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장은 안경에 묻은 물방울을 닦으며 말했다. "자네는 학파 사람 같지 않은데." "학파 사람이 아닙니다." "그럼 뭐지?" 하지만 나는 대답할 길이 없었다. "이름은?" "네모입니다." "그건 이름이라고 할 수 없는데." 도서관장은 약간 기분이 상한 듯했다. - P332
솔직히 말했건만 도서관장은 내가 얼버무렸다고 생각한 것같았다. "바깥에서 오는 건 불길한 인간들뿐이야." "저는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건 마왕이 정해." - P333
울창하게 자란 나무들 꼭대기를 헤치며 지나는가 싶더니 우리는 번쩍번쩍 빛나는 바다 위를 활주하듯 이동하고 있었다. 포대 섬은 순식간에 뒤로 멀어져 갔다. 앞쪽 바다를 보니 로프웨이의 지주가 되는 철골이 점점이 서 있었다. 하지만 보이는것이라곤 그것뿐, 움직이는 것은 철탑에서 무리 지어 날개를쉬는 바닷새 정도였다. 어느 순간 작은 섬이 눈앞에 나타났다. 마치 하늘에서 그림물감 한 방울이 떨어진 느낌이었다. - P334
한 번 보이고 나니 어째서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섬들은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섬이 있군요!" 나는 경탄했다. "물론 있어요. 당연하잖아요." 마왕의 딸은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 P334
"저는 제가 누군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렇게 기가 죽어 있나요?" 마왕의 딸은 바람에 나부끼는 머리를 붙들며 웃었다. "우리도 별로 다르지 않은데요." "당신들은 다르죠." - P335
나무들이 사라지고 시야가 트이자 마왕의 저택이 눈 아래나타났다. 로프웨이에서 보이지 않았던 것은 섬 반대편 비탈에 있기 때문이었다. 콘크리트 2층 건물 앞마당의 종려나무가 그림자를 드리우고 주위는 고요했다.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순간, 사야마 쇼이치를 따라 학파 관측소를 찾아갔을 때의 느낌이 되살아났다. 지붕까지 이어지는 휑뎅그렁한 현관홀, 무기질적인 콘크리트 벽, 서늘한 냉방 저택 내에 감도는 비현실감은 관측소와 매우 비슷했다. "아버지는 서재에 계세요." 그녀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가리켰다. "여기서부터는 당신 혼자 가요. 계단을 올라가서 왼쪽 방이에요." - P337
나는 서재를 가로질러 창으로 다가갔다. 저물어 가는 태양에 물든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그때 바다 저편을 미끄러지듯 달려가는 열차가 보였다. 관측소 섬에 표류한 날 동틀녘의 바다를 달려간 그 열차였다. 나는 얼마 동안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문득 뒤에서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열차에 마음이 끌리는 모양이군." 나는 흠칫 놀라 돌아봤다. 하지만 실내에는 역시 아무도 없었다. - P338
"모습을 보여주시지 않을 겁니까?" "보려고 하지 않으면 보여도 보이지 않지." 나는 서안 앞을 벗어나 페르시아 양탄자 위에 앉았다. 그리고 눈앞의 공간을 응시했다. 서안 너머 유리창으로 바다와 하늘이 보였다. 보려고 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 하고 자신에게 일렀다. 다음 순간 서안을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 앉아 있는 사람이 보였다. - P339
"제가 누군지 아십니까?" "물론 알지." "그럼 ・・・・・・ " "나한테 알아내려고 해봤자 소용없어. 기대에 부응해 주지못해서 미안하네만 말이지. 물론 자네 심정은 이해해. 자네한테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이 바다에서 자네는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거든. 학파의 무법자들과 마찬가지로 멋대로 내 영토에 침입해 왔어. 딸을 도와준 것은 고맙지만 따져보면 자네가 스스로 초래한 사태야. 특별 취급할 이유가 못되네." - P340
마왕은 자상하게 미소 지으며 이야기를 들었다. 서안에 놓인 카드 상자가 신경 쓰였다. 내가 이야기하는 동안 마왕은 나무 상자 뚜껑을 열고 안에서 카드를 꺼내 훑어보았다. 대체 뭘 하는 걸까. - P341
(전략).
마왕은 눈을 들어 나를 쳐다봤다. "......재미있군." 그 순간 나는 가짜 이야기를 계속할 수 없게 됐다. 목이 바싹말라붙어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나를 쳐다보는 마왕의 눈은 창밖에 펼쳐지는 하늘과 바다처럼 텅 비어 있었다. 얼마 동안죽음과도 같은 침묵이 흘렀다. "너와 관계없는 일을 이야기하지 말라." - P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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