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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프링필드의 마르크스주의자
제임스 M. 윌리스
E. B. 화이트가 경고하기를, "유머는 개구리처럼 해부할 수 있지만 그 과정에서 뭔가를 죽이게 된다. 순수하게 과학적으로 사고하는 인간만이 그 내장을 보고 낙심하지 않을 것"¹이라고 했다. - P335
16_스프링필드의 마르크스주의자
1 E. B. White, "Some Remarks on Humor." In The Second Tree from theCorner (New York: Harper, 1954), p. 174. - P435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좋은 농담을 즐길 줄 모르는 건 아니다. 마르크스 자신도 코미디-그중에서도 『트리스트럼 샌디』 스타일의 소설-를 쓰려고 시도한 적이 있다. - P335
사려 깊은 웃음
이 쇼는 뭔가를 웃기게 만드는 가장 근본적인 개념 중 하나를 정의하는 용도로 코미디 세미나에서 활용될 수 있다. 바로 부조화incongruity다. - P337
물론 이 코미디는 예술의 ‘비현실성‘에 의존한다. - P338
전복은 인식이 있은 연후에만 가능하며, 부조화에 기반한 모든 코미디가 그러하듯 «심슨 가족» 또한 적어도 우리가 세상을 보는 일반적인 방식을 재고해볼 것을 요구한다. ‘정상적인‘ 세계관에서 아버지는 이타적이어야 하고, 충실한 가장은 어떤대가를 치르고라도 가족을 보호하는 데 헌신해야 한다. - P338
(전략). 이 대목의 유머가 관습적 행동과 태도에 대한 우리 인식에 의존하긴 하지만, 그것이 또 다른 차원에서도 웃기는 건 그 ‘관습적 사고와 행동의 어떤 결함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희생양 만들기와 고정관념 씌우기, 추상적인 정치적 관점이 개개인에게 여파를 초래한다는 사실의 망각, 사적인 삶과 공적인 삶의 모순을 보지 못하는 것, 호머는 이 모돈 항목에서 유죄다. - P339
풍자는 이를테면 슬랩스틱보다 한층 더 지적인 차원에서 작동하기때문에 시청자들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시청자들은 첫째로 지금무엇이 조롱의 대상인지를 이해해야 하고, 둘째로 이상적인 세계가 어떤 모습을 띠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 P340
그러므로 코미디 전통에서 «심슨 가족처럼 전복적인 코미디는 현대사회 특유의 위선, 가식, 과도한 상업주의, 불필요한 폭력 등을 폭로하고 그 너머에 좀더 나은 게 있음을 제시하고자 할 것이며 또 명백히 그러고 있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심슨 가족» 같은 풍자 코미디는 자본주의 미국의 지배 이데올로기로부터 우리를 잠시 떼어놓는다고 주장할 수 있다. - P341
마이클 라이언의 정의에 따르면, 이데올로기라는 용어는 "한 사회가 그 사회를 구조화하는 전제들을 자동으로 재생산하기 위해 주입하는 믿음, 태도, 감정적 습관을 기술한다. 직접적 강압이 없이도 사회 권력을 보존하는 것이 이데올로기다"⁴ - P341
4 Michael Ryan, "Political Criticism," Contemporary Literary Theory, eds. Douglas Atkins and Laurie Morrow (Amherst: University of Massachusetts Press, 1989), p. 203. - P436
한편 마르크스주의자가 볼 때 (지성, 인식, 거리 두기를 요구하는) 웃음은 주로 관객이 사회를 구조화하는 전제들을 자동으로 재생산하고 ‘사회 권력을 보존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의 주입에 저항하게끔 돕는다. 서로 경쟁하고 이를테면 외모로 개개인의 가치를 평가하는 습관은 자본주의 가치 체계에 깊이배어 있으며 이는 사람에 대한 고정관념으로 이어진다. - P342
거만하게 위에서 아래로
자본주의 가치에 기반한 사회에서 정치·사회 풍자는 정의상 언제나 그 사회의 가치에 의문을 제기하므로, 마르크스주의자라면 에버그린 테라스*가 내 집처럼 편안해야 마땅할 것이다. 하지만 명백히 그렇지 않다. 사실, 대중의 머릿속에서 마르크스주의가 공산주의와 동의어라면 (이 둘을 연관시킬 이유는 충분하다) «심슨 가족》의 많은 팬은 마르크스주의자가 스프링필드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 것이다.
* 심슨에 집 주소 - P344
분위기를 깨는 카를 마르크스는 스프링필드에서 환영받지 못할 테지만, 희극 배우 그루초 막스는 몇몇 에피소드에 아빠와 캠핑을>에서 히버트 박사 주위에 몰려든 구경꾼 중 한 명으로) 직접 등장하거나하고 많은 에피소드 중에서도 하필이면!-<엄마의 새 옷>*에서 인용구로 등장한다.
* 원제는 <스프링필드 계급투쟁의 장면들scenes From the Class Struggle in Springfield>이다. - P346
하지만 마르크스주의자인 시청자가 보기에 <엄마의 새 옷>의 마지막장면에는 불편한 구석이 있다. 비록 상류 계급을 제대로 풍자하긴 하지만, 이 에피소드는 심슨 가족이 자신들의 자리로 돌아와서 크러스티 버거 가게라는 좀더 익숙한 환경에 모여 앉아 있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 P347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작가들의 태도 때문에, 아마도 계급투쟁이라는 개념 전체는 조롱의 대상이 된다. 어쨌든 주로 리사가 자본주의의 파괴적 경향에 가끔씩 잽을 날리긴 해도, 마지가 크러스티 버거 같은 쓰레기장에서 ‘편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마지 자신의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때문이다. 그는 혁명적 순간에 근접하지만, 결국 현상황을 묵묵히 조건부수용하는 쪽으로 물러나고 만다. - P349
엥겔스 자신은 오늘날 자주 인용되는 한 젊은 작가에게 보낸 편지에서 작가가 "자신이 서술하는 사회 갈등에 대한 미래의 역사적 해결책을 접시에 담아 독자 앞에 대령할 필요는 없다"⁵고 지적한 바 있다. 이런 일은 일부분 독자-아니, 이 경우에는 시청자-스스로 할 수 있다. 하지만 «심슨 가족》의 작가들은 심슨 가족에 대한 공감은 물론 어려움을 겪거나 견디는 어떤 이들에 대한 공감도 사지 않으려고 일부러 노력한 듯 보인다. - P349
5 Frederick Engels, Letter to Minna Kautsky. In Marx and Engels onLiterature and Art (Moscow: Progress Publishers, 1976), p. 88(한국어판은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지음, 김대웅 옮김, 마르크스 엥겔스 문학예술론 미다스북스,2015, 엥겔스, 민나 카우츠키에게 보낸 편지에서(1885.11.26)」). - P436
노동자에 대한 묘사를 예로 들어보자. 리사의 논평은 제쳐두고라도 우리는 작가진이 골프 치는 무리를 풍자했으니 노동자 편을 들거라고 기대할 수 있다. 전자의 집단에 대한 무시를 감안할 때 비합리적인 가정은 아니다. 하지만 «심슨 가족》에서 이런 공감이나 감정이입은 확대되지 않는다. - P350
노동자 파업을 다룬 또 다른 에피스트에서, 교사들은 "A는 애플 Apple, B는 임금 인상Rain" "내놔, 내놔Gimme Gimme Gimme"라고 쓴 팻말을 들고 있다. 《스프링필드 모터쇼》의 테마는 "미국의 노동자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 이제 61퍼센트과 마약을 하지 않습니다!" 다수의 캐릭터가 그들의 직업으로 규정되고 식별되는데, (신속히 처치된) 프랭크 그라임스를 제외하면 그 대부분이 서투르거나, 낙오했거나, 무능하거나, 사기꾼이거나, 게으르거나, 알랑대거나, 못 배웠거나, 비윤리적이거나, 범죄자거나, 아니면 (물론그 명백한 본보기인 호머 심슨처럼) 그냥 우둔하다. - P350
슈퍼볼 광고를 패러디한 장면이 가톨릭교회의 노여움을 사자, 이 쇼의 제작책임자는 재방송 때 핵심 대사한 줄을 수정했다. 이러한 수정 압력은 심지어 전복적이라고 하는 쇼에조차 기업의 통제가 미치고 있음을 암시하기도 하지만, 세상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비전이 부재한 풍자에서는 리비전(수정) 또한 쉽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가리키기도 한다. - P351
리사와 알바니아인 교환학생 사이에 싸움이 붙었을 때, 호머는 시리즈 전체를 통틀어 가장 인상적인 대사 중 한 구절을 내뱉는다.
애들아 싸우지들 마라, 미국이 기회의 땅이라는 리사의 말도 어찌면 맞고 자본주의라는 기계가 노동자의 피를 기름칠해서 돌아간다는 아딜의말도 어쩌면 일리가 있을 거야. <교환학생 바트>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가 된다. 호머가 하는 말을 전부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아니면 재치 있는 대사로 가득 찬 이 쇼에서 또 하나의 재치 있는 대사에 불과한 것일까? 호머의 통찰은 그가 내뱉은 다른 말들과 같은 무게를 띠는 것일까? - P352
갈수록 문제
«심슨 가족》이-전통적인 풍자와 달리 - 더 나은 세상의 개념을 암시하지는 않지만, 어쩌면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밀레니엄 전환기 미국의 삶을 정확히 반영한다고 볼 수도 있다.
실제로 포스트모던 텔레비전의 절정으로서, 문학적 언급, 문화적인유, 자기반영적 패러디, 속사포 같은 유머, 부조리하게 아이러니한 상황을 섞어 끓인 이 잡탕찌개는 파편화되고 해체되고 모순된 자본주의 세계의 완벽한 묘사이자 필연적인 결과다. - P354
죄르지 루카치 같은 일부 마르스크의 비평가들과 어쩌면 마르크스와 엥겔스 자신은 《심슨 가족》의 캐릭터들이 현실적 존재의 추상적 의인화에 지나지 않는다며 그 비현실적 성격을 들어 이 쇼를 거부할지도 모르지만, 이 쇼가 인간의 개별적 자질을 인간의 효용 가치보다 덜 중요시하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좀더 정확히 묘사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 P355
<심슨 가족>이 대중에게 인기 있고 보수적인 비평가들이 이 쇼를용인한다는 것은, 우리가 현대 미국의 이데올로기에 얼마나 만족하고있는지를 입증한다. 몬티 번스가 말하듯이.
이봐, 스필버고, [오스카어] 신들러하고 나는 쌍둥이같이 닮았다고 둘 다 공장주인 데다, 둘 다 나치를 위해 포탄을 제조했지. 하지만 내 포탄은 작동했다고, 젠장! <스프링필드 영화제>
여기서 우리가 웃는 이유는, 번스 자신이 스스로 무엇을 인정하고있는지에 무지하다는 데 경악하기 때문일 것이다. - P357
<심슨 가족>은 웃긴다. 이 쇼는 우리에게 기대를 심어주었다가 꺾어버리며, 우리를 데리고 직진으로 폭주하다가 아무 경고 없이 오른쪽으로 (혹은 왼쪽으로) 급회전하여 우리의 의표를 찌른다. 이 쇼는 도전하고, 도발하고, 우리의 경계와 주의를 집중시키고, 기성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고, 많은 부르주아 가치의 공허함을 폭로하곤 한다. - P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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