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는 에마가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하는 한편, 예전에는 그녀를 볼 때마다 얼마나 달콤하고 몽롱하고 뜨거운 느낌이었는지 떠올리고는 우울해했다. 정말 그랬다. 전에는 모든 것이 전혀 달랐다. 훨씬 더 아름다웠고, 훨씬 더 즐거웠으며, 활력도 훨씬 넘쳤다! - P156
(전략), 저녁이면 나숄트네 집 현관에 앉아 리제가 들려주는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귀 기울였고, 가리발디라고불리던 이웃 노인 그로스요한이 살인강도인 줄 알고 한참 동안 이런저런 상상을 하기도 했다. 그때는 일 년 내내 매달 무언가에 빠져 지냈다. 때로는 풀 베는 일에, 때로는 클로버 수집에그러다 다시 낚시나 가재잡이에 빠져 지냈다가 홉 수확철, 자두 수확철, 감자 굽는 철, 타작철이 오기를 기다렸으며, 중간중간 찾아오는 일요일과 축제일을 고대했었다. - P157
이제 그 모든 것은 사라져버렸다 사라졌다는 것을 알아채지도 못하는 사이 끝나버렸다. 처음에는 리제 곁에서 보내던 저녁 시간이 다음에는 일요일 오전의 금붕어잡이 놀이가 사라졌고, 그리고 동화책 읽는 시간이, 홉 수확과 정원의 물레방아가 차례로 사라졌다. 아, 전부 어디로 가버린 걸까? - P157
억압받고 기만당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은 오랫동안 갇혀 있던샘물처럼 끊임없이 샘솟았다. 한스는 기억 하나하나에서 그 시절에 실제로 느꼈던 것만큼 뜨거움과 열정을 경험했다. - P158
오래된 돌다리 근처 한스의 집은 매우 다른 모습의 두 길이만나는 모퉁이에 있었다. 두 길 중 한스의 집이 속한 길은 마을에서 가장 길고 넓은 중심 거리인 게르버 거리였다. - P158
게르버 거리에는 관청 건물이 전혀 없었지만 웅장한 문이 달린 오래된 건물과 새로 지은 저택들, 아름답고 고풍스러운 목조 가옥들, 호감을 주는 밝은 박공지붕들을볼 수 있었다. 집들이 거리 한쪽에만 늘어서 있고 맞은편에는통나무 울타리 아래로 강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에 친근하고 쾌적하며 밝은 느낌을 주었다. 게르버 거리가 길고 넓은 데다 밝고 웅장하며 고상했다면 매의 골목은 정반대였다. - P159
갓 학교에 입학했을 무렵 한스는 매의 골목을 자주 드나들었다. 그는 남루한 차림의 불량한 금발 소년 무리와 함께 그 골목에서 유명했던 로테 프로뮐러가 들려주는 살인 이야기를 듣곤 했다. 로테는 작은 여관 주인과 함께 살다가 이혼하고 오년간 감옥살이를 했던 여자였다. 젊은 시절에는 대단한 미인으로 많은 공장 노동자들을 애인으로 두고 있어서 그녀를 놓고 갖은 추문과 칼부림이 일어났다고 한다. - P160
여덟 살 소년 한스는 그곳에서 핑켄바인 형제를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엄하게 금지했는데도 한스는 그 형제와 일 년가량 우정을 맺었다. 두 형제의 이름은 돌프와 에밀이었다. 골목소년들 중 가장 약아빠진 그들은 과일을 훔치거나 숲에서 소소한 불범행위를 저질러 유명해졌다. - P160
매의 골목 아이들 중 한스가 가장 가깝게 지낸 아이는 헤르만 레히텐하일이었다. 고아인 레히텐하일은 몸이 약했지만 또래보다 조숙했고 독특한 면이 있었다. 그 아이는 한쪽 다리가짧아 목발을 짚고 다녔기 때문에 골목 소년들의 놀이에 끼지못했다. 매우 야위고 턱이 유난히 뾰족했으며, 아이답지 않게 말수가 적었고 창백하고 고통 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 P161
핑켄바인 형제는 한스와 한차례 다투고 나서는 더 이상 어울리지 않은 반면, 말이 없던 절름발이 레히텐하일은 싸우지도 않았는데 한스를 떠나갔다. 그는 2월의 어느 날 옷가지가 걸쳐진 의자에 목발을 기대놓은 채 작고 초라한 침대에 누워 있다가 갑자기 열이 올라 그대로 조용히 세상을 떠나버렸다. 매의 골목에서레히텐하일은 금방 잊혀졌지만 한스는 그 친구와의 좋은 기억을 오래도록 간직했다. - P162
오래된 시골 학교의 엄격한 교사의 아들이었던 포르슈는 성경의 절반을 외우고, 수많은 격언과 도덕적인 잠언도 외우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지식이나 하얗게 세버린 머리에도 불구하고 여자들 앞에서는 난봉꾼처럼 굴었으며 툭하면 술독에 빠졌다. 조금 취한 상태가 되면 기벤라트의집 모퉁이 길가에 있는 돌 위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며 격언을 퍼붓곤 했다. - P163
열쇠 수리공 브렌들레 역시 사업이 망하고 방치된 작업장까지 엉망진창이 되자이 골목에 들어와 살게 되었다. 그는 반나절 내내 작은 창가에앉아 활기찬 골목을 불길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다 종종남루한 차림으로 지저분하게 돌아다니는 이웃집 어린아이를발견하면 귀와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고 온몸에 파란 멍이 들도록 꼬집고 괴롭히면서 굉장히 고소해했다. - P164
힘이 세고 무뚝뚝한 공장장은 왠 지식인종 같아서 무서운 존재였다. 이 무시무시한 건물에서 요정처럼 이리저리 다녔던 리제는 모든 아이들과 새와 고양이와개들의 보호자이자 어머니였다. 인정이 가득한 그녀는 동화 이야기와 노래 가사도 많이 알고 있었다. 오래전에 멀어진 이 세계에서 한스는 어린 시절의 기억과 꿈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 P165
한스는 몇 번이고 다시 매의 골목을 찾아갔었다. 그곳에서 정겨운 어스름과 익숙한 악취, 예전과 똑같은 모퉁이와 빛이 들지 않는 계단을 발견했다. 여전히 문간에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남자들과 여자들이 앉아 있었고, 지저분한 금발꼬마들이 소리 지르며 날뛰고 있었다. 기계공 포르슈는 늙을 대로 늙어서 한스를 알아보지 못했고, 한스가 머뭇거리며 인사하자 경멸하듯 신경질을 냈다. - P166
굽은 계단과 돌이 깔린 문간을 지나 어두운 계단을 더듬어올라가 창고에 이르렀다. 창고에는 잘 펴서 걸어놓은 가죽들이 있었다. 지독한 가죽 냄새와 함께 자욱한 기억의 연기가 갑자기 솟아올랐다. - P166
어스름이 깔린 가죽 공장 뜰에 평화가 넘실거렸다. 담 너머로 희미하게 철썩대는 강물 소리 외에는 서걱서걱 감자 깎는소리와 리제의 이야기 소리만이 들려왔다. 아이들은 조용히 웅크리고 앉아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리제는 성 크리스토포루스(그리스도를 짊어진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 천주교 성인의 이름, 사람들을 몸에 태워 강을 건네주는 일을 했는데 하루는 어린아이를 건네주다가 너무 무거워 넘어졌다고 한다. 알고 보니 그 아이는 세상의짐을 모두 짊어진 예수 그리스도였다-옮긴이) 이야기를 들려주며 밤에 어린아이 목소리가 강 건너편에서 성 크리스토포루스를 불렀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 P167
6장
의사는 물약과 간유, 계란과 냉수욕을 처방해주었다. 그 모든 처방이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놀라운 것도 아니었다. 모든 건강한 인생에는 의미와 목표가 있어야 하는 법인데 젊은 한스에게는 벌써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 P168
자신도 가을과 함께 소멸하고 잠들고 죽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자신의 젊음이 이를 거부하고 조심스럽고 끈질기게 삶에 집착한다는 사실에 괴로워했다. 그는 누렇게 되었다가 갈색이 되어 떨어지는 낙엽들이며 숲에서 피어나는 우윳빛 안개를 지켜보았다. - P169
방앗간 앞마당에는 크고 작은 압착기들과 수레며 바구니, 과일 포대, 물통, 거름망, 양동이와 나무통, 산더미같이 쌓인 갈색 과일 찌꺼기, 나무 지렛대, 손수레와 빈 마차가 흩어져 있었다. 압착기가 돌아가며 삐거덕거리는 소리와 신음하는 소리를 내며 투덜거렸다. 대부분의 압착기는 초록색 칠이 되어 있었다. - P169
누구든 가까이에서 그 광경을 본다면 주스 한 잔만 달라고 청하여 한 모금 맛볼수밖에 없으리라. 맛보고 나서는 그 자리에서 두 눈이 촉촉해진 채 달콤하고 행복한 기운이 온몸에 퍼지는 것을 느끼게 되리라. 달콤한 과일 주스의 기쁘고 강렬하고 근사한 향기는 먼데까지 퍼져 대기를 가득 채웠다. 이 향기야말로 성숙과 수확의 꽃이자 한 해를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것이었다. - P170
부드러운 5월의 봄비, 속삭이는 여름비, 다정한 봄 햇살과 따갑고 뜨거운여름 태양, 서늘한 가을 새벽이슬, 희고 붉게 핀 꽃잎들, 수확을 앞둔 과일나무의 잘 익은 적갈색 반짝임, 그 외에도 즐겁고 아름다운 일들이 한 해 동안 얼마나 많았던가. 누구에게나 찬란하게 빛나는 계절이었다. - P170
아이들의 왁자지껄한 소리는 말할 것도 없고 수백 명이 서로 외쳐대는 소리가 대단했다. 모든 목소리에서 분주함과 흥분감과 기쁨이 넘쳐났다. "여기야, 하네스, 이쪽이야! 이리 좀 와봐! 한잔 마셔봐!" "에 거참 고맙네만 너무 많이 마셔서 배가 아플 지경이야." "자네, 50킬로그램에 얼마나 줬나?" "4마르크 줬네. 하지만 맛은 끝내준다네. 자, 마셔보게!" 가끔 작은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사과 자루 하나가 터지는 바람에 사과들이 온통 땅을 뒹굴게 된 것이다. "맙소사, 내 사과들이! 여보게들, 이것 좀 도와주게!" - P171
올해도 몇 명의 심술쟁이 노인들이 어김없이 나타났다. 직접주스를 짜지 않은 지 오래되었지만 뭐든 더 잘 알고 있었고, 과일이 넘치게 풍년이었던 예전의 축복받은 해에 대해 떠들었다. 그 당시에는 뭐든지 더 싸고 품질도 좋았고 설탕을 섞는 일 같은건 생각도 못 했으며 나무에 과일이 달리는 것부터가 아주달랐다고 했다. - P172
"내가 말이야." 노인이 변명하듯 투덜거렸다. "예전에 저런거 열 개쯤은 거뜬히 먹었는데 말이야." 그러고는 진심으로 한숨을 내쉬며 커다란 사과를 열 개쯤 먹어도 거뜬했던 시절을 회상하는 것이었다. - P172
한스는 갑자기 근심에 싸였다. 에마가 그냥 가버렸으면 하고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에마는 계속 머무르며 웃고 떠들고 어떤 농담도 노련하게 받아넘겼다. 한스는 부끄러워서 아무 말도 못 했다. 존댓말을 써야 하는 소녀들과 어울리는 일은 그러잖아도 고역인데, 이 아가씨는 활달하고 수다스러운 데다 한스를 보고 주저 없이 말을 걸어왔다. - P174
. 그녀는 또한 골목 소년들마다 불러서 "사과 하나 줄까?" 하고 물어보았다. 그러고는예쁘고 빨갛게 익은 사과 하나를 집어 들고 양손을 등 뒤에 숨긴 채 "오른손이게, 왼손이게?" 하고 맞혀보게 했다. 그런데 매번 사과는 아이들의 대답과는 다른 손에 있었다. - P175
한스는 슬슬 무리에서 빠져나가 집에 가려고 했다. 그때 플라이크가 손에 지렛대를 쥐여주며 말했다. "자아, 조금만 더 해줄 수 있겠니? 에마가 거들어줄 거다. 나는 작업장에 가봐야 하거든." - P175
한스는 자신이 뭐라고 말하는지도 모르면서 에마와 대화를나누었다. 에마가 웃으면 따라 웃었고, 말도 안 되는 그녀의 장난에 손가락을 뻗어 겁을 주기도 했고, 두 번이나 그녀가 주는주스 잔을 받아 마시기도 했다. 동시에 이런저런 기억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집안일을 하는 하녀들이 저녁마다 문간에 남자들과 함께 서 있던 기억, 이야기책 속의 어떤 문장들, 헤르만 하일너에게 받았던 입맞춤 ‘여자애들‘과 ‘애인이 생기면 어떤지‘에 대해 들었던 수많은 이야기, 남학생들 사이에 오가던 비밀스러운 이야기들. - P177
그때부터 한스는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소녀의 시선을피했다. 하지만 에마가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릴 때마다 그녀를 바라보았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쾌감과 양심의 가책을 동시에 느끼며 정신없이 쳐다보았다. - P178
모든 것이 설레고 아름다웠고 완전히 다르게 보였다. 과일찌꺼기로 배를 불린 참새들이 요란하게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하늘이 이토록 높고 아름답고 그립도록 파랬던 적은 없었다. 강물 역시 청록빛으로 웃는 거울같이 이렇게나 맑았던 적이 없었다. 강둑에 부딪혀 이토록 눈부신 물보라를 일으켰던 적도 없었다. -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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