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토머스 핀천의 중요성

토머스 핀천의 「제49호 품목의 경매』는 진보주의 운동이 한창이던 1960년대 미국 대학생들을 매료시켰던 대표적인 소설이다.  - P245

『제49호 품목의 경매』가 발표된 후, 미국 대학생들 사이에서는 이 작품을 들고 다니거나 책상과 화장실에 약음기가 달린 나팔을 그리는 것이 유행이었다. 『제49호 품목의경매』에서 이 기호는 소외 계층의 억눌린 목소리와 세계의 파멸을 경고하는 상징이다. 학생들은 이 소설을 모방해 벽에 W.A.S.T. E. 라는 낙서를 하기도 했는데, 이는 ‘우리는 조용한 트리스테로 제국을 기다린다. (We Await SilentTristero‘s Empire.)‘라는 뜻이다. - P246

핀천은 현대사회를 인간사이의 교류가 단절되어 엔트로피가 극에 달한 닫힌 체계로 보고, 파멸을 피하기 위해서는 열린 체계로 전환해야한다고 주장한다. 핀천은 인간 교류가 단절된 이유를 이것아니면 저것(either/or)의 이분법적 선택을 강요하는 닫힌사회의 풍토 때문이라고 보고, 이것과 저것(both/and) 모두를 허용하는 열린 사회의 건설을 주창한다. (핀천은 이 소설에서 산업자본주의와 마르크스주의 둘 다 엄습해 오는 공포일뿐이라고 말하면서 양극을 피할 것을 권고하는데, 이는 이분법적 가치판단을 유보하는 포스트모던적 인식의 표출이다.) - P246

「제49호 품목의 경매』는 트리스테로*라는 단어를 유행시키기도 했다. 슬픔과 비밀을 뜻하는 이 단어는 소설이 나온 이후, 지배 문화에서 소외당하고 상속권을 박탈당한 계층을 지칭하는 대명사가 되었다.

*원서에는 Trystero (트라이스테로) 또는 Tristero (트리스테로)로 표기되어 있다. 본서에서는 ‘제3의 가능성‘ 이라는 의미와 ‘슬픔‘을 뜻하는프랑스어 및 이탈리아어를 살려 트리스테로로 옮긴다. - P247

 『제49호 품목의 경매』의 주인공 에디파 역시 자신이몸담고 있는 미국 사회가 외부 세계와 교류하지 않는 닫힌체계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녀는 빈민, 병든 선원, 흑인여자, 용접공, 야경꾼, 동성애자, 창녀와의 만남을 통해이 세상에는 공식적인 아메리칸 드림에서 소외된 계층이있음을 알게 된다. - P247

열역학 제2법칙인 엔트로피이론에 의하면, 외부 세계와 교류하지 않는 닫힌 체계는 모든 것이 동질화되어 운동이 정지되고 결국 파멸하게 된다.
원래 공학을 전공했고 보잉사에서도 근무했던 핀천은이렇듯 과학 이론을 소설에 도입하여 적절한 은유로 사용하며 뛰어난 통찰력을 보여 준다. - P248

핀천은 또한 이 소설에서 컴퓨터의 기본 조합인 0과 1의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 0과 1 사이의 또 다른 가능성에 주목해, 제3의선택을 탐색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시대를 앞서 가는 선구자적 모습을 보이고 있다. - P248

2 열림과 닫힘의 모티프

토머스 핀천의 소설 『제49호 품목의 경매』는 다층적 의미를 지닌 특이한 텍스트라 할 수 있다. 예컨대 이 소설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요 명제들, 즉 중심과 주변, 정통과비정통성, 진실과 허위, 다양성과 획일성, 포용과 배제.
보수주의와 진보주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원본의 부재,
이분법의 타파, 커뮤니케이션 이론, 엔트로피 이론, 과거로의 여행 모티프 등 거의 모든 측면에서 접근이 가능한작품이다. - P249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에서 열림과 닫힘의 모티프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띤다. 우선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의 작가들은 모더니즘 소설을 ‘닫힌 결말을 지닌 닫힌 소설‘로 파악하고,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의 특징을 ‘열린 결말을 지닌열린 소설‘로 생각한다. 열린 결말을 지닌 열린 소설이란,
작품의 결론을 유보하거나 아예 아무런 결론도 제시하지않고 끝나는 텍스트를 지칭한다. - P249

중심보다는 주변을, 전통보다는 혁신을, 획일성보다는다양성을, 단성보다는 다성을 절대보다는 상대를 억압보다는 해방을 추구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은 기본적으로 열림의 미학을 지향한다. 그러므로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에서닫힘은 곧 죽음을, 열림은 곧 삶을 의미한다. - P250

토머스 핀천은 열림과 닫힘의 미학을 탐색한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의 대표적인 작가이다. 그는 특히 두 번째 소설인 「제49호 품목의 경매』에서열림과 닫힘에 대한 성찰을 다각도로 시도하며, 그 과정에서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가장 시급한 문제점이 무엇인가를 첨예하고 정치하게 제시하고 있다. - P250

3. 여성적 원리와 열림의 미학

. 남성 작가의 작품 속에서 주인공이 여자인 경우가드물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핀천은 왜 여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웠을까? - P251

여성은 새로운 생명을 배태하고 탄생시킬 수 있는, 남성에게는 없는 능력과 가능성이 있는 존재이다. 가임 능력이있는 여성은 생리 현상을 겪는다. 그리고 생리 기간에는 임신이 되지 않는다. - P251

에디파(Oedipa)라는 이름은 물론 테베의 눈먼 왕 오이디푸스(Oedipus)의 여성 이름이다. 그것은 곧 에디파 역시눈은 있으나 보지는 못함을 의미한다.  - P251

 에디파를 자아의 탑에 가둔 외부의 사악한 마술은 나중에 1950년대의 반공 이데올로기와 냉전 이데올로기가 초래한 이분법적 가치관과배타주의로 밝혀진다. 중요한 것은, 핀천이 ‘여성적 영민함과 두려움‘을 통해 그 실체를 탐색할 수 있다고 본다는 점이다. - P252

 영국의 저명한 비평가 프랭크 커모드는 터퍼웨어파티가 경매와 더불어, 슈퍼마켓이나 백화점을 통한 정규상행위가 아닌 비정규 상행위임을 지적한다. 그렇다면 터퍼웨어 파티나 경매는 이 소설이 주요한 소재로 삼고 있는소외된 자들의 은밀한 비공식적 모임을 상징할 수도 있다. - P252

제2장에서 에디파는 샌나르시소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잠시 차를 세우고 도시의 전경을 내려다본다. 그녀에게 샌나르시소는 마치 덮개를 열어 놓은 트랜지스터라디오의 질서 정연한 폐쇄 회로처럼 보인다. - P253

 도시 이름에 들어 있는 ‘나르시소‘는 자신의 이미지안에 유폐되어 살다가 죽은 그리스 신화의 나르시소스를가리킨다. 그렇다면 나르시소스 역시 닫힌 체계 속에서 살다가 죽은 자라 할 수 있다. - P253

 텔레비전에서는 마침 메츠거가 어린 시절 배우로 출연했던 영화가 방영되는데, 메츠거는 역사적인 사실을 들어 영화 내용 중 틀린 부분을 에디파에게 지적해 준다. 메츠거와 만나면서 에디파는 사실이라고 알려진 것들을 회의하는 것이 중요함을 깨닫는다. - P254

인식의 근원이 흔들리는 새로운 경험에 에디파는 점점더 불안해진다. 그때 메츠거는 에디파에게 텔레비전에서나오는 내용을 제대로 맞추지 못하면 하나씩 옷을 벗는 스트립 보티첼리라는 게임을 하자고 제안한다. - P254

4 절대적 진리의 해체

제3장에 들어서면서 에디파는 일련의 이상한 경험을 겪는다. 메츠거와 같이 간 스코프라는 술집에서 그녀는 마이크 펄로피언이라는 기이한 남자를 만나고, 이상한 지하우편제도를 통해 사람들이 편지를 주고받는 것을 목격한다. - P255

 나중에 에디파는 다만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배웠기때문에 미합중국 우편제도를 사용해 왔다고 말한다. 그녀는 그동안 지배 문화의 교육과 제도 및 관습에 세뇌되었던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
자신이 진리로 알아 온 것 외에 또 다른 세계가 있을 수도있다는 사실을 배운다. - P255

 에디파는 술집의 화장실에서 약음기가 달린 이상한 나팔 그림* 낙서를 발견하는데, 그 나팔은 트리스테로라는 지하 우편제도의 상징이다.

*약음기가 달린 나팔은, 억압받고 침묵당한 소외 계층의 목소리, 세상의 멸망을 지연시키는 행동 및 유보 상태, 각 시대 지배 문화에 의해 주변부로 밀려난 피지배 문화의 목소리 등으로 해석할 수 있다. - P256

그러나 드리블레트는 원본은 이미 사라졌으며,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은 헌책방에서 구입한 보급판을 다시 복사한 것이라고 말한다. 핀천은 이를 통해 절대적 진리로서의 원본은 없음을 은유적으로 보여 준다.** 에디파는 「전령의 비극」에는 원본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수많은 복사본들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 움베르토 에코는『장미의 이름』의 서문에서 자신의 소설이 삼중 번역본이라고 주장하는데, 이 또한 원본에 못지않은 번역본의 중요성과가치를 알리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 P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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