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조물의 그림자가 석양처럼 드리워진 미로를 걸어가면서, 우리는 구멍이 나타날 때마다 그 내부를 살피며 들어갈 수 있을지 가늠했다. 어떤 구멍들은 너무 높은 곳에 있었고, 일부는 지붕도 없는 언덕의 성벽에서처럼 폐허가 되어 얼음에 덮여 있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곳에서는 널찍한 구멍이 우리를 부르듯 끝없는 심연을 향해 열려 있기도 했다. - P285
얼마 뒤 창문들이 줄줄이 나타났는데, 5개의 홈이 파인 거대한 원통형 구조물의 불룩 튀어나온 부분에서 창문 너머 잘 보존된 큼지막한 공간이 돌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 P285
그 방은 공회당이나 집회 장소로 보였다. 손전등을 비춰보니 벽을 따라 넓은 수평 띠처럼 전통적인 아라베스크 무늬가 오싹한 모습을 뚜렷이 드러냈다. 좀 더 수월한 건물 출입구를 찾지 못한다면, 그 창문으로들어갈 계획을 세우고 위치를 꼼꼼히 기록해 두었다. - P286
거대한 왼쪽 건물에 잔해가 쌓여 있어서 밟고 올라가기는 수월했지만, 우리는 오랫동안 바라던 기회를 앞에 두고 한동안 망설였다. 태고의 신비 속으로 들어서긴 했지만, 완벽하게 보존된 불가해한 세월의 내부는 우리에게 더욱 끔찍할 것이 분명했으므로 다시 마음을 추슬러야했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 P286
우리가 들어갈 공간이 얼마나 넓을지는 직접 몸으로 부딪쳐봐야 알일이었다.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빙하가 거대한 건물 내부까지완전히 침투하지는 못했으므로, 붕괴되거나 지표면이 갈라진 곳이 아니라면 계속해서 빙하 밑의 다리를 지나 내려갈 수 있을 것 같았다. - P287
(전략). 그러나 빙하가 오랫동안 단계적으로 도시를 몰락에 빠뜨린 것은 아니었다. 눈사태, 강물의 범람, 산맥에 있는 얼음벽의 갑작스런 붕괴 등이 눈앞에 펼쳐진 독특한 상태에 대한 더 유효한 설명이 될 것이다. 그 도시와 관계된 것이라면 어떤 상상력도 설득력이 있었다. - P287
VI
영겁의 죽음을 간직한 원시 석조물의 지하 미로는 벌집이 따로 없었다. 숱한 세월 만에 처음으로 인간의 발소리가 울려 퍼졌던 그 기괴한 소굴을 우리가 어떻게 헤매고 다녔는지 자세히 늘어놓는다면 지루할것이다. 여기저기에 많은 벽화들은 한 번도 세상에 보고된 바 없는 것이기에, 우리가 그곳에 들어간 최초의 인간이라는 사실은 명백하다. - P288
우리가 들어간 곳은 규모가 크고 정교한 건물 중 하나여서, 아득한 태고의 건축 양식에 대해 인상적인 사실들을 알 수 있었다. 내부 구획은 외벽만큼 거대하지 않았지만, 지하 공간은 매우 잘 보존되어 있었다. - P288
보이는 것마다 거대함과 웅장함으로 우리를 압도했다. 윤곽과 차원, 비율과 장식, 불경한 고대 석조물의 구조적인 뉘앙스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서 인간이 아닌 숨결이막연하면서도 깊숙이 스며들어 있었다. 벽화들은 그 기이한 도시의 역사가 수백만 년으로 거슬러 올라감을 알려 주었다. - P289
수평과 수직의 배열에서 예외적인 경우도 있지만, 가장 많이 사용하는 양식은 하나였다. 그러나 가끔씩 아라베스크 띠장식을 따라 점무늬가 박혀있는 매끈한 카르투슈¹¹⁵도 눈에 띄었다. 우리는 곧 그 기법이 모든 면에서 인류의 전통과는 무관하지만, 완숙미가 탁월할 뿐 아니라 미학적으로도 고도로 발전된 문명의 소산임을알 수 있었다. 나는 그 정도의 섬세함을 갖춘 조각품을 본 적이 없었다. 정교한 식물이나 야생 동물의 세밀한 표현은 대담한 조각 기법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정도로 생생했다. 나아가 전통적인 도안에 나타난 기교대차그ㄴ 시ㅇ하 수하 - P289
115) 카르투슈(cartouche): 바로크 건축 양식의 장식 디자인에서 판지의 끝이 말려 올라간 것 같은 모양의 무늬. - P352
아라베스크 장식은 풍화 작용을 겪지 않은 벽면에 깊이는 2.5센티미터에서 5센티미터 정도로 오목새김한 형태였다. 점무늬가 박힌 카르투슈의 경우 알려지지 않은 원시 언어와 알파벳으로 이루어진 비문이 분명했는데 매끄러운 표면을 오목새김한 깊이가 3.5센티미터 정도, 점무늬의 경우는 그보다 1센티미터 가량 더 깊었다. - P290
원시 종족의 비범한 역사의식 - 우리에겐 기적처럼 유리하게 작용했을 환경론은 벽화를통해서 놀라운 정보를 전달했으며, 우리는 사진을 촬영하고 스케치하는 일에 여념이 없었다. - P291
영겁의 침묵에 빠져 있는 비인류의 석조물 속으로 들어가는 동안, 우리의 생각과 느낌이 어땠는지 대충이나마 설명하려면 쫓기는 듯한 분위기, 기억, 인상들이 뒤엉키는 무기력하고 당혹스러운 혼란을 떠올릴필요가 있다. 예민한 사람이라면 그 오싹한 세월의 깊이와 황폐함만으로 짓눌리겠지만, 워낙에 캠프에서부터 불가사의한 공포를 체험한데다 섬뜩한 진실을 담은 벽화들로 충격에 익숙해진 상황이었다 - P292
우리는 주위에서 계속 발견되는 5각형의 모티프를 원시 자연물에 대한 문화적, 종교적 찬미에 불과할 뿐이라고 각자 절박하게 스스로에게되뇌고 있었다. 황소를 신성시했던 크레타인, 갑충석을 신성시했던 이집트인, 늑대와 독수리를 신성시했던 로마인, 그밖에 다양한 동물을 토템으로 삼았던 원시 부족들의 장식 모티프처럼 말이다. - P293
그들은 지구생명체의 창조자이자 통치자였으며, 『프나코틱 필사본』과 『네크로노미콘에서 섬뜩하게 암시한 사악한 원시 신화의 근원이 틀림없었다. 그들은 어느 별에서 신생 지구로 스며든 ‘그레이트 올드원‘이었다. 그들의 형태는 전혀 다른 진화를 거친 결과이며, 지구상의 어떤 존재보다 강력한 힘을 소유했다. - P293
앞으로 공개할 사진들이 없었다면, 나는 정신병자로 감금되지 않기위해서라도, 내가 보고 추측한 것들을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단편적인 역사의 초기 부분별 모양의 머리를 지닌 존재들이 지구에오기 전에 다른 우주, 다른 은하, 다른 행성에서 살았다는 내용에 대해서는 그들만의 신화로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 - P294
짧은 시간에 우리가 그토록 많은 사실을 추측해냈다는 사실이 지금 생각해도 의아하다. 물론 지금까지도 우리가 아는 것은 대략적인 윤곽에 불과하지만, 그나마 그중의 상당 부분은 나중에 우리가 가져온 사진과 그림을 연구해서 얻은 결과다. 그 후속 연구 때문에 되살아난 기억과 막연한 인상이 댄포스의 예민한 성격과 그가 마지막에 봤다는 공포와 결합해서 그는 신경 쇠약에 걸렸을 것이다. 하지만 꼭 해야만하는 일이었다. 충분한 정보를 제시하지 않는다면 효과적인 경고를 할수 없으며, 우리는 경고를 반드시 해야 하기 때문이다. 무질서한 시간과 생경한 자연 법칙이 지배하는 미지의 남극을 향해 꿈틀거리는 사람들의 미련 때문에 더더욱 이후의 탐사 활동을 기필코 저지해야 하는 것이다. - P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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