 공산주의 자체에 대한 실존적 위협으로 보았다. 냉전에서 소련에 불리한 쪽으로 저울을 기울일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고 본 것이다. - P59

1968년 초, 서른 명이 넘는 KGB 불법 스파이들이 체코슬로바키아로 침투했다. KGB 국장 유리 안드로포프는 그들에게 체코의 개혁 운동을 방해하고, <반동적인> 지식인 서클에 침투해 프라하의 봄을 지지하는 저명인사들을 납치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KGB의 공작원들은 대부분 서방 관광객으로 위장하고 체코슬로바키아로 갔다. - P59

(전략). 그러나 1968년에 중앙은 파우스트라는 암호명을 쓰는 이스파이가 피해망상에 걸렸다는 결론을 내리고 그를 빼내기로 했다.
1968년 4월, 바실리 고르디옙스키는 우샤코프를 약물로 잠재운 뒤핀란드를 거쳐 모스크바로 빼돌리는 데 성공했다. KGB는 우샤코프를 정신 병원에 넣었다가 풀어 준 뒤 해고했다. 바실리는 <흠잡을데 없이 임무를 수행한> 공로로 KGB 메달을 수상했다. - P60

바실리는 프라하의 봄을 깎아내리고 파괴하려는 KGB 작전의 선봉에서 활약했다. 아버지처럼 그도 자신이 하는 일이 옳은 것인지 의문을 품지 않았다.
올레크는 형이 체코슬로바키아에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형이 벌이고 있는 비열한 짓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었다. 두 형제는 그때도 그 뒤에도 그 일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 P61

1968년 8월 20일 밤, 2천 대의 탱크와 20만 명이 넘는 군대가 체코슬로바키아 국경을 넘었다. 소련군이 주력이었지만, 다른 바르샤바 조약국들의 파견대도 포함되어 있었다.
(중략).
올레크 고르디옙스키는 경악과 혐오를 느꼈다. 성난 덴마크인들이 코펜하겐의 소련 대사관 앞에 모여 침공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는 것을 보며 그는 수치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는 모습을 지켜볼 때도 큰 충격을 받았지만, 체코슬로바키아침공은 그가 봉직하는 정권의 진정한 본질을 훨씬 더 노골적으로 보여 주는 증거였다. - P62

덴마크 정보부는 그가 아내와 나눈 이 위험한 대화를 틀림없이 포착해서, <고름손 삼촌>이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달리 KGB라는 기계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톱니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할 터였다. 그렇다고 그가 딱히 서방에 접근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덴마크를 비롯한 서방 국가들의 정보국에 그의 감정을 알리려는 시도, 감정적 측면의 <스치는 접선>같은 것이었다. - P63

서방은 이 신호를 놓쳤다. 올레크가 손을 뻗었으나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덴마크 안보 당국이 중간에 가로채서 처리하는 정보가 워낙 많기 때문에, 작지만 의미심장한 올레크의 신호는 눈 에띄지 않고 지나가 버렸다. - P63

올레크의 덴마크 근무가 끝나갈 무렵, 모스크바에서 연락이 왔다. <작전 활동 중단. 그곳에 남아 분석하되 작전은 이제 없다.> 모스크바 중앙은 덴마크인들이 올레크 동무에게 지나친 관심을 보인다는 결론을 내리고, 그가 KGB 요원임을 그들이 알아챘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중간에 가로챈 무선 통신 내용을 보면, 올레크가덴마크에 도착했을 때부터 평균 이틀에 한 번씩 그에게 미행이 붙었음을 알 수 있었다. 소련 대사관 직원 누구보다도 높은 빈도수였다.  - P64

어느 서독 외교관의 집에서 열린 파티에서 그는 젊은 덴마크 남성과 대화를하게 되었다. 그 청년은 유난히 친절했으며, 상당히 취한 상태였다.
클래식 음악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가 함께 술을 마시러 가자고 청했지만, 올레크는 집에 가야 한다면서 정중히 거절했다.
그 청년은 덴마크 정보국의 공작원이었고, 그날의 대화는 올레크를 동성애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 P64

PET는 이 계책이 왜 실패했는지 끝내 알아내지 못했다. 그가 고도의 훈련을 받은 KGB 요원이라서 그 유혹 시도를 알아차린 걸까? 아니면 그들이 내세운 <미인>이 그의 취향이 아니었나? 진실은 단순했다. 올레크가 동성애자가 아니라는 것. 그는 상대가 수작을 걸고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 P65

소설과 달리 첩보 작전이 정확히 계획대로 이루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프라하의 봄이 끝난 뒤 올레크는 서방 정보국에 은근한 신호를 보냈지만 상대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 P65

그는 다시 S부에 배치되었고, 옐레나는 외국 외교관에 대한 도청을 맡은 KGB 제12부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녀가 배치된 곳은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대사관과 외교관을 도청하는 팀이었는데, 그녀의 계급도 중위로 높아졌다. 결혼 생활은 이제 기껏해야 <일을 위한 관계> 정도였지만, 두 사람이 실제로 자기 일에 대해 이야기한 적은없었다. 아니, 함께 살고 있는 모스크바 동쪽의 우울한 아파트에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경우가 아예 별로 없었다. - P66

1970년 봄, 영국의 젊은 정보 요원 제프리 거스콧은 얼마 전 캐나다에서 온 <인물 파일>을 뒤적이고 있었다. (중략). 하지만 겉과 속이그만큼 다른 사람도 없었다. 한 동료는 거스콧이 <소련 첩보계에 역사상 그 누구보다도 많은 피해를 입힌 인물일 것>이라고 말했다. - P67

1965년 거스콧은 막 개혁의 물결이 시작되던 체코슬로바키아에 배치되었다. 그곳에서 3년 동안 그는 프리드라는 암호명을 가진 스파이를 관리했는데, 프리드의 정체는 바로 체코 정보국 직원이었다. - P67

거스콧의 책상에 다니첵이라는 암호명으로 놓여 있는 파일은 스타니슬라프 카플란이라는 체코 정보국 하급 관리가 최근에 망명한일에 관한 것이었다.
카플란은 프라하의 봄 직후 불가리아로 휴가를 떠났다가 자취를감췄다. 그러고는 얼마 뒤 프랑스에 나타나 프랑스 정보국에 정식으로 망명 신청을 했다.  - P68

카플란의 파일에는그가 꼽은 사람 100여 명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대부분 체코슬로바키아인이었고 소련인은 다섯 명이었다. 그중 한 명이 유독눈에 띄었다.
카플란은 자신처럼 장거리 달리기를 즐기고 KGB에 들어가기로예정되어 있던 올레크 고르디옙스키와의 우정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올레크가 <분명한 정치적 환멸의 징후>를 나타냈다고 말했다. - P68

거스콧은 추적을 잘 피하고 유능하며 어쩌면 동성애자일 가능성이 있고 한때 자유로운 사상을 품었던 이 KGB 요원이 서방에 다시나타난다면 접근해 볼 가치가 있을 것 같다고 고르디옙스키 파일에적어 두었다. 이렇게 <흥미로운 인물>로 <점> 찍힌 올레크에게는 선빔이라는 암호명이 부여되었다. - P69

1971년 9월 24일, 영국 정부는 소련 정보 요원 105명을 추방했다. 역사상 가장 대규모의 스파이 추방이었다. 풋Foot 작전이라는 암호명이 붙은 이 대규모 추방의 분위기가 조성된 것은 이미 얼마 전부터였다.  - P69

KGB의 첩보 활동이 점점 뻔뻔스러워졌기 때문에 영국 보안국, 즉 MI5는 그들을 치고 싶어 안달하고 있었다. 방아쇠가 된 것은 소련 편물업계 대표로 행세하던 KGB 요원 올레크 리알린의 망명이었다. - P70

소련은 풋 작전으로 완전히 기습을 당한 꼴이었다. 제1주요부도 소스라치게 놀랐다.  - P70

어느 날 밤 올레크는 「BBC 월드 서비스」 방송을 몰래 듣다가, 풋작전의 여파로 덴마크가 그의 옛 동료 세 명, 즉 외교관 신분으로 위장한 KGB 요원들을 추방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음 날 오전 그는 덴마크과에서 일하는 친구에게 이 소식을 언급했다. 5분 뒤 그의 전화기가 울리더니, 수화기 속에서 귀가 멀 것 같은 호통이 쏟아져 나왔다. 「고르디옙스키 동무, 덴마크에서 추방이 있었다는 헛소문을 계속 KGB 내부에 퍼뜨리며 돌아다닌다면 처벌이 있을 것이오!」 야쿠신의 목소리였다. - P71

(전략).
이렇게 지지부진한 상태에서, 올레크를 KGB로 이끈 형 바실리 고르디옙스키가 갑자기 죽는 바람에 올레크의 승진이 빨라졌다.
바실리는 오래전부터 술을 심하게 마시는 편이었다. 동남아시아에 갔을 때 간염에 걸려 의사에게서 두 번 다시 술은 한 방울도 마시지 말라는 말을 들었으나, 그는 계속 술을 마셨고 서른아홉이라는나이로 죽음에 이르고 말았다. KGB는 그에게 완전한 군인 장례식을 치러 주었다. - P72

 소련은 덴마크에 비자를 신청하면서, 고르디옙스키가 소련 대사관 2등 서기관으로 코펜하겐에 다시 갈 것이라고 알렸다. 하지만 그의 실제 직책은 과거 미하일 류비모프가 맡고 있던자리, 즉 KGB 제1주요부의 정치 정보 담당관이었다.
올레크가 KGB 요원이라는 의심을 받고 있었으므로, 덴마크가 비자를 발급해 주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올레크의 귀환을 허락한 뒤 면밀히 지켜봐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런던에도 이사실을 알렸다. - P73

참조

미하일 류비모프의 회고록은 『불한당 레지덴트의 기록Notes of a Ne‘er-Do-WellRezident (1995)과 『내가 사랑하고 싫어한 스파이들Spies I love and Hate」(1997)에 수록되어 있다. 바실리 고르디옙스키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한 활동에 대해서는크리스토퍼 M. 앤드루와 바실리 미트로킨이 쓴 『미트로킨 아카이브 The MitrokhinArchive (1999)를 참고하라. - P73

3
선빔


덴마크 코펜하겐의 MI6 지부장인 리처드 브롬헤드는 자신의 정체가 알려지는 것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 P75

키가 크고, 미남이고, 옷차림 또한 흠잡을 데가 없고, 언제나 농담을 던지며 술 한 잔을 나눌 준비가 되어 있는 브롬헤드는 코펜하겐 외교관들의 파티에서 금방 친숙한 인물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은밀한 임무를 <해찰>이라고 표현했다.
리처드 브롬헤드는 실제보다 훨씬 더 멍청하게 보이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는 영국인 중 하나였다. 사실 그는 대단한 첩보원이었다. - P76

브롬헤드가 <골리기 작전>이라고 명명한 이 일에 브룬은 휘하의 가장 유능한 부하 직원인 옌스 에릭센과 빈터 클라우센을 배치했다. <옌스는 키가 작지만 콧수염을 길게 길렀고, 빈터는 덩치가 대략 커다란 문과 맞먹을 만큼 거대했다. 나는 그 둘을아스테릭스와 오벨릭스³라고 불렀다. 우리는 무서울 정도로 죽이잘 맞았다.> - P77

그들이 고른 사냥감 중에 KGB 요원이라는 사실이 이미 알려진브라초프가 있었다. 클라우센은 그를 미행하다가 그가 코펜하겐의특정한 백화점에 들어가기만 하면 장내 방송 시스템을 이용해서 이렇게 말했다. 「KGB사의 브라초프 씨는 지금 안내 데스크로 와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일이 세 번 반복된 뒤, KGB는 브라초프를 모스크바로 돌려보냈다. - P77

올레크의 비자가 발급되었다. MI6는 브롬헤드에게 새로 발령받은 이 사람에게 접근해 가까이 지내다가 적절한 때가 오면 의사를타진해 보라는 지시를 내렸다. PET는 상황을 계속 알려 달라면서도, 덴마크에서 MI6가 이 일을 맡아야 한다는 데에 동의했다. - P78

정치 정보 담당관은 불법 스파이와는 상관이 없고, 적극적인 비밀정보 수집과 서방 사회를 뒤엎으려는 시도가 주요 임무였다. 이말은 현실적으로 첩자, 접촉자, 정보원을 물색하고 포섭해서 관리하는 일을 뜻했다. - P78

 다른 서방 국가의 국민들과 마찬가지로 덴마크 국민 중에도 소련의 지시를 기꺼이 따를 만큼 헌신적인 공산주의자는 몇 명 되지 않았다. 그 외에는 돈을 받고기꺼이 정보를 넘기는 사람(돈은 첩보 세계의 윤활유다), 또는 돈이 아닌 다른 방식의 설득이나 강압이나 유도에 취약한 사람이 있을 뿐이었다.  - P78

올레크는 덴마크 생활과 문화에 쉽사리 다시 섞여 들어갔다. 미하일 류비모프는 모스크바로 돌아가 영국-스칸디나비아과의 고위직을 맡았고, 올레크는 그의 후임이었다. 그가 새로이 맡게 된 이 첩보 활동에는 짜릿한 재미가 있었지만 좌절도 있었다 - P79

그러나 예외도 있었다. 그중 한 명인 게르트 페테르센은 덴마크사회주의 인민당의 지도자였으며, 나중에는 유럽 의회 의원이 되었다. KGB가 제우스라는 암호명을 부여하고 <비밀 접촉자>로 분류한페테르센은 덴마크 외교 정책 위원회에서 뽑아 온 군사 기밀을 소련에 넘겼다. 그는 아는 것이 많고 주량도 아주 셌다.  - P79

직업적인 면에서 올레크는 KGB의 사다리를 타고 매끈하게 위로올라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내면은 말이 아니었다. 모스크바에서 2년을 보내면서 공산정권에 대해 느끼는 거리감이 더욱 심해졌고, 덴마크로 돌아온 뒤에는 소련의 속물근성, 부패, 위선에 대한 절망이 깊어졌다. - P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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