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럭서스 예술가들은 어떤 것에 대해 결코 의견의 일치를 보이지 않기때문에, 플럭서스는 보티에(Ben Vautier)의 말에 의하면 "예술계의 골칫거리"가 되었다. 양식이나 물질 혹은 의미는 그 어느 것도 예술가들 가운데서 의견 일치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 P11
사학자인 스미스(Owen Smith)가 말하고 있듯이, "플럭서스의 역사적인 속성과 그 개념적 틀에 대해 배우고자 하는 사람에게, 그것은 급진적이라기보다는 그저 평범한 좌절간으로 보일 수 있다."¹ - P11
머리말
1)오언 스미스, 서문(Introduction)」, 「플럭서스: 태도의 역사』(San Diego SanDiego State University Press, 1998), 1쪽. - P287
『플럭서스 경험』은 본질적으로 경험적 성격의 플럭서스 형태에 대해 부분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점은 인정한다. 이 책은 미국의 철학자인 듀이가 "세계와의 활동적이고 경계심이 있는 교류, 자아에 대한 완전한 해석, 그리고 사물과 이벤트의 세계"³로 묘사한 것처럼 몇 점의 핵심적인 플럭서스 작품들이 세상과 상호작용하는 방식을 한 개인이 서술한 것이다. - P12
3) Art as Experience) (New York: Capricorn, 1934), 25쪽. - P287
다음에서 나는 하나의 주어진 경험자에게 궁극적으로 속박되는 개인 작품들이나 일련의 작품들에 대한 여러 해석의 제공에 대한 반대로 플럭서스경험 그 자체의 정보적인 구조를 강조했다. 그러므로 이 연구는 특별한 플럭서스 경험보다는 오히려 그 경험의 역학과 관계가 있다.⁵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플럭서스 운동에 대한 이해가 발전함에 따라 개별 플럭서스 경험에 대한 주제별 분석이 이뤄지기를 바란다. - P13
5)특정한 콘서트와 페스티벌에서 퍼포먼스를 했던 장소, 참가자와 작품에 대한세세한 것은 스미스, 「서문」 참고. - P287
예술 운동에 대한 나 자신의 경험적인 지식은 플럭서스가 본질상 경험적이라는 나의 확신에서 일부분 확실하게 작용한다. 아직도 나는 나 자신을 매번 점검한다. 플럭서스 경험은 플럭서스 예술가들의 용어와 저작뿐만 아니라 사물들과 퍼포먼스 자체에도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므로 앞으로 진행될 설명은 주관적일 뿐만 아니라 집단적인 본능과 직관으로부터도 나온다. 여태까지 모든 지적인 노력이 엄밀하게 행해졌기 때문에, 이 특별한 프로젝트는 평범하다. - P14
작곡 수업이 공식적으로 끝난 후에도 플럭서스(뿐만 아니라 해프닝, 팝 아트, 실험 영화와 연극, 무용)와 관련된 예술가들은 비공식적으로 실험을 계속했다. 플럭서스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것은 1959~1960년에 한센과 히긴스가 뉴욕 오디오비주얼 그룹(New York Audiovisual Group)을 창설한것과 맥로와 영이 웨스트 코스트의 실험적인 악보 잡지 《비티튜드 웨스트(Beatitude West)》를 확장한 《비티튜드 이스트(Beatitude East)》를 출간하기 시작한 일이다. - P24
유럽에서의 플럭서스도 유사하게 출발했다. 1950년대 초부터 독일의 음렬주의 작곡가인 슈토크하우젠(Karlheinz Stockhausen)은 독일에서 전위 음악의 중심에 있었다. 플럭서스 예술가 영(1958년)과 백남준(1957~1958년)이 참석한 다름슈타트에서의 그의 작곡 과정은 1950년대 후반 플럭서스예술가인 윌리엄스를 포함한 실험적인 다름슈타트 시 · 연극회와 궤도를. 공유했다. - P24
비록 보이는 것이 물리적인 대상이 아닐지라도 <플리커>에서처럼 분명히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일 수 있다. 비록 (귀신, 꿈, 모든 종류의 환각 눈의 고장, 신기루, 마술, 비전 게임으로 야기되는 이미지들과 같은) 비가시적인 비전들을 만들어내는 다른 요인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시각적인 피로가 만들어내는 이미지이다. - P37
다시 말해, 이 경험은 주관적이거나 객관적이지 않다. 자극(필름)은 보이는 바(부분)가 아니며, 보이는 것과무관하지도 않다. 오히려 보이는 것은 "저쪽에 있는" 세계와 "이쪽에 있는" 자아와 결합한다. - P37
그것이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 사이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플리커>는 경험이 분명하게 구별되는 정보의 발신자들(객체)과 수신자들(주체들)에 의해 중재된다는 믿음과는 반대로 작용하는데, 그것은 서구의 철학적인 전통의 핵심인 이중성이다. - P37
즉 눈은 외부 스크린에 비치는 필름을 보는 사람의 유기적인 경계를 이룬다. 필름을 보는 경험은 요소들을 한 영역 또는 다른 영역에 배타적으로 위치시키기 위해 쉽사리 해부될 수 없다. 두 영역 모두에서동일하게 발생한다. 그러므로 <플리커>의 경험은 "자아, 그리고 사물들과상황들의 세계에 대한 완전한 상호 침투를 나타내는 것"³이라고 보는 심미적 경험에 대한 듀이의 개념과 부합된다. - P38
제 1장 정보와 경험
3)존 듀이, 『경험으로서의 예술』, 25쪽. - P289
<플리커>와는 속도 면에서 정반대인 같은 플럭스필름과 프로그램에 포함된 오노(Yoko Ono)의 필름 <아이블링크(Eyeblink)>(1966)가 있는데, 그것은 플럭서스 촬영 기사인 무어(Peter Moore)의 고속 카메라로 초당 2000개의 프레임으로 찍은 깜빡거리는 눈으로 이루어져 있다. 규칙적인 속도로 보이는 그 필름은 깜빡거림의 극단적으로 느린 동작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 P38
눈을 깜빡이는 동안에는 눈이 완전히 열리지 않기 때문에, <아이블링크>의 대부분은 보고 있지 않는 동안, 적어도 가시적인 사물들을 보고 있지 않는 동안의 눈을 보여준다. 오히려 스크린 위의 이미지는 규범적인 시각 경험 사이의 연장된 공간이나 틈을 보여준다. - P39
두 필름에서 비전은 신체 내에 확고하게 위치를 잡았다. <플리커>에서의 구현은 관람자의 시신경과 눈 근육에 미친 피로의 효과를 통해 일어나며, <아이블링크>에서는 하나의 시각적 틈의 지연된 재현을 통해 일어난다. 비객관적인(하지만 시각적인 요소들의 이러한 구현을 통해 <플리커>와 <아이블링크>는 상업용 필름과 연합된 연속적이고 객관적인 비전의 영역이나범위상 통일성에 대한 대안들을 제공한다.⁵ - P39
5)멀베이의 획기적인 「시각적 쾌와 서술적 영화(Visual Pleasure and NarrativeCinema)는 예술사 분야에서 특히 영향력이 있었다. 그것은 콘스턴스 펜리(Constance Penley) 편, 「페미니즘과 필름 이론(Feminism and Film Theory)」(New York: Routledge, 1988)에서 발견될 수 있다. - P289
현대 예술사 용어에서는 눈을 그 시각적인 능력(<플리커>)의 한계까지 강요함으로써, 그리고 깜빡거림(<아이블링크>)으로 특징지어지는 시각성에서 휴식에 접근함으로써 이 필름들은 신체에서 떠난 응시의 권한을 약화한다.⁷ - P39
7) 미술사 내에서 응시의 변하는 기능을 조망하기 위해서는 로버트 넬슨(Robert S.Nelson) · 리처드 슈리프(Richard Schriff) 편, 미술사를 위한 비평적인 용어들(Critical Terms for Art History)』(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2)에 나오는 마거릿 올린(Margaret Olin)의 「응시(Gaze)」를 참고. 미술사학자들과 문화적인 비평가들이 행한 응시에 대한 유명한 서적 분량의 연구는 노먼 브라이슨(Norman Bryson), 「비전과 회화: 응시의 논리(Vision and Painting:The Logic of the Gaze)」(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83), 기드보드(Guy Debord), 스펙터클의 사회(The Society of the Spectacle)』(Detroit: Blackand Red, 1983)와 마이클 프리드, 「몰입과 연극성: 디드로 시대의 회화와 관Absorption and Theatricality: Painting and Beholder in the Age ofDiderot)(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0)를 포함한다. - P290
이러한 경험에 의한 시각의 입체감과는 대조적으로 상반된 시선을 가진 르네상스의 원근법은 철학적인 사학자인 비릴리오(Paul Virilio)에 의하면, "시각의 입체감이 발전하고 이를 통해 보는 방식의 모든 가능한 표준화가 이루어지는 결절이었다."⁹ 이러한 견해는 후기 르네상스의 맥락에서 다른 시각적 방식을 도입하는 것을 매우 어렵게 만든다. - P42
9) 폴 비릴리오, 『비전머신(Vision Machine)』 (Bloomington: Indiana University Press: London: British Film Institute, [1988] 1996), 15쪽 - P290
격자/스크린이 없다면 혼돈이 지배하게 된다. "서구에서 신과 예술의 죽음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그리고 재현의 제로 지점은 인습 파괴자들과 투쟁하는 동안에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니케포루스(Nicephorus)가 천년 전에 말했던 예언을 성취했을 뿐이다. 즉 우리가 그 이미지를 제거한다면, 예수뿐만 아니라 전 우주도 사라지는 것이다.¹⁰ - P42
10 )BAR PE (Vision Machine) (Bloomington: Indiana UniversityPress; London: British Film Institute, [1988] 1996), 16~17쪽. - P290
다시 말하면, 비실리오의 경우 신체를 없앰으로써 모든 진실 묘사적인 미술에서 세계를 객관화시키는 스크린이나 "보기 위한 장치"는 시각적인 경험의 한 부분에 지나지않는다. 응집력을 가진 다른 논리들이 있다. 우리는 "바로 그 존재인 실체"라는 점을 잊지 않아야 한다. - P43
비릴리오의 원근법으로부터 두 개의 플럭스필름과 스포에리-뒤프렌의 사물은 필름의 범주적 통일성, 환영주의적 이미지들과 부정적으로 공명하는 반면에, 로마니신의 원근법으로부터는 필름과 사물이 더 광범위한 생리적인 비전의 기반을 확신시켜 줄 것이다. 시신경의 피로나 눈꺼풀에 생리적인 틀(<플리커>)을 제공함으로써, 눈꺼풀이 깜빡거리는 것(<아이블링크>)으로 눈꺼풀을 표현함으로써 플럭스필름은 눈을 모든 운동성과 감각성을 가진 인체 내에 둔다. 이와 함께 세 편의 플럭스 작품들은 범주적인 통일성에 대해 하나의 대안을 제공하며, 그와 동시에 경험적인 혼돈이라는 개념을 배척하게 된다. - P43
만약 우리가 신체를 수동적인 시각의 단순한 연장, 즉 단순히 눈의 배후에 덧붙여진 어떤 것으로 이해한다면, 이 주장은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각의 일치된 입체감은 역동적이다. - P44
즉 "신체는 주체적 역할에 덧붙여 그 자체가 하나의 대상으로 제시된다. "이와 더불어 주체와 객체는 행위, 언어, 사물, 소리 사이의 조사를 위해 변하면서 상호 관계성을 가지는 지각적 영역을 만들어낸다."¹² 퍼포먼스처럼 이렇듯이 "변하면서 상호 관계성을 가지는 지각적 영역은 눈 깜빡거림을유발하는 다른 플럭서스 작품에서 간결하게 설명된다. - P44
12) 크리스틴 스타일스, 「물과 돌 사이, 플럭서스 퍼포먼스: 행위의 형이상학(Between Water and Stone, Fluxus Performance: A Metaphysics of Acts)」엘리자베스 암스트롱(Elizabeth Amstrong) · 조앤 로스퍼스(Joan Rothfuss)편, 「플럭서스 정신(In the Spirit of Fluocus)』(Minneapolis: Walker Art Center, 1993), 65쪽. 스타일스가 사용한 퍼포먼스적(performative)이라는 용어는 오스틴의 단어들로써 어떻게 사물들과 접하는가(How to Do Things with Words)」(Cambridge, Mass.: Harvard University Press, 1975)에서 유래한다. 오스틴은단어들이 일하는 방법에 큰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스타일스는 이것을 확장하여 생각과 행동을 연결하는 비교적 광범위한 활동과 경험을 포함한다. 퍼포먼스성 언어적 의미에 대해서는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 「흥분할 수 있는 말(Excitable speech)』(New York: Routledge, 1997) 참고. - P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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