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1985년 5월 18일

KGB의 방첩 담당 부서 K부에서 이것은 일상적인 도청 작업이었다. - P15

한 시간 뒤 그들의 작업이 끝났을 때 이 아파트의 거의 모든 구석에 KGB의 눈과 귀가 심겨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얼굴에 마스크를 쓰고, 옷장 안의 옷과 신발에 방사성 가루를 뿌렸다. 방사능 피해를 주지는 않지만, KGB가 방사능 탐지기를 사용하면 착용자의움직임을 추적할 수 있는 농도의 방사성 가루였다.  - P15

몇 시간 뒤 러시아의 고위급 정보 요원 고르디옙스키가 런던에서 출발한 아에로플로트 항공기를 타고 모스크바의 셰레메티예보 공항에 착륙했다.
KGB의 올레크 안토니예비치 고르디옙스키 대령은 한창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 P16

단단한 운동선수 같은 몸집의 고르디옙스키는 북적거리는 공항에서 자신 있게 성큼성큼 걸었다. 그러나 마음속에서는 미약한 두려움이 부글거렸다. KGB 베테랑이며 소련의 충실한 비밀 요원인올레크 고르디옙스키가 사실은 영국의 스파이였기 때문이다.
10여 년 전 영국의 해외 정보국인 MI6에 포섭된, 녹턴이라는 암호명의 정보원은 역사상 가장 가치 있는 첩자 중 한 명임을 스스로 증명했다. - P16

 로널드 레이건과 마거릿 대처도 이 소련 첩자가 준 엄청난 정보에 대해 브리핑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진짜 정체에 대해서는 두 지도자 모두 알지못했다. 심지어 고르디옙스키의 젊은 아내도 남편의 이중생활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 P16

고르디옙스키가 KGB의 레지덴트(레지덴투라라고 불리던 KGB해외 지부의 지부장을 지칭하는 러시아어)로 임명되자, 그에 관한 정보를 아는 소수의 MI6 요원은 몹시 기뻐했다. 영국에서 활동하는소련의 최고위급 정보 요원이 된 고르디옙스키가 소련 첩보망의 가장내밀한 기밀에 접근해 KGB의 계획에 대해 미리 서방에 알려 줄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 P17

런던의 안가(家)에서 급히 소집된 회의에서 MI6의 담당관들은 고르디옙스키에게 가족과 함께 망명해 영국에 남는 방법을 제안했다. 그 회의의 참석자들은 모두 이번 일에 무엇이 걸려 있는지 알고 있었다. - P17

M16 요원들은 고르디옙스키의 비상 탈출 계획을 다시 점검했다.
핌리코라는 암호명의 이 계획은 7년 전 영원히 실행할 일이 없기를바라며 작성된 것이었다. MI6는 그때까지 소련에서 누군가를 탈출시킨 적이 없었다. 하물며 KGB 관리는 말할 것도 없었다. 정교하고위험한 탈출 계획은 어디까지나 최후의 수단일 뿐이었다. - P17

 공항은 감시 때문에 항상 분위기가 딱딱했는데, 그날은 할 일 없이 빈둥거리며 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 평범한 사람들이 평소보다 훨씬 더 많았다. 고르디옙스키는 만약 KGB가 사실을 알고 있다면 자신이 소련땅에 발을 디딘 순간 체포되어 이미 KGB 감방으로 끌려가고 있을것이라고 속으로 되뇌면서 택시에 올랐다. - P18

(전략). 그런데 문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세 번째 잠금장치, 이 아파트 건물이 처음 지어질 때 설치된 것으로 열쇠를 넣어 돌리게되어 있는 구식 잠금장치가 잠겨 있기 때문이었다.
고르디옙스키는 이 세 번째 잠금장치를 단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었다. 사실 처음부터 그 잠금장치의 열쇠도 갖고 있지 않았다. - P18

누군가가 그의 정체를 알렸다. KGB가 그를 감시 중이었다. 동료 스파이들이 그를 염탐하고 있었다. - P19

1

KGB

올레크 고르디옙스키의 인생은 KGB 그 자체였다. KGB가 그를 형성하고, 사랑하고, 비틀고, 망가뜨리고, 나중에는 거의 죽일 뻔했다. 소련의 첩보 기관 KGB는 그의 심장과 혈관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 P23

KGB (<국가 보안 위원회>를 뜻하는 Komitet GosudarstvennoyBezopasnosti의 머리글자를 딴 이름)는 지금껏 만들어진 모든 정보기관 중에서 가장 복잡하고 가장 광범위한 곳이었다. 스탈린이 만든 첩보망의 직속 후계자인 KGB에는 국외와 국내 정보 수집, 국내 보안 강화, 국가경찰의 역할이 모두 결합하여 있었다. - P23

서방 세계의 눈에 KGB라는 머리글자는 공포 정치와 대외 공격및 체제 전복의 다른 이름이었으며, 얼굴 없는 관료 마피아가 경영하는 전체주의 정권의 모든 만행을 짧게 줄여서 부르는 말이었다.
그러나 KGB의 엄격한 통치하에 사는 사람들의 시각은 달랐다. 그들이 공포 속에 복종한 것은 사실이지만, 서구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공격을 막아내는 보루, 공산주의를 수호하는 친위대로 KGB를 우러러보는 마음도 있었다. 이 특권 엘리트 집단에 속한 사람들은 자부심을 느끼며 경탄의 대상이 되었다. - P24

이 기관에서 한번 일을시작한 사람은 평생 그 일을 놓지 않았다. <전직 KGB 사람이라는것은 존재하지 않는다.>¹ 전직 KGB 요원인 블라디미르 푸틴의 말이다.

1 블라디미르 푸틴이 FSB에서 한 연설. Anna Nemtsova, "A Chill in the Moscow Air."
뉴스위크2006년 2월 5일 자에서 재인용. - P24

그의 아들은 나중에 이렇게 썼다. 아버지고르디옙스키는 신념 때문에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범죄에 가담해야 할 때도 결코 흔들림 없이 당에 헌신했다. 1932년에 그는 카자흐스탄의 <소비에트화>에 참여해, 소련 군대와 시민을 먹일 음식을 농민들에게서 징발하는 작전을 기획했다. 그 결과 발생한 기근으로 약 150만 명이 죽었다. 안톤은 국가가 초래한 기아를 바로 코앞에서 직접 보았다. 그리고 그 해에 국가 보안을 맡은 기관에 들어갔다. - P25

혁명이 내부의 치명적인 위협과 맞닥뜨렸다는 스탈린 동지의 발표가 나오자 안톤 고르디옙스키는 반역자들을 솎아내는 데 일조하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1936년부터 1938년까지 시행된 대숙청은<국가의 적>을 대대적으로 일소하는 작업이었다. - P25

<첩자 한 명을 놓치느니 무고한 사람 열 명이 고통받는 편이 낫다.>NKVD의 니콜라이 예조프 위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 P25

NKVD도 내부 직원들을 조사해서 숙청하기 시작했다. 한창 피가 낭자하게 흐르던 무렵에는 고르디옙스키 일가가 살던 아파트 단지가 6개월 동안 열두 번도 넘는 불시 단속을 당했다. 체포는 밤에 이루어졌다. 가장이 가장 먼저 끌려가고, 나머지 가족들은 그다음에 끌려가는 식이었다.
이때 국가의 적 중 일부를 적발한 사람이 바로 안톤 고르디옙스키였을 가능성이 있다. <NKVD는 언제나 옳다>는 그의 말은 전적으로 분별 있는 말이자 완전히 틀린 결론이었다. - P26

올레크 고르디옙스키는 가족들이 서로를 사랑하고 관계가 돈독하지만 겉과 속이 다른 가정에서 자랐다. - P28

집안의 어른 중 누구도 진정한 내심을 드러내지 않았다. 서로에게도, 다른 사람들에게도 숨 막히는 획일주의가 지배하던 스탈린 치하의 소련에서도 속으로 몰래 다른 생각을 품는 것은 가능했지만, 가족에게조차 솔직한 생각을 털어놓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일이었다. - P28

 어느 날 그는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옹호하는 순진한 연설문을 썼다. 그리고 그것을 어학실에서 녹음해 동료 학생들 몇 명에게 들려주었다. 그들은 기겁했다. 「이거 당장 없애 버려.
올레크 두 번 다시 입에 담지도 말고」 덜컥 겁이 난 올레크는 혹시 학생 중 누가 자신의 <급진적>인 견해에 대해 당국에 알리지 않았을지 걱정스러웠다. 학교 안에도 KGB의 첩자들이 있었다. - P29

국제 관계 대학교는 소련 최고의 엘리트 대학으로, 헨리 키신저에게 <소련의 하버드>³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외무부가 운영하는 이 대학은 외교관, 과학자, 경제학자, 정치가, 그리고 스파이를 길러 내는 최고의 훈련 기관이었다. 올레크는 역사, 지리, 경제, 국제 관계를 공부했으나, 모든 학문은 공산주의 이념이라는 프리즘을 통과하며 왜곡된 형태로 전달되었다.

3 Tatiana Smorodinskaya, Karen Evans-Romaine, Helena Goscilo (eds.), Encyclopediaof Contemporary Russian Culture (Abingdon: Routledge, 2007)에서 재인용 - P30

대학 도서관에는 해외 신문과 정기 간행물 몇 종이 들어와 있었다. 비록 심하게 편집된 상태였어도, 세상을 언뜻 들여다볼 수는 있었다. 올레크는 조심스레 이것들을 읽기 시작했다. 서구에 대해 노골적으로 관심을 보이는 것만으로도 의심받을 수 있었다. 가끔은밤에 「BBC 월드 서비스」나 「미국의 소리」 방송을 몰래 듣기도 했다. - P30

구가 친해진 학생 중에 대학 육상 팀 소속으로 역시 달리기를 즐기는 스타디슬라프 카플란이 있었다.
(중략).
 두 청년은 서로의 포부가 충돌하지 않고 생각도 비슷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자유주의 사상을 갖고 있었고, 공산주의에 대해 대단히 회의적이었다.> 올레크는 카플란이 솔직하게털어놓는 의견에 짜릿한 흥분과 미약한 경계심을 느꼈다.  - P32

스탄다 못지않게 중요한 영향을 미친 사람은 올레크가 우상처럼 숭배하던 형 바실리였다. 바실리는 당시 전 세계에 깊고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소련의 비밀 요원, 즉 <불법 스파이>가 되기 위한 훈련을 받고 있었다. - P32

첫 번째 종류는 소련 외교관이나 영사관 직원, 문화 담당관이나 무관, 공인된 언론인이나 무역 대표 등 공식적인 위장 신분을 갖고 활동했다. 외교적인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이 <합법적>인 스파이들이 설사 발각되더라도 간첩 혐의로 기소될 위험이 없다는뜻이었다. 그들은 해당 국가에서 외교상 기피 인물 판정을 받고 추방될 뿐이었다. - P32

 반면 <불법> 스파이 (러시아어로 넬레갈)에게는 공식적인 지위가 전혀 없었다. 대개 그들은 가명으로 만든 가짜 여권으로 돌아다녔으며, 어떤 나라에 배치되든 눈에 띄지 않게 섞여 들어갔다(서구에서 이런 스파이들은 공식적인 위장 신분이 없다는 뜻의 non-official cover 를 줄여 NOC라고 불린다). KGB가 전 세계에심어 놓은 불법 스파이들은 평범한 시민 행세를 하며 신분을 숨기고 파괴적인 활동을 했다. - P33

 그들은 공식적인 레이더에 잡히지 않는 곳에서 활동했으므로, 흔적이 남는 방식으로 자금을 지원받을 수도 없고 외교관의 보안 채널로 통신을주고받을 수도 없었다. 따라서 대사관에서 신분을 인정받은 스파이들과 달리, 그들은 방첩 수사관들이 추적할 수 있는 흔적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모든 소련 대사관에는 상설 KGB 지부, 즉 레지덴투라가 있고, 다양한 공식 신분을 지닌 KGB 요원들이 레지덴트(MI6CIA의 표현으로는 지부장)의 지휘를 받아 움직였다. - P33

KGB는 국제 관계 대학교 내에도 사무실을 두었다. 여기 소속된 요원 두 명은 자질이 보이는 학생들을 찾는 역할을 했다. - P34

올레크는 대학 시절이 끝나갈 무렵 6개월 동안 현장을 경험할 수있게 동베를린으로 파견되었다. 소련 대사관의 통역관 직책이었다.
첫 해외여행을 앞두고 신이 난 올레크는 동독에 대한 브리핑을 받으러 S부로 오라는 부름을 받았을 때 흥분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 P34

하루아침에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는 것을 보고 충격받았어도, 올레크는 KGB의 지시를 충실하게 수행했다. 당국을 두려워하는 것은 본능이고, 복종은 각인된 습관이었다. - P35

그해 크리스마스에 그는 라이프치히에서 가짜 신분으로 살고 있는 바실리와 합류했다. 베를린 장벽이 건설되는 광경을 보고 경악했다는 이야기는 바실리에게 하지 않았다. 그의 형 바실리는 이미 KGB의 정식 요원이었으므로, 그렇게 이념적으로 흔들렸다는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았다. - P36

모스크바로 돌아온 그에게 1962년 7월 31일부터 KGB로 출근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그는 이데올로기에 이미 의문을 품기 시작했으면서 왜 그 이데올로기를 집행하는 기관에 들어갔을까? KGB일은 해외여행의 가능성을 약속한다는 점에서 매력적이었다. - P37

민간인으로 보내는 마지막 여름에 올레크는 스탄다 카플란과 함께 흑해 해안에서 열린 학교의 방학 캠프에 참가했다. 카플란은 한달 더 대학에 남아 있다가 고국으로 돌아가 체코슬로바키아의 막강한정보국인 SB에 들어가기로 마음을 정한 상태였다. 두 친구는 곧 소련 블록을 위한 첩보 활동에서 동맹이자 동료가 될 예정이었다. - P38

KGB의 <붉은 깃발> 엘리트 훈련 아카데미는 모스크바에서 북쪽으로 80킬로미터 떨어진 숲속 깊은 곳에 위치했으며, 101 학교라는 암호명으로 불렸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서 당이 죄수가 가장 두려워하는 대상에 죄수를 노출시켜 저항 의지를 꺾어 버리는지하 고문실 101호를 무의식적으로 연상시키는 얄궂은 이름이었다. - P39

<감시를 의식하는 것이 눈에 보인다면 훈련된 첩보원임이 드러날 수 있다. <첩보요원은 의심을 살 만한 행동을 하면 안 된다.> KGB 교관들은 분명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어떤 외국인이 대놓고 미행을 걱정한다는 사실을 감시 기관이 눈치챈다면, 한층 더 비밀리에 더 집요하게, 더 독창성을 발휘해서 작업하게 될 것이다.>⁴

4 Leonid Shebarshin, "Inside the KGB‘s Intelligence School," Espionage History - P39

감시 없이, 또는 심지어 감시받는 중에도 정보원과 접선할 수 있는 능력이 모든 비밀 작전의 핵심이다. 서방의 첩보 용어로, 정체를감춘 채 활동하는 요원은 <블랙>으로 불린다. KGB 훈련생들은 정확한 장소에서 특정 인물과 만나는 시험, 정보를 특정 장소에 놓아두거나 가져오는 시험, 미행 여부와 방식을 알아내는 시험, 겉으로드러나지 않게 미행을 따돌리는 시험, 깨끗하게 드라이클리닝을 완수하고 지정된 장소까지 오는 시험을 연달아 치렀다. - P40

그는 <신호 장소>를 설정하는 법, 즉 공공장소에 비밀 신호를 남겨 놓는 법을 배웠다. 예를 들어 가로등 기둥에 분필로 그려 놓은 표시가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겠지만, 스파이에게는 특정한 시각에 특정한 장소에서 만나자는 뜻이 될 수 있었다. - P40

올레크는 자신의 첫 첩보명을 선택했다. 소련과 서구의 정보기관들은 가명을 선택할 때 같은 원칙을 사용했다. 본명과 같은 머리글자의 흡사한 이름이어야 한다는 것. 그래야 누가 스파이를 본명으로 부르더라도, 그의 첩보명만 아는 사람들이 잘못 들었나 보다 하고 넘어갈 수 있었다. 올레크 고르디옙스키는 <구아르디예체프>라는 이름을 골랐다. - P41

모든 정보기관에 공통적인 모험심 덕분에 선택된 사람들이었다.
<우리가 KGB를 직장으로 선택한 것은 그곳에서 하게 될 활동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다.> 비밀은 강력한 유대를 낳는다.  - P41

바실리 고르디옙스키는 제1주요부의 불법 스파이 부서인 S부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그는 또한 술고래가 되었는데, 일을 마친뒤 대량의 보드카를 마시고도 정신을 잃지 않는 능력을 높이 치는직장이었으므로 그것이 딱히 약점은 아니었다.  - P42

올레크는 형처럼 해외를 돌아다니며 신나는 비밀 활동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가 발령받은 곳은 모스크바의 S부였다. 거기서 그는 불법 스파이들을 위한 서류를 준비하는 일을 맡았다. - P42

올레크는 멋들어진 외국 어딘가에서 비밀 요원으로 일하는 대신 서류나 뒤적이게 되었다. 문서를 작성하는 <노예>나 마찬가지였다. 모든 불법 스파이에게는 그럴듯한 과거를 지닌 가짜 인생, 새로운신분, 위조서류가 필요했다. 그들 각자를 유지하고, 지시를 내리고, 경제적 지원을 해주기 위해서는 신호 장소, 버려진 편지함, 스치는 접선을 복잡하게 구성해야 했다. - P43

S부의 복도에서 올레크는 역사상가장 큰 성공을 거둔 불법 스파이 중 한 명인 코논 트로피모비치 몰로디, 가명 <고든 론즈데일>을 소개받았다. 1943년에 KGB는 죽은캐나다 어린이 고든 아널드 론즈데일의 신원을 훔쳐 몰로디에게 주었다. 북미에서 자란 덕에 흠잡을 데 없는 영어를 구사하는 몰로디/론즈데일은 1954년 런던에 정착해 주크박스와 풍선껌 기계를 파는유쾌한 영업사원 행세를 하면서 사람들을 포섭해 이른바 포틀랜드 스파이망을 만들었다. - P43

CIA 첩자의 첩보로 체포된 몰로디는 간첩 혐의로 유죄 선고를 받았지만, 영국 법원은 재판 때도 그의 본명을 확실히 알지 못했다. 올레크와 처음 만났을 때 몰로디는 모스크바에서 간첩 혐의로 체포된 영국인 회사원과 교환되어 모스크바로 돌아온 직후였다. - P44

그러나 반(半)은퇴 상태인 소련 스파이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은 영국인 킴 필비였다. 1933년에 NKVD에 포섭된 그는 MI6에 근무하면서 KGB에 방대한 양의 정보를 제공하다가 결국 1963년 1월에 소련으로 망명했다. 영국 정부를 깊이 당황하게 만든 사건이었다. - P44

소련 정보기관들은 아주 초창기부터 윤리적인 제약과 상관없이 움직였다. KGB는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할 뿐만 아니라, 정치적 전쟁, 언론 조작, 역정보, 위조, 협박, 납치, 살인을 계획했다. 제13부,
즉 특수 임무부는 파괴 활동과 암살 전문이었다. 소련에서 동성애는 불법이었지만, 외국의 동성애자들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KGB는 동성애자들을 포섭했다. - P45

KGB는 직원들이 국내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멋대로 들여다보았다. 소련에는 사생활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요원들은 반드시 결혼해서 자녀를낳고 결혼 생활을 유지해야 했다. 결혼한 요원은 아내와 가족들이국내에 인질처럼 붙잡혀 있으니 해외 근무 중에 망명할 가능성이낮다는 계산과 통제가 모두 작용한 결과였다. - P4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