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드프로세서에
가장 쓰고 싶은 것부터 입력하기 - P89

사실 나는 누가 소설 쓰기에 대해 조언을 구해오면 자신 있게 답하지 못하는 편이다. 그러면서도 굳이 뭐라도 하나 이야기해야 한다면 들려주는 것이 바로 지금부터 이야기할 방법이다. - P89

이 방법은 간단하다. 가장 쓰고 싶은 장면부터 쓰는 것이다. 가장 좋은 장면, 재밌을 것 같은 장면, 제일 재미있는절정이 될 것 같은 장면, 이 이야기를 쓰면서 제일 신날 것같은 장면을 그 무엇보다 먼저 쓰는 것이다. 제일 재미있는장면일 거라고 내가 마음에 두고 있는 장면을 먼저 들이밀면 일단 시작이 재미있어질 가능성이 크다.  - P90

그런 이유 때문에 이 방법은 한 세대 전만 해도 쉽게 써먹기 어려웠다. 재미있는 장면부터 바로 써내리고 싶어도 한계가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그 한계를 끝낼 수있는 도구가 있다. 바로 컴퓨터와 워드프로세서다. - P90

 펄럭거리는 원고지 사이에 복잡하게 수정을 위한 기호를 까맣게 쓰거나, 수백장을 뒤적이며 페이지를 맞추려 헤맬 필요가 없다. 그냥 화면 위에서 깜빡거리는 좁다란 까만 네모를 움직여서 글을 더끼워 넣고 싶은 데에 옮기고, 더 써넣어야 할 내용을 나중에 더 써넣으면 끝이다. - P91

그러나 배경에 대한 내용만 너무 자세히 짜다 보면 그만 진이 빠져서 정작 본론은 제대로 쓰지도 못하게 될 수도있다. 게다가 배경을 짜면서 재미있어 보이는 것과 막상 이야기를 펼쳐나갈 때 적합한 것은 다를 때가 많다. 배경을 짜면서 어렴풋이 떠올렸을 때는 신기하고 재미있고 독창적인 이야기가 쏟아질 것 같았는데 막상 글을 써보면 이야기가 답답하게 갇혀버리는 예는 적지 않다. - P92

소설을 쓰거나 읽다 보면 ‘다음 대목부터 점점 더 재밌어질 텐데 여기는 좀 지루하네‘ 싶은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 부분을 꾹 참고 버티면서 이제 조금만 버티면 재밌어진다. 재밌어지겠지, 그러고 있지 말고 일단 다 뛰어넘는 것이다. 안 될 것은 없다. 우리에게는 워드프로세서가 있다. - P94

제일 쓰고 싶은 장면은 대체로 제일 중요한 장면이거나적어도 무척 아끼는 장면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장면을 잘써야 하고, 그 장면이 멋져야 하고, 그 장면의 비중이 커야한다. 그런데 그 대목이 절정 장면이라고 해서 나중으로 미뤄두면 그 대목을 쏠 즈음에는 글 쓰는 사람이 힘이 빠져 있을 수가 있다. - P96

그러다 보면 긴 시간 글을 쓰다가 마침내 제일 쓰고 싶었던 장면을 쓸 때가 왔는데, 원래 상상했던 것에 비해 형편없는 것을 쓰게 될지도 모른다. 가장 쓰고 싶었던 장면을 쓰고 있는데, 처음의 구상은 다 사라지고 어찌 됐건 어서 글을끝내자는 생각만 가득 차서 대충대충 엉성하게 때워나갈 수도 있다. - P96

소설이 아니라 다른 글을 쓸 때에도 마찬가지다. 자기소개서를 쓴다면 어떤 부모에게서 태어나 어떻게 학교를 다니며 자랐는지 차례대로 장황하게 쓰기 전에, 왜 내가 이 직장에 적합한 사람인지 핵심부터 쓰는 것이다. - P97

일기를 쓸 때도 오늘 아침에 몇 시에 일어나서 아침으로 뭘 먹었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하기보다는 저녁때 만난 친구와 왜 싸웠는지부터 쓴다.  - P97

가장 쓰고 싶은 이야기를 먼저 쓰고 나면 그 앞부분에끼워 넣어야 하는 이야기는 자연히 간략해진다. 이미 가장쓰고 싶은 부분을 써버렸는데 그 앞에 벌어지는 일들은 굳이 주절주절 설명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든다.  - P98

게다가 일단 이야기의 핵심을 먼저 쓰고 보면 이야기를쓰기 전에 막연히 상상했던 것과 다른 느낌이 들 것이다. 구체적인 글을 눈으로 보고 나면 이야기의 구조를 좀 더 냉철하게 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기가 막힌 것은, 그렇게 돌아보면 생각보다 절정 장면 전에 꼭 늘어놓아야 하는 다른 이야기가 많지 않다는 것을 깨달을 때가 있다는 점이다. - P98

강렬한 첫 장면에 매달리는 작가들

‘제일 쓰고 싶은 것부터 쓰기‘ 방법을 쓸 때 조금 더 과감해진다면 아예 앞부분을 다 쳐내버리고 가장 짜릿한 절정 대목부터 들입다 시작하는 방법도 있다. - P100

가장 재미있는 부분을 앞쪽으로 확 끌어내면서 뒷이야기를 상상해가는 것은 더 신선한 이야기를 떠올릴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나는 단편집 『토끼의 아리아』에 실린 「로봇복지법위반에서 버려진 로봇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었다. 그런데 로봇이 버려지기 전과 버려진 후에 어떻게 신세가 달라지는지설명하면서 시작하는 대신, 로봇이 이미 버려진 상태에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 P101

만약 앞으로 끌어다 쓴 절정 장면 이후 이야깃거리가충분히 떠오르지 않는다면 일단 앞에다 관심을 끄는 재미난장면을 뿌려놓고, 이어서 회상 장면으로 앞선 이야기를 설명하는 방법을 쓸 수도 있다.

다만 회상 장면을 활용하는 방법이 요즘 너무 많이 쓰이고 있다는 점은 문제다. 1940, 1950년대 할리우드 누아르영화를 보면 터프가이 남자 주인공이 과거를 돌아보면서 진행하는 경우가 대단히 많았다. <이중 배상>, <선셋 대로>,
<DOA>, <살인 전화>, <과거로부터>, <킬러스>를 비롯한 하고 많은 영화가 그렇고, 굳이 말하자면 <카사블랑카>조차도 회상장면을 나중에 집어넣는 방식을 꽤 짭짤하게 쓰고 있다. - P103

그러니 가장 재미있고 쓰고 싶은 장면부터 먼저 쓴다는이 방법의 핵심은 완성된 글에서 재미있는 장면이 맨 먼저나와야 한다는 것이라기보다는 쓰는 과정에서 재미있는 장면을 먼저 쓴다는 것이다. - P104

비밀 이야기의 네 가지 종류 - P113

첫 번째는 어떤 비밀을 주인공도 모르고 독자도 모르는형태다. 이런 이야기의 대표적인 사례는 수수께끼를 찾는 탐험, 모험 이야기나 일반적인 추리소설이다. - P113

두 번째는 어떤 비밀을 주인공은 알지만 독자는 모르는형태다. 이런 이야기는 특이한 인물인 주인공을 등장시키고약간 떨어진 거리에서 그 인물을 관찰하는 형태가 흔하다. - P114

세 번째는 어떤 비밀을 주인공도 알고 독자도 아는 형태다. 이런 이야기는 보통 비밀을 숨기려고 하거나 비밀을 폭로하기 위해 애쓰는 이야기인 경우가 많다. 추리소설 중에는 시작하면서 범인이 누구고 어떻게 범죄를 저질렀는지 밝힌 상태에서 탐정이 어떻게 범인을 추적하는지를 보여주는 방식을 쓰는 경우가 있다. - P115

네 번째는 어떤 비밀을 주인공은 모르지만 독자는 아는 형태다. 이런 이야기에서는 비밀을 아는 독자는 모든 상황을이해하고 있지만, 비밀을 모르는 등장인물들은 엉뚱한 행동을 하거나 오해하는 것을 보여주곤 한다. - P116

네 가지 비밀 이야기의 형태 중에 하나를 고르자면 나는 네 번째 형태, 그러니까 어떤 비밀을 독자는 아는데 주인공은 모르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이런 이야기에서 독자는 모든 사실을 아는 입장이 되어 이야기를 지켜보면서 그런 사실을 모르는 한 명 한 명의 인물이 어떻게 버둥거리는지 지켜 보게 된다. - P117

현실에서는 그렇게 다른 사람의 마음과 미래까지 다아는 상황에서 한 사람의 인생을 볼 수가 없다. 현실을 이런 형태로 다루려면 몰랐던 비밀이 밝혀진 상황에서 과거의 사건을 소설처럼 극화해서 생각해야 한다. - P117

살인 현장을 무심히 목격하는
모기의 시점이 되어본다 - P51

가장 흔한 방법은 이런 것이다. 깊은 산속에 들어간 어떤 사람이 멧돼지를 만나서 겨우겨우 도망쳤다는 기사를 보았다고 해보자. 이때 내가 만약 산에서 멧돼지를 만난다면어떻게 할지 상상해본다. - P51

이처럼 실화를 옮길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남이 겪은 일을 내 이야기로 옮기는 작업이 도덕적으로 옳은지 살펴보는것이다. 그 사건을 겪은 사람은 억울한 일의 희생자일 수도있고, 그 사건 때문에 깊은 고통에 시달릴 수도 있다. - P52

한편으로 내가 직접 겪은 일을 소재로 쓸 때는 그렇게해서 좋은 이야기가 될 수 있을지 냉정하게 돌아봐야 한다.
내가 내 일에 관해 쓸 때는 객관적인 입장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구질구질한 변명이나 넋두리나 늘어놓는 글이 될가능성도 높고, 사건 속의 선행과 악행, 선인과 악인 구도도더 재미있는 방향으로 마음껏 나아가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 P53

또는 사연 속의 핵심 인물이 아니라 주변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거나 내 입장에 가까운 인물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풀어가면서 색다른 시각을 잡아보는 방법도 있다. 이 방법으로 이야기는 조금 더 객관적으로 바뀔수 있고, 좀 더 흥미를 끄는 시각을 잡아챌 수도 있다. - P54

색다른 시각으로 이야기를쓰려면 색다른 시각이라고 광고하는 다른 영화나 소설의 시각을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색다른 시각이어야 한다. 나는 살인사건 현장을 무심히 목격하는 모기의 시점에서 사건을 서술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살인범이 철저하게핏자국을 지워서 증거를 없앴지만 그 피를 마신 모기를 없애지는 못했고, 나중에 경찰이 수사할 때 그 모기가 잡히는 바람에 모기 배 속의 피가 증거가 된다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 P54

다른 이야기를 가져와서 ‘나라면 이렇게 했을 텐데‘ 방법을 쓸 때 유의할 점은 원래 이야기 속 인물이 그 선택을 한것에 대해서도 충분히 고민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왜 원래이야기 속 주인공은 내 생각과 다르게 행동했을까? - P56

일기를 써야 하는데 쓸 것이 없다면 오늘 있었던 일 중에서 그나마 기억에 남는 장면을 하나 떠올려보고, 거기에
‘나라면 이렇게 했을 텐데‘ 상상을 연결하는 것이 가장 쉬운방법이다. 예를 들어, 오늘 출근길에 교통 체증이 너무 심해서 괴롭고 고생한 기억이 있다면 ‘내가 시장이라면, 내가 국토교통부 장관이라면 이렇게 이렇게 해서 교통 체증을 해소할 텐데‘ 하는 생각을 써보는 것이다 - P58

심지어 공식적인 보고서 같은 것을 쓸 때에도, 종종 ‘나라면 이렇게 했을 텐데‘를 생각해서 내용에 반영해보는 것은내용에 개성과 핵심을 넣는 데 도움이 된다고 믿는다. 회사에서 벌어진 일에 대한 보고서를 쓰면서 ‘내가 사장이라면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렇게 할 텐데‘라는 생각을 해보며 떠오르는 생각을 보고서에 담는 것이다. - P59

다만 세상을 살다 보면 보고서를 만드는 목적이 무언가를 실제로 보고하는 것이 아닌 때도 있다. 그냥 보고서를 만드는 것이 ‘해야 할 일‘에 들어 있기 때문에 그저 보고서를만드는 때도 가끔은 있다. 이렇게 보고서를 위한 보고서를만드는 것이 오늘의 일이라면 깊은 생각과 자유로운 상상보다는 텅 빈 마음과 얇은 영혼이 더 유용하기 마련이다. - P60

아름다운 표현과 그렇지 않은 표현 - P157

나는 아름다운 글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아름다운 글을 보고 충분히 스스로 감동해보기 전에는 아름다운 글이 무엇인지 알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 P157

그런데 현실에서 막상 이런 방법을 쓰려고 하면 문제가생긴다. 가장 큰 어려움은 아름다운 표현에 대한 기준이 저마다 다르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과연 어떤 것이 아름다운 글이냐 하는 기준을 잡기가 쉽지 않다. - P158

 인기만을 노리고 그저 그런 글을 쓰는 작가라는 평을 받던 사람이 돈을 많이 벌고 시간이 지나면 갑자기 소설계의 거장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 일도 있고, 동료들로부터 어쭙잖은 감상으로 치렁치렁 아름다운 단어만 갖다 붙인다고 조롱받던 사람도 그럴 듯한 문학상을 받고 나면 갑자기 언어를 갈고닦는 데 뛰어나다며 칭송을 듣기도 한다. - P158

1970년대를 살던 사람들이 아름다운 것과 그렇지 않은것에 대해 지금과 완전히 다른 감각을 갖고 있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 시대에도 박경리나 박완서 같은 작가들은 <광녀>의 대사와는 비교할 수 없이 멋진 글을 썼다. - P160

그나마 내 글을 맡고 있는 편집자가 해주는 충고는 좀더 유용하다. 특히 내가 쓰려고 하는 내용을 좋아하고 내 글에서 장점을 발견한 노련한 편집자라면 글을 쓰는 데 여러모로 도움이 될 때가 많다. 그런 편집자를 만났다는 것부터가 행운이다. - P160

결국 아름다운 글을 쓰기 위해서는 자기가 생각하는 멋진 글의 모습을 마음속에 담고 그 기준에 맞추려고 노력해야한다. 꼭 남에게 좋은 평을 받는 글이 나에게 아름다운 글이되는 것은 아니다. 꼭 무슨 법칙처럼 따라야 할 조건이 있는것도 아니다. - P161

나는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소설 첫머리에 "여름 장이란 애시당초에 글러서"라는 리듬감 있는 말로 시작해서 장터의 풍경을 열거하며 묘사하는 도입부는 매우 멋지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여름철 더운 날씨의 읍내 풍경과 시끌벅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더위에 진이 빠져 있는 느낌을, 마치 직접 느끼는 것처럼 전해주는 대목이 또 어디 있을까. - P162

자세하게 그려라 - P164

자세한 상황을 기억해내고 그것을 상세하게 풀어놓는 과정에서 남들이 쉽게 포착하지 못했지만 공감할 수 있는요소를 잡아낼 수 있을 것이고, 쉽게 지나칠 만한 내용을 붙들어서 독특한 아름다움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 P164

그러니 중요한 대목이라면 그냥 한마디로 치고 지나갈장면이라도 최대한 세세하게 그 순간에 대한 느낌을 많이 전달하면 된다. 그 순간에 내가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들었고,
어떤 냄새가 났고, 무엇을 생각했는지 쓰는 것이다.  - P165

분식집을 보며 잠깐 머릿속으로 만약 분식집에 가면 무엇을 먹을지 상상했다. 그 분식집 떡볶이는 심하게 맵다는것을 떠올리고 떡볶이는 먹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어묵 하나와 튀김 몇 개 정도를 먹는 것은 어떨까. 그런데 빨간색만 갖다 붙인 좁은 분식집의 치장이 왠지 과격해 보이고 아무래도 별로 좋은 음식을 만드는 것 같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 P166

(전략), 지나친 다음에는 말끔히 잊었는지 아니면 미련이 남았는지, 무슨 냄새가났는지, 버스를 타고 가느냐 걸어가느냐의 고민은 어떻게됐는지, 그것이 서로 관련은 있었는지, 내 인생에서 그런 결정들은 내 성격과 과거나 미래를 얼마나 나타내는지, 순간에 대한 묘사는 더더욱 상세해질 수 있다. - P168

만약 다이어트에 대한 글을 쓴다거나 내 의지와 식성에관한 글을 쓴다면 이런 내용 대부분을 살려서 쓰면 된다. 분식집이나 가게가 행인을 끌어들이는 방식에 대한 글을 쓰는중이었다면 거기에 대한 내용만 살려서 쓰면 된다. - P168

모든 문장을 한 가지 좋은 기술로 열심히 매만진 것이아름다운 글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름다운 글은 대체로 필요할 때마다 어울리는 방법과 분량을 적용한 것이다.
이야기 전체를 뒤흔드는 충격적인 내용이라고 하더라도, 아무런 꾸밈없는 짤막한 한마디로 던질 때 더 서늘하고비정한 느낌이 살아서 마음에 오래 남기도 한다. - 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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