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맞은편에는 사진 속의 여자가 앉아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녀가 친근하게말을 걸어주는 것만으로 나는 뭐라 말할 수 없이 즐거운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이따금 입을 다물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 P294
마치 노래하는 것처럼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그 순간 나는 흠칫 놀라 눈을 떴다. 어둑어둑한 찻집의 웅성거림도, 커피 향도, 창문으로 비치는 희끄무레한 빛도 전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 P294
그때 갑자기 관측소 밖에서 야수의 포효가 들려왔다. 일어나 블라인드 틈으로 밖을 내다봤다. 아직 날이 밝으려면 더 있어야 하는지 온통 어두웠다. 한 번 더 포효가 들려왔다. 섬에서 생활하게 된 뒤로 포효는 종종 내 잠을 깨웠다. - P295
계단을 내려가자 사야마의 방에 불이 켜져 있었다. 하지만 사야마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고 화장실이나 샤워실을 쓰는것 같지도 않았다. - P295
왕 같은 관록을 떨치며 그림자는 천천히 초지를 걸어왔다. 달빛을 받은 몸뚱이는 파르스름하게 인광을 발하는 듯 보였다. 커다란 호랑이였다. (중략) 호랑이는 유리 너머에 눕더니 조각상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뭔가를 호소하듯 나를 쳐다봤다. 몹시 쓸쓸해 보이는 눈이었다. 자신이 왜 이런 곳에 있는지 모르겠다는 것 같았다. 그때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호랑이는 사야마 쇼이치였다. - P296
이튿날 아침, 나는 전망실의 간이침대에서 잠이 깼다. (중략) 계단을 내려가자 사야마 쇼이치는 자기 방 구석에 있는 부엌에서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 P296
"어제 한밤중에 호랑이를 봤지?" 베이컨에그를 먹으며 사야마쇼이치가 불쑥 말했다. "그건 나야." 나는 어안이 벙벙해서 사야마를 쳐다봤다. 혹시 꿈이었던 게 아닐까 의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놀랐군?" "그야 놀라죠." - P294
"장난치는 건 아니겠죠?" "믿지 않아도 돼." "......선천적으로 그런 겁니까?" "이거 봐, 선천적으로 호랑이로 변신하는 인간이 어디 있어? 이건 아마 이 섬에서 너무 오래 살았기 때문일 거야. 가끔씩 기억이 없을 때가 생기면서 점점 상황을 알게 됐지. 호랑이인 동안의 기억도 단편적으로는 나." - P297
"네모 군, 지난 2주 동안 자네는 훌륭하게 내 조수로 일해 줬어. 신뢰할 만한 인물이라는 걸 스스로 입증한 거지. 그래서 이제 자네에게 이 관측소의 존재 이유를 설명해 주고 싶군. 이제부터 우리는 새로운 모험에 나설 건데, 그 모험의 의의를 자네가 꼭 이해해줬으면 하거든." 진지한 말투에 나는 자세를 바로 했다. "알겠습니다. 가르쳐 주십시오." - P298
"난 ‘학파‘에서 파견됐어." ‘학파‘라고요?" - P298
사야마 쇼이치는 해도를 탁 치며 말했다. "얼마 전에 내가 눈에 보이지 않는 군도 이야기를 했지. 요새는 그걸 선원의 환각이거나 황당무계한 뜬소문으로만 보고 무시하거든.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노력을 거듭하는 건 오로지 학파뿐이야. 내가 이 관측소에서 지내온 건 그 때문이지." 이 사람은 지금 나를 데리고 장난치는 건가? - P299
사야마 쇼이치는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학파는 이 해역의 수수께끼를 풀려 하고 있어. 하지만 진짜 목적은 그 다음에 있지. 이 해역의 불가해한 현상을 성립시키는 기술, 즉 ‘창조의 마술‘을 손에 넣는 게 우리 목적이야." 사야마 쇼이치는 옆에 쌓여 있는 책 더미에 손을 뻗어 맨 위에 놓여 있던 종이 서류철을 집었다. 속에는 클립으로 묶은 서류가 들어 있었다. 그는 사진 한 장을 빼서 내게 보여주었다. "이 인물을 본 적 없어?" - P300
"마왕이야." 잔교에서 만났을 때 사야마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마왕의 자객은 아니겠지?" - P301
"여기 놓여 있는 걸 잘 봐둬." 나는 사진에 얼굴을 가져갔다. 사야마가 가리킨 것은 테이블에 놓인 작은 나무 상자였다. 마왕은 왼손으로 턱을 괴고 오른손을 상자에 대고 있었다. - P301
"이게 마왕의 카드 상자야. 이 작은 나무 상자가 바로 마왕이 부리는 ‘창조의 마술의 원천이거든. 말하자면 ‘마법의 지팡이‘ 라고 할까. 그 비밀을 밝히려고 학파는 지금까지 여러 밀정을마왕에게 보냈어. 그런데 모두 소식이 끊겼어. 내 전임자도 이 사진을 찍는 것까지는 성공했지만, 다시 눈에 보이지 않는 군도에 발을 들여놨다가 그 뒤로 소식이 없어." "・・・・・・ 두렵지 않습니까?" - P301
"관측소가 있는 이 섬은 세계가 끝나는 곳이야. 이 바다는 우리 세계와는 다른 원리를 따르고 있어. 무에서의 창조가 가능한 세계, 말하자면 ‘천지창조의 원점‘이지. 마왕만이 창조의 마술의 비밀을 알고 있어. 그 답을 얻기 위해서라면 목숨을 걸 가치가 있잖아?" - P302
그 젊은 여자 사진이었다. "이 사람은 마왕의 딸이야." - P302
"그날 밤 이 작업실에서 미쳐 날뛰는 폭풍 소리를 듣다가 나는 문득 깨달았어. 세계의 종말은 곧 세계의 시초이기도 하다. 이 폭풍이 지나가면 새로운 전개가 섬에 찾아들 게 틀림없다고말이야. 그랬더니 예상이 적중해서 날이 밝은 다음 앞바다에이상한 섬이 출현했지 뭐야. 나는 당장 보트를 타고 상륙해 봤어. 역시 그건 ‘창조‘된 섬이었어. 대체 이건 무슨 징조인 걸까 생각하는데………….." "제가 표류해 왔군요." "여기서부터 모든 게 시작된다. 그런 생각이 들었어." - P303
어두운 밀림을 지나온 눈에는 모든 게 별천지처럼 보였다. 왼편에 솟은 시커먼 바위땅과 오른편의 나무들에 파묻힌 곳 사이에 안긴 작은 후미는 신비적인 고요함을 지니고 있었다. 잔교를 걸어가니 발밑에서 파도가 찰싹거렸다. - P304
"걱정할 거 없어, 어차피 상식이 안 통하는 바다니까." "제발 호랑이로 변신하지는 말아주세요." "내가 변신하면 사양 말고 바다로 뛰어들라고." 다행히 사야마가 호랑이로 변신하지도, 보트가 파도에 뒤집혀 침몰하지도 않고 앞바다의 작은 섬에 상륙할 수 있었다. 보트를 모래사장으로 끌어올린 뒤 나는 섬을 한 바퀴 둘러봤다. 섬이라기보다 여울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 P305
"저는 정말 인간일까요?" "갑자기 무슨 소리야, 네모 군." "사야마 씨 이야기를 듣다 보니까 불안해져서 말이죠. 저는제가 누군지 기억을 못 합니다. 난파돼서 기억을 잊은 줄 알았거든요. 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닐지도 모르죠. 기억을 못 하는게 아니라 처음부터 과거가 없다면?" - P306
"눈에 보이지 않는 이유는 간단해." 사야마는 콧방귀를 뀌었다. "아직 존재하지 않으니까." "존재하지 않으면 상륙할 방법이 없잖습니까." "마왕은 마술로 그 섬들을 만들어 냈어. 우리는 마술의 구조를 몰라. 전임자가 여러 명 상륙했는데 내가 조사한 바로는 정해진 방법은 없더군." - P307
"마왕의 마술로 만들어졌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저는 인간이 아니라는 뜻이죠." "뭐, 가능성은 부정하지 않겠어. 하지만 인간일 가능성도 마찬가지로 있어. 적어도 같이 생활해 온 내가 보기엔 네모 군은충분히 인간으로 보이는데." "고맙습니다." - P306
"눈에 보이지 않는 이유는 간단해." 사야마는 콧방귀를 뀌었다. "아직 존재하지 않으니까." "존재하지 않으면 상륙할 방법이 없잖습니까." "마왕은 마술로 그 섬들을 만들어 냈어. 우리는 마술의 구조를 몰라. 전임자가 여러 명 상륙했는데 내가 조사한 바로는 정해진 방법은 없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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