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제일의 영화를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세계제일의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그다음, 그것을 정제해서 영화에 맞게 각본화한 세계제일의시나리오가 만들어지고, 그 세계제일의 각본을 감독할 세계 최고의 감독이 필요하다. 그다음, 그 세계제일의 감독에 걸맞는 세계 최고의 스태프를불러 모으고, 마지막으로 세계 최고의 배우들을 섭외하면, 자연스레 세계제일의 영화가 나올 것이다. - P175
세계 최고라는 소설가, 각본가, 감독이라도 어느 순간 아무도 예상 못한 망작을만들어내도 이상하지 않은 게 이 바닥이다. 예술은 불안정한 인간의 관점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그런만큼 수치화, 정형화해서 파악하기가 힘들다. - P176
그래서 영화제작은 도박이라고들 한다. 스토리, 시나리오, 감독, 배우의 질은 그 도박의 확률을 높이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 P176
영화판에도 당연히 그들이 선정한 세계제일이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평가기준은 시장의 평가기준과는 좀 달라서 일반 사람들이 알 만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들려오는말로 이미 거장이 된 유명한 헐리우드 감독, 각본가들 중에는 과거 그들이 선정한 세계제일이었던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지금은 거장 대우를 받는 감독이라도, ‘그들‘ 의 평가기준에는이미 세계 최고의 능력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 P177
세계제일의 이야기꾼이 만든 이야기를 세계제일의 각본가가각본화했고, 그 각본을 영화화할 세계제일의 감독을 섭외했다. 물론 여기에 세계제일의 조명감독, 조감독, 촬영감독, 기타 등등의 스태프들도 다 꾸렸다. 그리고 배우는 주연부터 조역까지 죄다 톱스타들로 섭외해냈다. 그 배우들 중에는 물론 ‘그들‘이 선정한 세계제일의 배우들도 포함되어 있지. - P177
그러나 톱스타 배우들에게 투자한 건 돈이다. 여기에는 천문학적인 개런티가 들었다. 영화가 망하면 회사가 문제가 아니라 유서 쓰고 투신할 사람이 수백 명은 더 된다. 그리고 이 일의 책임자는 다름 아닌 나다. 지난 1년간 난 배우들의 섭외를 맡은 총책임자였다. - P178
사실 이건 내 능력이라기보다 자본주의의 힘이라고 하겠다. 이미 극한의 제작비를 쏟아붓는 영화 배우 개런티도 아낌이 없다. 뭐, 이런 상황이니 내 입장도 당연히 녹록치는 않았다. 그 어느 때보다 막중한 책임감이 어깨를 짓누른다. - P178
"그래, 내일 대본 리딩인데 배우들한테 확인전화는 다했어?" "아뇨. 해야 돼요?" ...... 난 책상에 앉은 채로 잠시 이마를 짚었다. 일이 바빠져서 새로 어시스턴트를 하나 구했는데 저런 얼빠진 계집애라니. "지금 할까요?" - P179
난 황급히 자세를 고쳐 잡고 인사했다. 물론 받은 사람은 배우 당사자가 아니라 그 에이전시 회사의 매니저다. "안녕하십니까. 접니다. 네네. 다름이 아니라 내일 리딩이라확인 차 한번 연락드렸습니다." [아, 그렇지 않아도 이쪽에서 먼저 연락드리려고 했는데요.] 상대가 이렇게 말해오자마자 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배우가 먼저 연락해오는 경우는 대부분 좋은 소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 P179
[세계제일이든 뭐든 어쨌든 테러범이잖아요. 아시겠지만9.11테러 이후에 테러라는 게 좀 민감한 부분이고, 최근엔 총기난사 사건이다 뭐다 사회적으로 흉흉한데 이미지적으로 이게 좀...... 무슨 말인지 아시죠? "알죠. 근데 영화 아닙니까." [음, 사실 A씨가 9.11로 사촌을 잃었어요. 그런 아픈 기억이있어서 배역에 좀 거부감이 드는 거 같아요.] "그랬군요. 유감입니다." - P180
[그리고・・・・・・ 뭐, 우리끼리니까 다 까놓고 말합시다. 지금 A씨 형편 아시잖아요. 가뜩이나 스캔들 나서 여론이 안 좋은데 여기에 이런 배역 맡으면 이미지 수복 힘들어요. 대본 보면 마지막에 사람들 막 쏴죽이고 그러잖아요. 그럼 곤란해요. 그래서 말인데, 테러리스트 말고 다른 직업으로 좀 바꿀 수 없을까요? 이미지 괜찮은 걸로.] - P181
[A씨가 워낙 바쁘다 보니까 좀 그래요. 이해하시죠?] 한순간 혈압이 올라 세상이 빙글 돌았다. 아차, 하고 쓰러질 현기증을 이겨내며 난 이렇게 말했다. "그럼요.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럼, 잘된 걸로 알고 그렇게 전달하겠습니다.] "예?" 내가 되물었지만 이미 전화는 끊어졌다. - P181
매치스틱 트웬티. 이 영화의 제목이다. 대략적인 시놉시스는 이렇다 ‘그들‘에게 공인된 세계제일의 테러리스트라는 소녀가 건물을 점거 인질 20명을 잡는다. 그러나 총알이 모자라 인질을 다 죽일 수 없으므로 10명을 풀어주겠다 제안하고 인질들은 그 10명을 선별하기 위해 성냥개비 제비를 뽑기로 한다. 하지만 그때, 역시 ‘그들‘이 선별한 세계제일의 이야기꾼이라는 남자가 나타나 상황을 변화시킨다. - P182
이걸 바꿔달라니 제정신이냐? 배역을 바꾸면 이야기가 성립이 안 되잖아? "그럼 다시 전화해서 안 된다고 하세요." 라고 철없는 어시스턴트는 말하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마라. A양은 톱스타이고, 하이틴 스타이고, 제작 투자자들을 끌어 모은 이 영화의 티켓파워인 동시에, - P182
‘그들‘이 선정한 세계제일의 여배우다. 개런티로 움직이는 배우가 아냐. 당장 맘에 안 든다고 계약파기 해버려도 이상할게 없는 썅년이란 말이다. 상황 주도권을 다 가진 여자야. 이 여자랑 트러블 나면 영화 엎어진다. "그럼 어떡하려고요?" - P183
조바심을 내다가 나중엔 풀이 죽어 수화기를 내려놓는 내게어시스턴트가 물어왔다. "뭐래요?" "각본가랑 상의해보고 연락 달라는군." 난 이렇게 대답하며 내려놓았던 수화기를 다시 들어 올린다. 이번엔 세계최고의 각본가다. - P186
책상 앞에서 어시스턴트가 벌레 씹은 얼굴로 날 쳐다보든 말든. 난 미친 듯이 오버해서 웃으며 떠들어댔다. 물론 그러다가곧 은근슬쩍 본론을 꺼내 든다. "아, 근데요...... 뭐랄까 그 테러리스트 말인데요. 네, 여자테러리스트요. A씨 배역, 오늘 A씨가 하는 말 가만 들어보니까 참 기구하더라고요. A씨 아버지가 9.11테러로 돌아가셨다지 뭡니까? 그래서 자기가 테러범 역할을 하는 게 참 마음에걸리는 모양이에요." "아버지가 아니라 사촌 아니었어요?" 여지없이 들어오는 어시스턴트의 딴지에 난 눈을 부라렸다. - P184
"역시 그렇죠? 그럼요. 그걸 바꾸면 이야기가 안 되죠. 네네, 저도 그냥 해본 말이었어요. A씨가 워낙 상처가 깊은 거 같아서・・・・・・ 네네, 알겠습니다. 내일 리딩에 나오실 거죠? 나오셔서 배우들하고 인사도 하고 그러세요. 다들 뵙고 싶어 합니다. 최고의 각본이거든요. 네네, 네에." 전화를 끊음과 동시에 내 웃음도 사라진다. - P185
"네네, 지금 작가분하고 이야기를 해봤는데요.………… 그게 저기......." [아, 그렇지 않아도 방금 A씨하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A씨는간호사가 어떨까 하더군요.] - P185
"그럼요. 이제 A씨도 20대인데 그런 역할을 당연히 하셔야죠. 저도 사실 그런 부분이 못내 아쉽고 그랬습니다." [그렇죠? 그럼 그렇게 알고 A씨에게 전하겠습니다.] "자, 잠깐만요. 근데 간호사로 바꾸면・・・・・・ 이야기가 좀..…………뭐랄까. 애초에 배경 자체가 테러리스트가 빌딩을 장악하면서 발단이 되는 건데…………… " [그럼 배경을 병원으로 하면 되겠네요.] - P186
"구경났어? 여기서 주절거리지 말고, D씨 확인전화 어떻게됐어?" "전화 안 받아요." "다시 해. 그럼." 스난 다시 몸을 일으키고 전화번호를 누르며 염원한다. 세계제일의 각본가가 세계제일의 이해심도 같이 가지고 있으면 좋겠다. - P187
"네네, 접니다. 네. 아무래도 말인데요……. A씨 배역을 간호사로 좀 바꿀 수 없을까요? 하하. 네, 농담 아닙니다. 네네, 물론 그렇죠. 그러니까 배경도 병원으로…………… 네. 죄송합니다. 그야 스토리는 선생님께서 좀 잘 다듬어주시면 어떻게 될 거 같은데요." 이때 갑자기 어시스턴트가 지나가는 말로 초를 쳤다. "그게 어떻게 될 리가 없잖아요." "넌 그냥 입 다물고 시키는 대로나 해!" - P187
전화를 끊고 고개를 들어보니 어시스턴트가 한심한 눈초리로 날 들여다보고 있었다. "내가 박쥐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하나?" "네."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연이어 물어왔다. "A씨 사무소에 연락 넣을까요?" "거기 연락해서 어쩌게?" - P188
아름답고 착하고 지적인 세계제일의 간호사가 병원의 환자들을 인질로 잡았다. 왜일까? [히스테리라거나 정신분열이라거나 원래 사이코라거나 많은이유가 있겠지.] 그런 부정적 이유는 안 돼. A라는 이름의 썅년은 포지티브한 역할을 원한다고. [그럼 뭐, 정의를 위해?] - P189
아하 그러니까 그 간호사밖에 위기상황을 인지 못하고? 외부에서는 그녀를 이해 못하고 그냥 미치광이로 몬다? [그렇지!] 날림치고는 제법이군. [후후, 그렇지?] 그걸로 가지! 10분 내에 각본으로 수정해서 보내. ・・・・・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자마자 자연스럽게 어시스턴트가물어온다. "누구예요?" - P190
들어둬라. 세상 어떤 훌륭한 각본이든지 촬영 때까지 상처 없이 무사한 각본은 존재하지 않아. 그 퀄리티에 상관없이 말이야. - P190
"예, 감독님? 접니다. 각본가랑 상의해서 내용을 좀 바꾸었는데………… 시간이없어서 일단 바꾼 각본을 먼저 보내드렸습니다. 확인을......." [확인했소.] "아, 그러셨군요. 보시기에 어떠신지……………." [우선 말해둘 건 난 영화감독이오.] - P191
[하지만 두 번째 철칙이 또 있소. 한번 계약한 영화는 무조건찍는다.‘ 요. 상황이 어떻든 중간에 때려치우는 일은 없소. 그건 스스로 내 무능을 증명하는 일이기 때문이오. 스토리가 개차반이라도 훌륭한 영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감독 능력이란 소리지] - P192
"네・・・・・・ 말씀하시죠." [어떻게 간호사가 총을 구했지? "그야..... 그럼 총이 아니라 칼이나 약품이나 뭐 그런 걸로할까요?" [스토리상 총알이 모자라 인질을 풀어주겠다고 하잖소.]그렇구나. 그럼 원래 간호사가 호신용으로다가 총을 가지고있었다거나 뭐・・・・・・ [말이 안 되오, 일단 그 부분의 수정을 요구하고, 그다음] - P192
[세계제일은 거짓말을 못 하오.] - P193
감독과 통화를 끝내자마자 난 다시 각본용병에게 전화를 걸었다. 감독이 꼬치꼬치 지적한 사항에 대한 설명을 들은 용병은 태연스레 이리 말한다. [듣고 보니 그러네?] 듣고 보니 그래? 네가 그러니까 세계제일은 고사하고 땜빵이나 때워주는 일용직이 되어있는 거다. - P193
"근데요. D씨한테 연락이 닿았는데요." "그래, 잘했어. 내일 리딩이라고 확실히 전했지" "그게 아니라..... A씨가 원해서 각본을 간호사역으로 바꾸고 배경을 병원으로 고쳤다고 하니까 막 화를 내던데요." 난 당장에 담배를 비벼 끄고 기대있던 상체를 곧추세웠다. "그런 말을 왜 해!" "어차피 지금 수정대본 다 보낼 거잖아요. 알게 될 일인데." - P194
예컨대 얼마 전 왕년의 액션 대배우들이 모두 모여 찍은 영화도 있지 않았는가. 여기는 엄청난 톱스타도 카메오로 나오고 막 그런다. 바로 그런 예를 들어 배우들을 설득했다. 배우 D씨도 그런 케이스. 이번 영화에선 인질 20인 중 한명이라는 비중 없는 조연이지만, 사실 경륜 있는 배우다. - P194
하지만 그것보다 가장 큰 문제는 뭐냐면 이 배우 D씨도 세계제일의 배우라는 것인데. "근데 세계제일의 남자배우를 왜 조연으로 계약했어요?" 세계제일의 조연배우다. "그런 사람도 있어요? 그럼 청장역은 세계제일의 악역배우인가요?" 잘 아네. "여하튼 지금 수습할 거니까 자넨 입 다물고 있어." - P195
"알겠습니다. 하시는 말씀이 백프로 옳습니다. 그렇잖아도저도 도저히 이게 아니다 싶었어요. 당장 A씨한테 전화해서담판 짓겠습니다. 네." - P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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