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국가로서 고대 그리스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관점은 19세기 초반에 이르러서야 나타났다.⁸ 그러나 민주주의와 좋은 정부를 동일시하는 관점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야 일반화됐다. - P29
나는 여기서 그저 돈던이 놀라워하며 한 말을 반복 할 수밖에 없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전 세계적으로 정당성의 기준 [정당한 정부의 기준]이 단 하나[민주주의]라는 생각이 믿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우리가 택한 이 정당성의 기준이 당시로서는 매우 낯선 것이었다는 점이다. 최악의 환경을 제외하면, 전세계 어디에서든 반드시 수행되어야 할 정치의 방식에 붙는 이름으로 민주주의라는 단어가 선택됐다는 것은 ・・・ 정말 불가사의한 일이다." - P30
로버트 달이 매디슨이 36세 때보다 80세에 더 민주주의자다워졌다고 봤다면,¹² 2달 자신이 민주주의에 대한 특정 개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은 다르게 주장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게리 윌스는 매디슨이 필라델피아제헌회의 때도 노년 시절 못지않게 민주주의자다웠다고 주장한다.¹³ - P30
12 Dahl (2002). 13 Wills (1981). - P340
1955년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제15판은 ‘민주주의‘를 이렇게 정의했다. "인민의 자치 self-rule에 기초한 정부 형태. 현대에는 자유로운 투표로 선출돼 인민에게 책임지는 대의 기구와 행정부, 모든 개인이 평등하고 생명,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포함한) 자유, 행복 추구에서 동등한 권리랄 누려야 한다는 근본 가정이 전제된 삶의 장식에 기초한 정부 형태를 말한다." - P30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자‘가 만들지 않았다. 고대 그리스라는 부정적사례 때문에 민주주의자라는 이름표는 불길하게 여겨졌다. - P31
누가 비민주주의자였는지 질문하는 편이 더 유용할지 모르겠다. 법이란 신 또는 자연에 의해 주어졌기 때문에 인간은 법을 만들 수 없으며, 만들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 이들이 분명 비민주주의자들의 반열에 포함된다. 그럼 일단 정부를 선출하면, 그다음에는 모두가 조용히 정부에 복종해야 한다는 견해는 어떨까? - P32
단순히 이름표의 문제라면 우리가 다루는 역사 속 주인공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무시해도 별 상관 없을지 모른다. 오늘날 우리가 ‘민주주의‘라고 부르는 체제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곧 ‘민주주의자‘라고 해버리면 그만이다. - P32
한편 우리는 계보학적으로, 즉 민주주의에 대해 오늘날 우리가 가진생각에서 출발해 그 역사적 기원까지 거슬러 올라가 살펴볼 수도 있다. 그래도 여전히 난관에 부딪힐 것이다. 우리 모두는 민주주의가 자치, 평등, 자유로 이뤄진다는 생각에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이를 기준으로 구체적인 인물과사상, 제도를 판단하려고 하면 곧 의견이 엇갈린다. - P33
오늘날 우리는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를 둘러싸고 대의제의 창설자들이 과거에 그랬듯이 갈등을 겪고 있으며,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이견들 가운데 많은 부분은 그들이 보여 준 이견과 다르지 않다. 그들이 좋은 제도가 무엇인지 합의할 수 없었던 것처럼 우리도 마찬가지다. - P34
심지어 오늘날에도 평등, 자치, 자유라는 삼총사가 일관되게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것은아니다. "자치에 참여한다는 것은, 정의justice가 그러하듯이, 인간에게 필요한 기본적 요청이자 본원적 목적에 해당한다. (후략)." - P34
내가 보기에, 그 이상은 바로 인민의 자치다. 물론 어원으로 보면 인민의 자치가 곧 ‘민주주의‘ 민주주의demokratia는 인민demos; people과 지배kraiten; rule의 합성어다 - 다. 그렇지만 자치라는 이상이 고대 그리스에서 수입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하는 게 중요하다.*
* 한센에 따르면, 미국과 프랑스의 대의제 창설자들이 아테네 민주주의에서 영감을받았다는 신화는 한나 아렌트가 혁명론』On Revolution에서 만들어 낸 것이다(Han-sen 2005). - P36
인민이 유일한 주권자여야 한다. 인민이 스스로 통치해야 한다. 모든 인민은 동등하게 대우받아야 한다. 인민의 삶은 정부를 비롯한 타인의 부당한 간섭으로부터자유로워야 한다. 이런 이상은 과거 대의제 창설자들이 가졌고 또 오늘날 우리도 그렇다. 약 200년 뒤 켄틴 스키너가 말했듯이,²⁴ 민주주의는 인민이 통치하는 체제다. 그 외의 다른 무엇도 아니다. - P37
「정치적 말의 힘, 후마니타스, 2023, 95쪽])에서 인용.
24 Skinner (1973, 299).
이상, 행위, 그리고 이해관계
분명, 어떤 관념은 제도보다 앞서 존재한다. 정치제도는 언제나 의도적인 행위 deliberative act를 거쳐 창조되는데, 그 궁극적 형태는 헌법 제정이다. 따라서 정치제도는 관념들을 물질화한 것이다. 그러나 헤겔의 말과달리, 역사는 관념이라는 하나의 원인에 따라 추동되지 않는다. - P37
로버트 로스웰 팔머가 칸트에 대해 말했듯이,²⁵ 철학은 현실의 혁명이 아니라 단지 "정신의 혁명"에 불과할지 모른다.**
** ‘정신의 혁명‘이라는 말은 팔머가 독일에 관해 쓴 장의 제목이다. 팔머 (Palmer1964,447)는 이렇게 말했다. "칸트는 비판받을 점이 있다. 의심의 여지 없이 그는당대 사건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의 철학은 두 영역 사이에 건널 수 없는경계를 그었다. 경계 한편에는 자유와 정치적 행위에 대한 사상을 놓았고, 다른 편에는 경험적 지식과 개개인들의 현실적인 생각을 두었다." - P38
관념이 제도에 앞선다고 해도 사상thought의 역사에서 실제 행동의역사를 유추하면 안 된다. 곧 명백히 밝혀지겠지만, 대의제 창설자들은어둠 속을 더듬으며 나아갔다. - P38
무엇을 관찰할 수 있고 무엇을 관찰할 수 없는지를 질문해 보면, 관념과 행동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우리는 역사 속 주인공들의 발언과 행위를 살펴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마음속으로 원한것이나 생각한 것은 관찰할 수 없다. 그들은 종종 때에 따라 말을 바꿨다. 또는 말과 다르게 행동했다. 또는 자신이 하지 않은 일을 큰소리로 외치고, 정작 자신이 한 일은 조용히 소곤거리기도 했다. - P39
나는 두 명제를주장한다.
1. 대의제 설립을 정당화하고, 대의제가 민주주의로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상은 논리적으로 일관되지 않고, 실천적으로 실현 불가능했다. 2. 대의제 창설자들은 자신의 이해관계를 정당화하는 식으로 행동했다고 볼 수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들이 만든 제도는 그들의 특권을 보호했다. - P40
수수께끼는 쉽게 풀리지 않는다. 우리는 대의 정부의 창설자들이 자치, 모든 이들의 평등과 모두를 위한 자유를 말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동시에 그들이 전체 인구 가운데 다수를 배제하는 제도를 만들었고, 인민의 의지로부터 현 상태를 보호하려 했다는 것도 안다. 우리는 그들이, 자신들이 배제하려 했던 이들을 두려워했으며, 자신들이 만든 제도가재산권을 지켜 주길 바랐다는 점 - 이에 대해서는 이어질 내용에서 많은 증거를 제시하겠다 - 을 안다. - P41
민주주의가 세 가지 이상 - 평등에 기초하며, 자유를 뒷받침하는 자치 - 을 실현한 것이라고 믿으려면, 어느 정도 사실이 이 같은 믿음을 뒷받침해야 한다. 나아가 우리가 이렇게 생각한다면, 어떻게 이상이 사실을 추동하는 지뿐만 아니라, 어떤 사실이 그 이상을 신뢰할 만한 것으로 만드는지도 살펴봐야 한다. - P43
평등, 참여, 대표, 자유
자치라는 이상은 원래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 루소와 (거의 영향을 못 미친칸트가 정교하게 다듬었다. 이 이상에 따르면 인민은 스스로 통치할 때,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에게 복종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유롭다. 자치라는 이상은 여기서 출발했지만 논리적·실천적·정치적 문제에 봉착한다 - P43
인민이 사회적·경제적·정치적으로 분열되어 있는 현실이 명백해지면서, 누군가가 모든 인민을 동시에 대표할 수 있다는 관념은 유지될 수 없었다. 주기적인 선거로 선출되는 일군의 정치인들이 통치하는 것이 차선의 선택지가 됐다. - P43
[오늘날 국민국가와 같은] 대규모 사회에서는, 매우 짧은 순간이라도, 모든 사람이 통치할 수 없다. 따라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타인의 통치 아래에서 살아간다. 그리고 가치, 열정, 이해관계도 사람마다 다르다. - P44
여기서 내 핵심 주장을 간략히 소개하겠다. 대의제 창설자들이 평등이라는 말을 썼지만, 사실상 그들이 말한 것은 의미가 달랐다. 그것은 기껏해야 익명성 anonymity이다. - P44
우리에게 남겨진 수수께끼는 다음과 같다. 왜 민주주의는 사회를 좀 더 경제적으로 평등하게 만들지 못하는가? 이에 대해 몇몇 사람들은, 가난한 이들이 여러 이유로 평등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고 말한다. 또 다른 설명에 따르면, 부자가 대의 기구를 장악하고, 그들이 머릿수에 비해 과도한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평등을 가져오는 정책이 채택되지 않는다고 한다. - P45
・[옮긴이] 단순 다수제simple plurality system는 다른 후보보다 한 표라도 더 득표하면승리하는 것을 말하고, 절대 다수제majoritarian system는 총 유효표의 2분의 1을 초과해 (50퍼센트+1) 득표하면 승리하는 것을 말한다. 초다수제supermajoritarian system는 승리하기 위해선 절대다수보다 더 큰 특정 수준의 득표를 요구하는 것을 말한다. 대의 기구가 초다수제로 운영될 때 법안의 제정·개정은 좀 더 엄격한 요구 조건을 충족해야 하지만, 다른 한편 그 조건을 달성하기 위한 정당 간의 합의를 촉진하거나 강제할 수도 있다. - P45
날것 그대로의 인민의 의지에 대한 광범위한 불신으로 말미암아 정치적 권리의 제한, 인민의 의지에 대한 제도적 견제가 생겼다. 이때 제기되는 문제는 이런 것이다. 선거를 통해 자치가 실행되는 대의제에서 좀더 효과적인 정치 참여는 가능한가? - P46
우리 제도는 대의제다. 즉, 시민이 [직접] 통치하지 않는다. 시민은 다른 이에게 통치된다. 아마 통치하는 이는 매번 바뀔 것이다. 그래도 다른이가 통치한다는 사실 자체는 변함없다. - P47
특히 선거에서 다수가 요구한 것이 [현 상태의] 변화일 때 더 그렇다. 여러 초다수제적, 혹은 노골적으로 반다수제적인 제도는 표면상 소수자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오늘날 소수자라는 명칭은 여러 이유로 소외 계층underprivileged을 지칭하는 데 쓰는 것이 정치적으로 올바르다고 여겨진다. 심지어 수적으로 다수인 집단, 즉 여성을 언급하면서도 소수자라는 말을 쓴다. - P47
따라서 민주주의는 경제적 평등, 효과적 참여, 완벽한 대리인, 자유라는 네 가지 점에서 모두 한계가 있다. 그러나 나는 어떤 정치체제도 민주주의보다 나을 수 없다고 믿는다. 현대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만큼 경제적 평등을 만들어 내고 유지할 수 있는 정치체제는 없다. - P48
나는 이 같은 민주주의의 한계를 아는 게 중요하다고 믿는다. 그래야 그 어떤 정치체제도 할 수 없는 일을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민주주의를 비난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 P49
5. 선택과 참여
들어가며
(전략) 선거에서 유권자에게 주어지는 선택지들에는 모든 시민의 이상점들ideal points, 즉 그들 각자가 가장 선호하는 모든 대안이 포함되지 않는다. 선택지는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유권자들의 선호가 충분히 이질적이면, 일부 시민은 제시된 공약 가운데 [자신의 선호에] 그나마 가장 근접한 것도애초 자신이 선호했던 것과는 한참 동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있다. - P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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