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은 2층 건물로 녹색이 가미된 노란색으로 칠해졌고 정문으로올라가는 계단 위에 걸린 칙칙한 간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죽은 등산가, 정문 계단 옆으로 쌓인 눈 무더기에는구멍이 숭숭 나 있고 온갖 색상의 스키가 꽂혀 있었다. 세
울적한 느낌의 시선은나를 스쳐 지나 어딘가를 향해 있었고 슬픔에 찬 기색이 역력했다. 의심의 여지 없이 이 남자가 이 호텔은 물론이고 주위의 골짜기와 병목고개의 소유주인 알레크 스네바르였다. "저곳에서......" 그가 유난히 낮고 깊은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바로 저곳에서 그 일이 일어났습니다." - P10
"그 사람은 무슨 이유로 저곳으로 갔습니까?" 나는 무시무시한 수직 절벽을 응시하며 물었다. "잠시 지난날을 되돌아보아야겠군요." 주인장은 이렇게 말을 하며 고개를 갸웃한 채 코르크스크루를 쥔 주먹을머리카락이 없어 훤한 이마에 갖다 대었다. - P11
"역시 그 사람은 여기 벽난롯가에서 보낸 저녁들을 잊지 않았군요." "그 친구는 그 이야기밖에 안 합니다." 나는 이렇게 대답하며 다시 자동차로 몸을 돌렸다. 그러자 주인장이 내 손을 잡았다. - P11
"우선 제 소개를 하겠습니다." 그는 손톱으로 펜의 끄트머리를 긁어내는 데 집중한 채 말했다. "알레크 스네바르, 이 호텔의 주인이고 엔지니어지요. 병목고개 입구에 서있는 풍차들은 물론 보셨겠죠?" "그게 풍차였나요......?" - P12
"기억할 겁니다." 내게 주인이 말했다. "이제 기억이났나 보군요..... 자, 어디 보자..... 손님 방은 4호실입니다. 우리 호텔에서 제일 좋은 방이죠. 카이사, 이 짐을 가져다놓으렴. 저・・・・・・ 저......" - P13
"글렙스키 씨의 짐을 4호실로 가지고 가………… 놀랄 정도로 멍청하답니다." 카이사가자리를 뜨자 주인장은 어째서인지 자랑스러워하는 기색으로 내게 말했다. "어찌 보면정말 대단해요. ・・・・・ 자, 글렙스키 씨?" 그가 뭔가를 기대하듯 나를 바라보았다. "페테르 글렙스키." 내가 이름을 밝혔다. "경위입니다. 휴가 중이죠. 기간은 2주. 혼자 왔습니다." - P14
"여깁니다." 그가 처음처럼 나지막한 탁한 음성으로말했다. "들어가시죠." 그가 내 앞에서 문을 열어 주자 나는 들어갔다. "절대 잊지 못할 그 끔찍했던 날 이후로..." 그는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하더니 불쑥 말을 멈추었다. 그 방은 어딘지 음울해 보이기는 해도 나쁘지 않았다. 셰이드 커튼*이 반쯤 쳐져 있고 침대 위에는 영문 모를 등산용지팡이가 놓여 있었다.
*부드러운 천 패널로 된, 블라인드처럼 위에서 아래로 치고 여는 커튼. - P15
"이 방은" 주인장이 딱딱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벌써 6년 동안, 절대 잊지 못할 그 끔찍했던 날 이후로 모든 것이 그 사람이 자신의 마지막 등반에 나서기 전 두고간 그대로입니다......" 나는 담배 연기가 올라오는 파이프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 P16
"즈구트 경위가 말하기를" 잠시 입을 다물었던 주인장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자신은 전문 분야가 소위 말하는 금고털이라고 하더군요. 혹시 비밀이 아니라면, 손님은전문분야가 무엇이신지요?" 그가 내 앞의 4호실 문을 활짝 열었다. - P18
"스네바르 씨, 당신은 시인이시군요." 나는 더욱 영문을 몰라 이렇게 대꾸했다. - P19
나는 혼자였다. 은혜로운 하늘, 자애로우신 하느님, 마침내 저는 혼자가 되었습니다! 물론 나도 안다. 이런 말을 입에 담거나 심지어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그리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 P20
"뭘 좀 가져다드릴까요?" 카이사가 물었다. "좋아하시는 걸로?" 나는 카이사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다시 어깨를 으쓱하며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녀는 몸에 딱 달라붙는 알록달록한 원피스를 입고 자그마한 레이스 앞치마를둘렀는데, 원피스는 앞쪽도 뒤쪽도 잔뜩 부풀려져 있었다. - P21
"어떤 사람들이죠?" "음, 누구냐고요? 모제스 씨와 아내분이 머무르고 있어요. 1호실과 2호실요. 3호실도 써요. 그 방에서 지내지는않지만요. 그리고 따님도 있는 것 같아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굉장한 미인이에요.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을 정도죠....... - P22
"아무도 몰라요. 그냥 서 있기만 하거든요. 그리고 신문을 읽죠. 얼마 전에 듀 바른스토크르 씨의 실내용 슬리퍼를 슬쩍했고요. 안 찾아본 곳이 없을 정도로 찾아다녔는데슬리퍼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 뭐예요. 그런데 그 사람이박물관에 가져가서 거기에 뒀더라고요. 또 늘 흔적을 남겨요......" - P23
나는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한 재떨이에 담배를 눌러 끈후속옷을 가지러 침실로 향했다. 나는 괜히 가져왔다는 생각을 설핏 하며 머리맡에 놓인 작은 테이블에 책을 몇 권올려놓았다. - P24
그때 바로 옆에서 누군가 천천히 입을 크게 벌리며 하품을 했다. 침실에서 세인트버나드 렐이 발톱으로 바닥을긁는 소리를 내며 느릿느릿 나오더니 나를 보고 싱긋 웃으면서 몸을 쭉 뻗었다. "아하, 네가 여기서 담배를 피운 거냐?" 내가 물었다. 렐은 눈을 찡긋하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파리를 몰아내기라도 하듯이. - P25
제2장
눈에 남은 자국들로 보건대 호텔 투숙객 중 누군가가벌써 스키를 타고 걸어 보려고 한 모양이었다. 그 사람은발을 뗄 때마다 넘어지면서 50미터가량을 걸어간 후 되돌아왔는데, 올 때는 무릎걸음을 치듯 주저앉으며 스키와 폴을 안아 끌고 가다가 떨어트리고 다시 주웠다가 다시 떨어트리기를 반복했다. - P26
나는 스키가 잘 고정되었는지 확인하려고 제자리에서몇 번 뛰어본 후 함성을 지르면서 태양을 향해 달리기 시작하여 환한 햇살과 벅차오르는 가슴에 눈을 가늘게 뜨며점점 속도를 올렸다. - P26
이윽고 스키를 타자마자 찾아온 환희의 파도가 잦아들며 문득 정신을 차리니 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눈가루를 뒤집어써 온몸이 젖은 채 숨을 헐떡이면서 길가에 서 있었다. - P28
헬멧을 쓰지않고 달리다니 벌금 50크론과 한 달간의 면허정지군. 자동적으로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정작 나는 번호판도 제대로 못 봤다. - P29
이다지도 야만스러운 기계가 왜 필요할까. 다음 해에는 이곳이 ‘죽은 바이커‘ 호텔로 불리게 될지도 모르겠다 - P29
내가 문을 닫고 들어가자 길쭉한 남자가 입을 다물고나를 돌아보았다. 그는 나비넥타이를 맸고 아래로 축 늘어진귀족적인 양쪽 볼살과 그에 못지않게 귀족적인 보기 드문 코를 한 고매한 용모의 소유자였다. - P30
그가 대답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나는 우리 경찰 관료답지 않은 바보 같은 어색함을 느끼면서 자기소개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한눈에 척 봐도그는 소득을 은폐하지 않을 리 없으며 세금 신고서를 애매하게 작성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 P31
"스키를 몹시 능숙하게 타시더군요, 글렙스키 씨." 듀바른스토크르가 불쑥 말했다. "창문으로 당신을 봤습니다. 진심으로 즐겁게 봤다는 말씀을 드려야겠군요." "과찬이십니다." 내가 웅얼거렸다. "예전에 좀 탔...... 죠. - P32
"우리 때문에 많이 놀라셨죠?" 그가 쉰 목소리로 물었다. "아까 길에서.. 39 "우리라고?" 내가 되물었다. "오, 우리가 아니죠, 당연히, 부케팔로스 말이에요. 부케팔로스가 그런 짓을 잘하거든요. 이분 고글을 눈 범벅으로 만들어 버렸어요." - P33
나는 이 두 사람에게서 벗어날 수 있어 후련했다. 그자리가 영 불편했다. 마음의 준비도 없이 덜컥 마주치지 않았는가. 무릇 무대에 선 유명한 마술사의 공연을 보는 것은즐겁지만, 사적인 시간을 보내는 유명한 마술사와 만나는일은 별개의 문제다. - P34
나는 거울 앞에 서서 머리를 빗고 이런저런 표정을 지어 보았다. 이를테면 순진하게 친절한 관심을 보이는 표정이라든지 전문직 종사자다운 강직하고 침착한 모습, 열린마음으로 누구와도 친분을 맺으려 어색하게 미소를 짓는모습 등을 말이다. - P35
"편히 쉬어." 내가 이렇게 말한 후 우리는 악수를 나누 "사실 저는 물리학자입니다." 그가 내게 말했다. "하지만 ‘인공두뇌부대 소속‘이라고 하면 ‘보병‘이라는 소개만큼근사하게 들리지 않습니까. 재미있어지죠." - P36
"이곳에는 재충전을 위해서 왔습니다. 과로했거든요. ‘미다스‘ 프로젝트라고 들어 보셨습니까? 철저하게 기밀로 유지되고 있죠. 휴가도 없이 꼬박 4년을 매달렸어요. 그랬더니 결국 의사들이 감각을 만족시킬 치료 과정을 처방해 주더라고요." - P37
식탁에는 듀 바른스토크르와 그의 죽은 형제의 혈육이 벌써 와 있었다. 듀 바른스토크르는 맑은 수프를 은제숟가락으로 우아하게 저으며 나무라는 눈빛으로 조카를곁눈질했다. 그도 그럴 것이 브륜은 식탁을 팔꿈치로 짚은채채소 수프를 허겁지겁 먹고 있었던 것이다. - 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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